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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FF> BRITISH LEYLAND 브리티시 레일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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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 |
정식 명칭 |
British Leyland Corporation. Ltd. (1968~1975) British Leyland Limited (1975~1979)[1] British Leyland Public Limited Company (1982~1986)[2] |
한국어 정식 명칭 | 브리티시 레일랜드 |
설립일 | 1968년 |
해체 | 1986년 |
소재지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업종 | 자동차 제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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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그룹 C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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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8년 1월 17일에 설립해 1986년까지 존속한 영국의 자동차 회사.한때 승승장구하며 영국의 제너럴 모터스를 꿈꿨지만 잦은 노사갈등과 비효율적 경영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공기업 실패와 영국병의 전형적 표본이 되었고, 현재는 영국의 자동차 산업 전체를 완전히 몰락시켜버린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2. 통합의 시작
1960년대의 영국 자동차 메이커들은 다양한 소형차 모델을 내놓으며 나름대로 잘나가고 있었지만, 영국의 자동차 시장은 다양한 메이커들에 비해 시장이 좁았기 때문에 툭하면 출혈 경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특히 모리스를 합병시킨 오스틴, 즉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이하 BMC)[3]은 지나치게 박리다매 정책[4]에 매달리느라 차를 만들어 팔 때마다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미니나 BMC ADO16같은 베스트셀러가 나와도 팔 때마다 적자행진을 이어갔고, 노동당 정부의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회사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공장과 직원 수를 불려서 화를 스스로 불러오다시피했다.BMC는 회사문화 및 경영체계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오스틴 출신의 레오너드 로드 당시 BMC 회장이 중앙집권식 회사경영을 꾀하고 있는데다가 BMC 결성 이전부터 오스틴, 모리스의 사이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합병 직후 모리스가 자체개발한 엔진들을 1955년까지 모두 단종시키는가하면 모리스 출신 인사들을 퇴출하거나 지위를 강등시키는 등의 보복조치가 이루어져 사내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여기에 회사 내부에서 세력을 키워 온 딜러점 점주들[5]을 달랜다는 명분으로 모든 계열사를 유지하여 대중차의 오스틴-모리스, 준고급의 라일리-울즐리, 스포티 지향의 MG-오스틴 힐리같이 차급별로 브랜드의 중복이 심한데다가 브랜드를 유지할 예산이 충분치 않자 1950년대 중후반부터는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자사 차를 상당부분 재탕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파업을 할 때마다 요구사항을 안 들어줄 경우의 손해를 당장 걱정하여 제대로 된 의견조율을 거치지 않고 노조원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줄대로 다 들어주었다.[6] 나아가 1964년의 중형차 라인인 BMC ADO17의 상업적 실패가 겹쳐, 4년간 신차 하나 못 출시할 정도로 회사가 재정적으로 취약해져 정부 지원을 자주 받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한때 세계 2위를 기록했던 영국 전역의 자동차 생산량도 진작에 1956년에 서독에게 추월당한 것도 모자라( #)[7] 프랑스, 일본에 밀려나기 시작하고 영국 자본이었던 루츠 그룹이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으로 매각되자, 결국 1968년 영국 노동당 정부가 과당(過當) 경쟁으로 인한 회사의 경쟁력 상실과 자국 자동차산업의 주도권 상실을 막고자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의 부도위기를 계기로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레일랜드 모터스[8]라는 상용차 회사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레일랜드는 도널드 스톡스가 굴지의 상용차 기업으로 성장시킨 동시에 로버, 트라이엄프, 랜드로버, AEC 등도 하나 둘씩 인수하며 세력을 불려나가고 있었고, 여기에 대중차 시장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도 1966년에는 재규어와 합병하여 브리티시 모터 홀딩스를 성립한 참이었고 도널드 스톡스 휘하 레일랜드와 영국 정부의 관심이 맞물림에 따라, 이들은 외국계 기업들[9]을 제외한 대다수 영국 메이저 자동차 메이커들을 레일랜드의 이름 아래 통합시켰고 회사명도 브리티시 레일랜드로 개명했다.
