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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02:53:01

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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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족3. 생애
3.1. 생애 초기3.2. 관직 생활3.3. 최후
4. 평가5. 허균과의 관계6. 택리지에 소개된 일화7.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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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燁 (1570~1623)

1. 개요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이다.
자는 숙야(叔夜), 호는 약창(葯窓)이다.

광해군과 금성군 박엽은 문화류씨 류자신과 류덕신 형제의 딸과 각각 혼인하여 4촌동서 사이이다.[1] 광해군의 정비는 문성군부인 류씨이다.

2. 가족

본관은 반남으로, 반남 박씨의 다른 사람들이 서인인데 반해 그는 광해군과 사촌동서 사이 였다.

부친은 참봉 박동호(朴東豪)이며, 모친은 이주국(李柱國)의 딸이었다.

3. 생애

3.1. 생애 초기

태어난 곳은 미상이다.

1597년 음력 03월 17일 박엽은 문과 별시(別試) 병과(丙科)시험을 한성부에서 보고 합격자 19명 중 17등, 11위로 급제했다. #

문과 시험에 급제했고 무과에 시험을 친 적은 없었으나 이후 북방 지역의 방비에 큰 역할을 하는 등 군사령관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3.2. 관직 생활

문과 급제 이후 정언(正言), 병조정랑, 직강(直講), 해남 현감, 평양 서윤(平壤庶尹)을 역임했다. 선조 시절부터 지방관을 지내면서 비리 행위로 고발을 받은 기록이 있는데, 커리어 초창기부터 비범한 싹(?)이 보이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서 함경도의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일을 맡았으며, 동북변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호조에서는 그가 민첩한 재주에 산술이 뛰어나다고 칭찬하며 전라도로 부임시킬 것을 추천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엄청난 수위의 상소가 빗발쳤는데, 박엽이 북방에 부임하자 혹형을 남발해 인명을 마구잡이로 살상했기 때문이다. 실록에서 어사의 조사 결과[2] 등 여러 기록을 종합한 바에 따르면 박엽은 중국어에 능통하고 일 처리가 뛰어났으나, 이방, 향리를 비롯해 사람 목숨을 해치기를 풀 베듯 하여 관할 백성들이 그의 살을 씹고 싶어했을 정도고 사람들이 도망가 고을들이 폐허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남편을 살해하고 아내를 강간하거나 수령이면서 관비, 여종들을 마구 겁탈해 풍속을 어지럽히고, 중국어 스킬과 행정능력, 산술 능력을 모두 고루 악용해 어마어마한 부정축재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런 높은 수위의 상소문이 가는 데마다 조정에 올라왔을 정도인데다가, 이것은 대부분 서인 사관이 후일 광해군일기를 편찬하며 덧붙인 평가가 아닌 광해군 당시의 상소문들, 광해군 정권 측 인사였던 어사 이창정의 고발이 출처다. 왕의 인척인 박엽을 직접 살인마로 매도하는 고발이 몇 차례나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그 심각성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은 한번 그를 파직해 의주 부윤으로 보내는 조치를 하면서도 집요하게 박엽을 감쌌으며, 이후로도 대부분의 상소를 묵살했다. 정초본 실록에 의하면 이렇게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재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엽이 광해군이 집착하는 건축 공사를 도와 세자 시절 분조를 이끌던 추억의 장소에 멋진 누각을 세워 준 것과, 궁궐 내에 인맥이 있었던 것, 중국어를 해 역관들에게서 얻은 사치품을 진상해 광해군에게 환심을 산 것이 작용했다고 한다.

광해군 9년 이후 6년 간 평안감사로 재직하며 서북변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박엽이 관직을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599년에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에 대해 남이공 김신국이 반대해서 문제가 터졌다. 그러자 북인이 분열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정인홍 류영경은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에 대해 논쟁을 벌였지만,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여 결렬되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정인홍을 중심으로 해서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이 이끄는 대북과 유영경을 중심으로 해서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이끄는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1608년에 선조가 사망할 때까지 대북은 광해군 지지와 소북은 영창대군 지지로 했으며, 후계 선정 문제로 당쟁을 이어갔지만 광해군이 즉위하고, 소북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광해군 지지로 바꾸면서 유영경은 자결해야 했다. 이후에는 대북과 소북이 권력을 나누었다.

광해군 11년 평안도 관찰사로서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의 군량미를 (분호조참판 윤수겸과 함께)책임지는 역할을 맡았으나 태업을 하며 군량미를 제때 보내지 않아서 강홍립의 조선군을 굶게 하고, 결국 조선군이 명나라군에게 식량을 구걸하는 처지로 만들었다. 이런 태업을 저지른 원인은 원정군 사령관인 도원수와 본인의 직급이 비슷했기 때문에 지시가 먹혀들지 않아 도원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3.3. 최후

1623년에 인조반정이 터졌고 반정이 성공한 바로 즉시 의주 부윤 정준과 같이 살해되었다.

