<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916년 10월 20일 |
경상북도
상주군
내서면 능암리[1] 52번지 (現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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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4년 3월 19일 (향년 87세) |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충남대학교병원 | |
본관 | 창녕 성씨 |
창씨명 | 나리시마 쇼칸(成島章煥) |
학력 |
상주공립보통학교 (
졸업) 경북공립중학교 (졸업) 니혼대학 전문부 ( 법과 / 졸업) |
가족 | 배우자 홍태현, 아들 성백경, 딸 성명숙[2]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73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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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16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52번지에서 아버지 성목(成穆)과 어머니 신정희 사이에서 태어났다.[3]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33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고, 1939년 3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개칭된 경북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도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에 진학하였다.1940년 12월 일본 도쿄도 스기나미구 고엔지3조메(高圓寺3丁目) 스미요시소(住好莊)에서 경북공립중학교 동창인 유학생 최홍준(崔弘俊)과 만나 "일본인이 조선인을 경멸하고 하숙을 거절하며 차별 대우를 하고 있음은 불쾌한 일이다. 또 우리 조선인이 아무리 공부하여 학교를 졸업하여도 취직은 어려운 일이며, 채용한 후에도 일본인과 차별 대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참혹한 일이다. 이러한 제도가 존속하는 한 조선인은 언제까지고 그러한 학대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조선 민중의 중견 지도자로 되어, 조선 민족의 문화 향상과 실력 양성에 노력하여 일본인과 동등의 수준에 이끈 뒤,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들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권유를 받아 함께 노력할 것을 맹세하였다.
1941년 12월 니혼대학을 졸업한 뒤 1942년 봄에 귀국하였고, 1943년 2월 초에는 경기도 경성부 성북정[4] 여대현의 집에서 여대현·최홍준과 다시 만나 "우리는 동지로서 이후 더욱 협력하여 난관을 돌파하고 조선 독립의 실현을 위하여 매진해야 한다"고 약속하고 이를 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할 계획을 세웠다.
1943년 3월 1일 충청남도 대전부 춘일정2정목[5] 19번지에 대전대가조합(貸家組合) 사무소가 설립되자[6] 이곳에 취직하였고, 대전부 춘일정3정목[7] 41번지에 거주하였다.[8]
그러나 이후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9] 복역하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훈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2004년 3월 19일 새벽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충남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2004년 3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