예외적으로 영국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 중 애스턴 마틴과 모건, 그리고 삼륜차 전문업체 릴라이언트와 여러 백야드 빌더들, MCW같은 군소 상용차 업체들은 독립된 회사로 계속 남았으며,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분야 한정으로 레일랜드가 아닌 빅커스에 통합되었다.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에 통합되었던 메이커들은 다음과 같다. (통합의 주축을 담당했던 레일랜드 제외)
- 로버/ 랜드로버 (Rover/Land Rover)
- 오스틴 (Austin)
- 모리스 (Morris)
- 울즐리 (Wolseley)
- 란체스터 (Lanchester)
- 대임러 (Daimler)[10]
- 라일리 (Riley)
- 스탠더드 (Standard)[11]
- 반덴 플라 (Vanden Plas)
- 알비스 (Alvis)
- 미니 (Mini)
- MG
- 트라이엄프 (Triumph)
- 재규어 (Jaguar)
이렇게 수많은 메이커들을 통합한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영국 자동차 시장의 36%를 차지하는 메이저 업체로 거듭나게 되었고, 공장 47곳에 고용인원 19만명의 대규모 기업이면서 미니와 재규어같은 인기 차종들을 모두 갖추었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이 회사의 장밋빛 미래를 점치곤 했었다. 또 당시에는 비슷한 과정을 걸쳐 설립된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시장 점유율 50%를 달성했던것처럼 브리티시 레일랜드도 마찬가지로 잘 나갈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도 했다.
3. 불협화음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메이커들을 합병했던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출범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마찰음을 내며 삐그덕거렸다. 메이커들 간의 판매 간섭은 기본이었고, 이로 인해서 차기 자동차 개발계획 때 판매 간섭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물어뜯는 개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재규어 XJ 시리즈를 밀어주기 위한 재규어 경영진의 횡포 때문에 아예 개발이 백지화되어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한 로버의 P8같은 사례까지 있었다. 링크더군다나 회사 분위기도 경직되어서 전 뒷바퀴굴림 차종에 걸친 플랫폼 공용화를 구상했던 디자이너 로이 헤인즈,[12] BMC 시절의 베스트셀러인 미니와 ADO16의 아버지였던 알렉 이시고니스, 계열사들 중 내내 적자였던 오스틴과 모리스의 1973년 흑자전환을 이끌어낸 조지 턴불[13][14] 등의 인재들이 이탈하는 일도 생겼다. 그나마 있던 경영진들도 무능하다는 평가가 다수였는데, 가령 1970년대에 불어닥치게 되는 해치백 붐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으로, 알렉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해치백 오스틴 맥시를 밀어주고자 한동안 차기 차종들 대다수에 해치백 구조를 확대 적용하지 않았던 사례가 있었고, 또한 저렴하고 단순한 설계의 후륜구동 중형차를 의도한 모리스 마리나의 개발비가 가로배치 전륜구동 구동계, 사각형 스티어링, 유기압 현가장치 "하이드라가스" 등의 당대 첨단구성으로 무장한 준중형차 오스틴 알레그로의 그것을 뛰어넘었던 사실은 BL의 비용 관리가 매우 부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되기도 했다.[15]
또한 각 회사의 경영진과 노조, 그리고 다른 자회사들 간의 싱크로율은 거의 0에 수렴했고, 이로 인해서 회사 간의 감정싸움 같은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딜러점 점주들의 세력을 잠재우려고 딜러점 여럿을 폐쇄했다가 점주들이 경쟁사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대표적이었고,[16] 품질관리도 노동조합과 경영진 모두가 생산물량 단위에만 신경쓰는 수준의 기존 관행[17]에 익숙해져 이에 변화를 주려고 할 때마다 노조부터 경영진까지 거부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러다보니 작업복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파업을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아진 노사문제로 인해서 개발에 들어가야 할 시간과 비용은 노조를 설득하는 데 들어가기 일쑤였다. 당시 독일(서독)차 업체들은 노조를 설득하는 데 매년 5%의 시간만 쓰면 됐지만,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무려 60% 이상을 노조를 설득하는 데 써야만 했고, 고로 자동차 업계에서의 최신의 트렌드와 디자인을 분석하는 데 실패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당시 영국이 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루츠 그룹과 영국 포드, 복스홀과 같은 다른 업체들과 비교해도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노사 관계는 영국 전체를 통틀어 최악이었다.
