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리스어: Ἅγιος Νικόλαος, Νικόλαος ὁ Θαυματουργός (기적의 니콜라오스)라틴어: Sanctus Nicolaus
영어: Saint Nicholas (of Myra)
이탈리아어: San Nicola (di Bari)
프랑스어: Saint Nicolas (de Myre)
독일어: Sankt 또는 Heiliger Nikolaus (von Myra)
러시아어: Святитель Николай
그리스도교의 성인으로, 4세기 로마 제국 미라 지방[1]의 대주교였다.
270년 3월 15일 소아시아 리키아 지방 파타라에서 출생, 343년 12월 6일 소아시아 리키아 지방 미라에서 사망했다. 축일은 12월 6일이며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공경받고 있다. 유해가 이탈리아의 바리에 안장되었다고 하여 '바리의 성 니콜라오'라고도 불리며 한국 가톨릭에서의 정확한 표기는 '미라의 성 니콜라오 주교'이고 한국 성공회에서의 정확한 표기는 '성 니콜라'이다. 그리스와 러시아, 어린이, 항해사, 어부, 상인, 방송인, 약사, 궁수, 전당포 주인, 무고한 사람, 뉘우친 도둑들의 수호성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정교회와 대한성공회의 수호성인이며 성 니콜라오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당으로는 대표적으로 정교회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마포구 아현동 소재)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중구 정동 소재)[2]이 있다.
2. 생애
성 니콜라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어렸을 때 양친을 여의었다. 그래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썼다고 한다.더 많은 선행을 하고 싶었던 성 니콜라오는 그리스도교에 입교해 사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사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미라의 대주교가 사망하고, 후임자를 정하기 위해 기도하던 다른 주교들에게 '다음 날 가장 먼저 교회에 올 니콜라오가 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라는 하느님의 계시가 내려졌다. 정말로 다음 날 아침에 33세의 니콜라오가 가장 먼저 성체조배를 하러 교회에 들어왔고, 그가 바로 그 인물이라는 것을 안 주교들이 다이렉트로 그를 주교좌에 착좌시켰다. 성 니콜라오는 어안이 벙벙해서 당연히 사양했지만,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순명하여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아직 신앙의 자유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주교가 되자마자 로마 제국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아 체포되고 투옥되는 날도 있었지만, 10여 년에 걸친 힘든 시기를 끝까지 버텨내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이르러 자유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정교회와 가톨릭 신앙의 쇄신과 이교도의 개종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또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이단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이 조금 전설의 레전드적이다. 성 니콜라오스가 제1차 세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따귀를 때렸다가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하면서 감옥에 가뒀는데, 하루는 밤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환영이 그 앞에 나타나 성경과 오모포리온[3]을 주었고, 다음 날 간수가 그의 모습을 보니 분명히 없었던 오모포리온을 두르고 성경을 읽는 것이었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니콜라오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그는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니콜라오를 표현한 정교회의 이콘 중에도 이 일화에 의해 오모포리온을 두른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루는 미라 지방의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일 때 식량이 가득 실린 배 여러 척이 폭풍에 밀려 해안에 밀려왔는데,[4] 성 니콜라오는 선장들에게 식량을 기증해 줄 것을 부탁했고 선장들은 마지못해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출항 준비를 하려 하니, 분명히 나누어 주었던 식량이 전혀 줄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 푸줏간 주인이 고기로 속여 팔기 위해 소금창고에 어린아이 3명을 가두어두었다가 토막내어 팔려는 것을 꿈에서 보고는 아이들을 구출해 주어 어린이의 수호성인이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선원들의 목숨을 많이 구해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항해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할 위기를 맞은 3명의 청년을 변호하여 누명을 벗어주거나 모함을 받아 죽게 된 고관들을 살려주는 등, 자칫하면 죄인을 변호하여 함께 위기를 맞을 수 있었음에도 용기있게 나서서 무고를 증명해주었다는 의미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기도 하였다.
성 니콜라오는 73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에도 전구를 통해 기적을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망하는 순간에도 시신에서 성유가 흘러나와 그것으로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성인의 유해는 1087년 이탈리아의 바리로 [5] 이장됐으며 끊이지 않는 기적 때문에 아예 순례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3. 산타 할아버지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6]
어느 집의 세 딸이 너무 가난해 결혼을 할 수가 없어 사창가에 팔릴 위기를 맞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니콜라오는 그들이 무사히 시집을 갈 수 있게 돕고 싶었지만 요란스럽게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잠든 밤에 맏딸이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갈 수 있을 만큼의 황금을 담 너머로 조심스럽게 놓고 갔다. 그 다음날에는 둘째 딸 몫의 황금을 놓고 갔고, 두 딸을 구제할 수 있게 된 그들의 아버지는 셋째 날에는 대체 누가 이런 선행을 베푸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니콜라오는 그 날도 셋째 딸 몫의 황금을 놓고 가려다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고, 그는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졌다.
산타클로스 전설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녀들이 축일 전날인 12월 5일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에 가족 중 한 명이 성 니콜라오의 분장을 하고 나타나 착한 어린이를 칭찬하고 나쁜 어린이를 혼내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St. Nicholas를 '신터 클라스(Sint-Nicolaas→ Sinter Claes→ Sinterklaas)'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영어 문화권에 퍼지면서 묘하게 바뀌고 크리스마스 행사와 결합한 것이다. 산타클로스가 입은 옷의 빨간색은 본래 주교( 추기경)의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기타
영국 존무어 대학 안면연구소에서 복원한 성 니콜라오의 얼굴 복원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산타클로스인 이미지로 익숙한 전형적인 북서유럽인의 얼굴이 아니라 전형적인 중동계 백인 혹은 그리스인의 외모에 더 가깝다. 그래도 인자한 산타할아버지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평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