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9년 5월 13일[1] |
경상북도
상주군
내서면 농촌 (현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2] 56번지)[3] |
|
사망 | 1939년 3월 29일[4] |
경상북도 상주군 (현 상주시) | |
본관 | 창녕 성씨 |
초명 | 성성인(成星仁)[5] |
이명 | 성해주(成海柱)[6] |
가족 | 배우자 류승용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88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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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99년 5월 13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서면 농촌(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56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1919년 3월 23일 상주면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시위 주동자 한암회(韓岩回)가 시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마침 시장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에 군중이 크게 동요하자, 성해식은 시장 입구의 계단에 올라가 5백명의 군중을 향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은 호응해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긴급 출동한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시위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7] 경성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 3월 8일 가출옥한 이후[8] 상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9년 3월 29일에 사망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17년 7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5월 23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성장환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수형인명부.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59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4]
음력
2월 9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2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5]
이 이름으로 1919년 4월 28일 판결을 받았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수형인명부
[6]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7]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수형인명부
[8]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