결국 이렇게 개발 시간과 비용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한 모델을 만들면 개발 비용과 시간 문제로 인해서 10년 이상을 우려먹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스틴 알레그로, 모리스 마리나와 같이 당시에 개발된 차들은 처음부터 다른 경쟁 차종들에 비해서 저질에 품질마저도 형편없었으며, 다른 회사들이 새로운 모델을 줄기차게 내놓을 때, 브리티시 레일랜드에서는 한두 세대 전에 개발된 모델을 당시 트렌드에 맞게 쬐끔 손봐서 내놓을 정도로 막장가도를 달렸으며, 그나마 회사 내부에서 개발했던 차기 프로젝트들도 브랜드 간의 간섭이나 부족한 예산을 이유로 많은 수가 줄줄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창립 당시 세운 배지 엔지니어링을 철폐한다는 계획에도 1975년에 나온 중형차 라인인 오스틴-모리스 18-22와 울즐리 식스[18]는 도로 배지 엔지니어링 모델로 출시되기도 했다.
4. 국유화
그렇게 막장플래그를 선사하던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70년대 이후 오일쇼크와 지속적인 파업으로 채산성 악화가 발생, 부도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다가 1974년 12월에 파산했고, 결국 영국정부는 돈 라이더 경의 제안인 "라이더 리포트"를 받아들여 마침내 1975년 국유화를 결정했다. 국유화된 후에는 회사 경영진들의 전반적인 개편과 함께 로버 SD1을 비롯해 굉장한 품질과 디자인을 자랑하는 모델들을 만들어내는 등 노력이 있었고, 마거릿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0년대 말에도 마이클 에드워즈 신임 회장의 과감한 관리 하에 절반 이상의 공장과 인원을 감축하고 채산성이 적은 수많은 브랜드들을 폐기했으며 품질과 성능 항상을 위해 일본의 혼다와 기술제휴를 맺은 뒤 살아있는 메이커들도 특성에 따라 재분류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국유화 초반에 1975년 당시의 점유율을 10여년간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생산시설 확장을 적극 권유하는 라이더 리포트의 지나친 낙관주의적 전망을 받아들인 결과,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한동안 제대로 된 경영을 받지 못한 채 품질불량 등의 막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오스틴 메트로 등의 일부 차종을 제외한 대부분 라인업의 판매량은 바닥을 기었다. [19]결국 보수당이 집권한 1979년에는 마거릿 대처 정부에 168억 상당의 지원금을 요청, 보수당 정권도 대량실업으로 인한 대규모 손실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나름 사실상 빈사 상태의 이 회사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 시기에 수장이 된 마이클 에드워즈가 위에서 상술한데로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단행해 그가 퇴임하는 1982년 기준으로 회사 상황을 어느 정도 호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개발이 이루어진 신차들이 출시 시점을 놓치는 바람에 경쟁력을 상실하는 등,[20]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막장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84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영국정부는 마침내 이 돈먹는 하마를 분해시키기 시작한다.
5. 비극의 끝
결국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공중분해되기 시작했다. 재규어는 1984년에 포드에 매각되었으며, 같은 해에 모리스는 마리나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이탈(Ital)을, 트라이엄프는 어클레임(Acclaim)이라는 혼다 시빅과의 플랫폼 공유 모델을 마지막으로 자동차 사업을 접었다. 통합의 중심이었던 레일랜드는 1986년에 네덜란드 트럭 제조사 DAF에 매각되었고 이후 버스 부문이 분리되어 스웨덴 볼보그룹으로 인수, 볼보버스에 합병되었으며, 그나마 경쟁력이 있었던 오스틴과 로버, 그리고 MG는 오스틴 로버 그룹 아래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마침내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에 매각, 다시 한 번 재기의 기회를 노리려 했지만 이마저도 여러 차례 인수되는 과정에서 사실상 붕괴되었다.결국 재규어와 로버[21] 및 랜드로버( 포드에 분리매각)는 두 차례의 매각 끝에 옛 식민지 기업인 타타[22]에, 미니는 독일 BMW에, 오스틴을 비롯한 대다수의 브리티시 레일랜드 소속 브랜드들과 브리티시 레일랜드/오스틴 로버 그룹/로버 그룹/MG로버 그룹의 본체는 최종적으로 중국 상하이자동차에 분할 인수되었다. 이로써 영국 기업인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역사는 완벽하게 끝났다. 각 브랜드와 모델명의 상표권 역시 재규어랜드로버, BMW 그룹, 상하이자동차 등으로 분할되어 넘어갔다. #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몰락은 곧 영국 자동차 산업의 붕괴와도 같았으므로[23],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차 메이커가 현대자동차그룹 하나만을 중심으로 재편된 오늘날 한국에서도 반면교사로 회자되고 있다. 특히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그 외의 각종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불안정해진 노사관계와 지나친 원가절감으로 인해 협력업체들이 차례차례 파산하는 등 한국 자동차산업의 붕괴조짐이 보인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상황.
참고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이사였던 조지 턴불은, 이후 현대차에 의해 스카웃돼서 훗날 현대자동차 부사장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현대차의 첫 고유 모델 포니의 개발에 기여하였다.[24]
6. 생산 차종
-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기[25]
- 로버 SD1
- 모리스 마리나/이탈
- 오스틴 메트로
- 오스틴 맥시[26]
- 오스틴 알레그로/ 인노첸티 리젠트
- 오스틴 프린세스와 앰베서더[27]
- 트라이엄프 스태그
- 트라이엄프 TR7/ TR8
- 트라이엄프 어클레임
- 트라이엄프 돌로마이트
- 트라이엄프 톨레도
- 미니 클럽맨 클래식/1275GT, 밴, 픽업, 인노첸티 미니
- 재규어 XJ-S
-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 클래식 랜드로버 시리즈
- 다임러 소버린/다임러 더블 식스
- 레일랜드 P76
- 상용차 라인[28]
- BMC & 레일랜드 시기[33]
이 외에도 1975년 국유화 이후부터는 농기계와 냉장고, 지계차, 인쇄업, 소방 펌프 등의 기타 제품들을 생산하는 업체들도 소유하고 있었다. 링크[39]
현재 인도의 트럭 회사인 아쇽 레일랜드(Ashok Leyland)는 레일랜드 인도 지사의 후속격 되는 회사이다.
[1]
국영화 시기.
[2]
흔히 BL 공사 라고 줄여 부른다.
[3]
미니의 극초기 모델을 만든 회사로도 유명하며 밑의 오스틴과 모리스가 합병 직전까지 이 회사 산하 브랜드였었다.
[4]
당시 회장인 레오나드 로드는 차가 좋으면 무조건 잘 팔린다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익보다는 판매량을 우선시하던 오스틴 시절의 판매전략에 집착하는 바람에, 차량 제조단가를 생각하지 않고 경쟁차들보다 무조건 싸게 팔아야 미니, ADO16같이 너무 튀고 진보적인 제품군이라도 거부감을 덜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손해를 보는 가격에 차를 팔았다. 여기에 재무팀과 마케팅 팀같은 고학력을 요구하는 직책들이 자동차 업계에서 중요성이 커질 때 이들을 무시하는 풍조가 강했고, 미니와 ADO16은 가로배치 전륜구동이라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설계 때문에 제조단가까지 높은데다가 초기 생산분의 품질문제까지 발생했던 탓에 보증수리 비용도 꾸준히 발생하였다.
#
[5]
BMC로 합병하기 이전의 오스틴, 모리스 시절부터 딜러점을 운영해왔고, BMC가 성립되자 오스틴과 모리스의 각 라인업을 유지할 것은 물론 딜러점 운영체계도 자율운영 체계로 갈 것을 요구했다. 브리티시 레일랜드 창립 초기까지 가면은 이들이 라인업 구성에도 관여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6]
BMC 결성 초창기 시절의 시장상황에서 비롯된 관행이었다. 전쟁 직후 국민소득이 서서히 다시 늘어나는 시기에 승용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공급이 이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를 따라잡지 못할 경우를 염려해 노동조합의 요구 사항을 조율 없이 모두 수용했다. 1956년 즈음부터는 레오너드 로드 본인도 파업에 질려서 휘하 직원인 조 에드워즈에게 노사 간 협상업무를 맡겼다가 에드워즈가 거절, 결국 에드워즈가 BMC에서 사임하는 일도 벌어졌다.
[7]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렀던 시절만 제외하면 본토의 피해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독일은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영토까지 둘로 갈라졌다. 그런 서독이 2차 세계대전 종전 11년 만에 영국을 제낀 것.
[8]
1907년
증기화차에서 재창업. 1968년 당시에는 각종 상용차 계열사들과 함께 그룹 내의 승용차 부문인 로버/트라이엄프, 랜드로버를 소유하고 있었다.
[9]
영국 포드, 복스홀(GM 소속), 루츠 그룹(크라이슬러 소속)
[10]
그
다임러 벤츠와는 다른 회사. 다임러 벤츠는 '다임-러'로 읽는데 반해 BL의 다임러는 '대임-러'로 읽는다. 한때는 꽤 잘 나가던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였지만 BL 해체라던가 이래저래 거치면서 2008년까지
재규어사의 고급 브랜드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예전의 쌍눈이 재규어 중 매우 크고 고급스러운 모델의 뒤를 보면 Daimler 로고가 붙어있다.
이 로고. 2008년 재규어를
타타자동차가 인수한 이후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다.
[11]
트라이엄프 시절에 이미 폐기된 브랜드지만, 상표권은 보유중이었다.
[12]
프로젝트 콘도르라는 이름 하에 브리티시 레일랜드 브랜드 전체에서 공용할 수 있는 공용 후륜구동 플랫폼을 구상했다. 있는 부품들을 활용하여 개발하고
모리스 마리나에 최초로 적용하려고 했으나 경영진들의 반대와 촉박한 개발일정에 쫓겨 계획이 무산되고, 로이 헤인즈도 1969년에 퇴사했다.
#
[13]
합병 당시 레일랜드의 계열사였던 스탠더드-트라이엄프 출신으로,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대량생산 대중차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바랬다. 턴불은 경영진들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BMC 시절의 경영방침을 브리티시 레일랜드라는 대규모 기업에 적용하면 오히려 윗선에서 하위 조직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의 탈집중화와 계열사 간 자율성 부여를 외쳐,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회장이자 턴불을 기용한 상사 도널드 스톡스와 대립하곤 했다. 결국 도널드 스톡스는 조지 턴불의 경쟁상대이자 영국 포드 출신으로서 회사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영국 포드 같은 경쟁사들 대비 판매량으로의 정면돌파가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고급화를 감행해 대당 마진을 키우자고 주장한 존 바버를 자신의 후임으로 선택하였고, 턴불은 존 바버가 승진한 지 5개월만에 브리티시 레일랜드를 떠났다. 그리고 퇴사 후 턴불이 향한 곳은
아시아의 한 작은 반도국가의 신생 브랜드
현대자동차. 그는 현대자동차로 올때
모리스 마리나 2대를 가져와
현대 포니의 컨셉을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
#
[14]
존 바버도 영국 포드에서 10년간 일한 베테랑에 히트작인
포드 코티나를 개발한 경력이 있었기에 무능하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전신인 BMC로부터 물려받은 약점인 과잉고용된 직원들의 구조조정을 시행했고, 추가채용을 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큰 갈등 없이 약 19만명의 직원들 중 3만 명을 정리했다. 하지만 1973년 말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마진율이 낮은 라인업이었던 미니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으로 수익성이 갑자기 나빠지고 1974년 말에 파산, 여기에 라이더 리포트에 기반한 국유화 과정에서 구조조정의 빛이 사라지고 말았다.
[15]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성립되었을 당시엔, 전신 시절에 차 하나를 개발해 손해를 보는 구조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영국 포드에서 인력들이 많이 건너와 비용절감 시도를 했었지만, 그럼에도 생산규모 대비 고용인원과 공장 수가 과도한 BMC 시절의 비효율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해 차를 팔 때마다 손해를 보는 기존의 구조는 여전히 변하질 않았다. 게다가 도널드 스톡스는 레일랜드 시절의 성공에 취하여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만드는 차마다 무조건 팔릴 것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불필요하게 많은 인원 수만큼 차량의 생산대수를 늘리면 비효율성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구조조정을 안일하게 받아들였다.
#
[16]
특히
닛산자동차를 비롯한 수입차 업체들이 브리티시 레일랜드에서 빠져나간 점주들과 계약해 반사이익을 보았다.
[17]
즉, 도급제로서 노동자의 임금이 생산물량에 달려 있었다.
[18]
국유화 이후 울즐리를 폐지한 뒤 세 브랜드로 팔던 시리즈를 모두 "프린세스"로 통합했다.
[19]
이 시기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새로 취임한
제임스 캘러헌 총리가 관용차 2대를 주문했더니 완성품에서 34가지 결함이 발견되어 한참동안 수리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총리가 차에 탔을 때, 창문을 열려고 버튼을 눌렀더니 창문이 무릎 위에 떨어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연히 캘러헌은 이 차를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일갈.
[20]
메트로 이후 1983년과 1984년에 출시된 대중차 라인업인
오스틴 마에스트로와
몬테고의 출시 시점을 놓치는 피해를 보았다. 본래는 1981년에 출시했어야 했던 차들이었지만 한 번에 세 차종을 개발할 돈과 시설이 브리티시 레일랜드에 없었고, 마이클 에드워즈도 개발역량과 투자를 슈퍼미니급 전륜구동 해치백으로서 가장 유망하다고 판단한 메트로에 집중시켰다.
[21]
2000년 이후 로버 브랜드는 BMW에게 상표권이 있었으나, 상하이자동차가 MG로버 그룹을 인수한 뒤
로버 75를 재생산하려 하자 랜드로버 브랜드를 이유로 당시 모회사가 로버 브랜드의 상표권을 사들여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22]
현재
타타대우상용차의 모기업인 그 회사 맞다.
[23]
오늘날에도 영국 국적의 자동차 회사로
모건과
맥라렌,
애스턴 마틴 등이 있지만 레일랜드가 존재하던 시대에 비하면 정말 초라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24]
# "...그 무렵 때마침 영국 유수의 자동차 회사인 BLMC(British Leyland Motors Corporation) 부사장 조지 턴불이 회사를 그만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정주영은 설득의 천재였다. 그는 턴불과 엔진,
액셀러레이터, 트랜스미션 등 주요 부품 제작 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19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간 5만 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포드사와 완전 결별한 후 3년이 지난
1976년 1월, 현대자동차는 최초의 국산차 ‘포니’를 탄생시켰다."(기사 발췌)
[25]
이 당시에는 뱃지 엔지니어링을 억제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프린세스 외에는 뱃지 엔지니어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26]
이쪽은 BMC 시절부터 개발되었으나, 출시는 브리티시 레일랜드 때인 1969년에 이루어졌다. 사실상 BMC 산하에서 개발된 마지막 차로, 1978년부터 단종 때까지는 “레일랜드 맥시“로 판매되었다.
[27]
이때 나온 프린세스는 오스틴, 모리스, 울즐리의 3개 브랜드로
리뱃징되었으나, 얼마 안가 프린세스라는 단일 브랜드로 통합되었다.
[28]
레일랜드 산하에서 건너온 차들이 대부분이다.
[29]
레일랜드 최후의 2층 버스 섀시였다. 레일랜드의 버스 부문이 볼보그룹에 인수된 이후
볼보 올림피안이라는 이름으로, 엔진만 볼보의 것으로 교체하여 2000년까지 생산되었다.
[30]
영국의 아이콘인
AEC 루트마스터
2층버스를 만든 그 회사의 차량으로, 브리티시 레일랜드 성립 전의 AEC는 레일랜드 소속 업체였다.
[31]
스캐멜 역시 레일랜드 소속의 상용차 회사이다.
[32]
알비온도 레일랜드 산하 상용차 업체이다. 여기서의 리버는 "Reiver"로 표기.
[33]
이때 출시된 차들까지만 뱃지 엔지니어링이 용인되었다.
[34]
이때부터 미니가 독립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35]
여담으로
기아 니로의 광고에서, 스핏파이어가 견인되어 가는 스포츠카로 나왔다.
[36]
레일랜드의 트럭 부서. 지금은
DAF 트럭의 생산기지로 운영되고 있다.
[37]
레일랜드의 버스 부서. 1987년 민영화된 지 1년 만에 볼보그룹에 인수, 1993년까지 존속했다가
볼보 버스에 흡수된다.
[38]
중국 상하이자동차 산하에 있으며, 브리티시 레일랜드/오스틴 로버/로버/MG로버 그룹의 본체를 난징자동차가 인수한 뒤 상하이자동차가 다시 인수했다.
[39]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중장비 제조업체는 트럭 및 버스 부서와 분리된 이후, 2007년에 핀란드 측의 모회사와 같이
두산인프라코어로 인수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