인조반정 시기에 의주 부윤을 지냈던 정준과 함께 유일하게 반정 세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는 몇 안되는 사례였다.[3] 반정이 성공한 이후에 광해군 시기에 피해를 입은 서인과 남인은 북인 처벌에 대해 논의했다. 북인 처벌에 대해 2가지로 나눴는데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해서 사직과 유배를 간 북인들은 살려줬지만, 북인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재기하면 반드시 서인과 남인의 권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아 처벌했고, 강력한 무장인데다가 애초에 연쇄살인에 폭정으로 악명이 높던 박엽은 살아날 길이 없었다.

이때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이 목숨을 잃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 중북 유몽인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조 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했다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 당했으며 이러한 북인 처벌에 대해 북인들은 반발해 임취정 박홍구 임취정 유효립등을 주축으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거사를 계획하나 모두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해서 북인들은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임취정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의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시도로 인해 대북과 소북을 가릴것 없이 완전히 멸망했으며, 이후에 남이공과 김신국이 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게 흡수되어서 조정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연쇄살인, 강간, 부정축재 등 숱한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집요하게 광해군의 옹호를 받으며 평안 감사로 재직하던 박엽은 의주 부윤 정준과 함께 변란을 일으킬 지 모르는 무장이라는 이유로 재빠르게 처형당했으며, 이 당시 갖고 있는 재물이 왕의 재산인 내탕고의 재물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원한을 가진 백성들이 많았는지 평양 백성들이 그가 죽자 관을 파내 가루로 만들고 시신을 난도질한 뒤 그의 애마까지 죽였는데, 처자식들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산더미 같은 재산은 공신들에게 분배되었다.

4. 평가

순화군, 홍윤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의 살인마로, 권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이 도망가 고을과 요충지들이 폐허가 될 정도로 살육을 자행한 인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보다 더한데, 순화군이나 홍윤성 둘은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 비행을 자행한 정도지만 박엽은 공권력을 동원해 대량살인을 한 행정관이어서 피해의 규모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간, 부정축재 등 살인 외의 범죄도 숱하게 저질렀다.

그러나 무장, 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은 그를 살인마로 단죄하는 후대의 사람들에게조차 고평가받을 만큼 뛰어났던 것 같다. 청나라를 상대하여 별 일 없이 여러 해 동안 수비를 잘 한 것으로 보면 꽤 유능했던 듯하고, 실제로 정묘호란 병자호란 후에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나 친위 무장으로서 그의 능력을 경계한 반정 세력이 틈을 주지 않고 신속하게 처형했던 것을 보면 그의 빈자리는 상당히 컸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신의 자리에 요구되는 여러 능력이 매우 뛰어났지만, 그 능력을 모두 악행에 쏟은 결과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시체까지 난도질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부정축재자, 살인마인 것과 별개로 무장으로서의 실무능력 자체는 실제로 현장에서 고평가되었고 이를 아쉬워하는 여론은 꾸준히 존재했는지, 숙종 1년에는 주강 도중 박엽이 쌓아 놓은 성의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했으며 # 33년인 1707년에 복권 논의가 나오기도 하였고 # 결국 고종 1년인 1864년에 복권되었다 #

사후 민간에서 이미지가 신비화되거나 동정적인 여론이 생긴 탓에, 여기에 혹한 사람들이 평전 등으로 지나치게 박엽을 띄워 주고 고평가하면서 집권 서인의 폄하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4] 학계에서는 당연히 박엽의 학정을 부정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보며, 박엽에 대한 긍정적인 야담이나 야사, 박엽을 섬기는 음사(淫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악인이라지만 시신을 난도질하는 등 그에게 끔찍한 모욕을 가한 데 대한 평양 관민들의 일종의 연민의 발로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논문도 있다. #[5] 광해군과 직접 혈연으로 맺어진 친위세력인 박엽에 대한 악평이 집권 서인에 의해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면, 박엽에 대한 고평가 역시도 양차 호란의 패배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민간에서 심하게 부풀려진 측면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5. 허균과의 관계

허균의 제자 이식은 택당잡저에서 허균과 박엽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 別集) 제15권 〈잡저〉 ‘산록’ #
이식에 의하면 허균은 수호전을 좋아했으며, 박엽과 함께 수호전의 도적 두목들의 이름으로 별명을 삼는 것을 즐겼다. 허균과 박엽은 실제로 친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606년 음력 1월 28일 허균이 조카와 함께 평양으로 여행을 갔을 때 당시 평양 서윤(平壤庶尹)인 박엽이 허균을 위해서 구름무늬로 장식한 선방(仙舫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관서 지방에서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 그러나 3년 후 1609년 음력 12월 허균과 박엽의 관계가 안 좋아진 건지 허균이 박엽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추부(秋部 형조(刑曹)의 별칭)에서 금속(禁贖 금령(禁令)을 어긴 죄로 내는 벌금)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공도 태수(孔道太守)가 문을 닫고 교지(敎旨)를 거절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을 닫고 교지를 거절하고서는 제가 금속을 제거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니, 이는 법(法)으로 자기는 단속하면서, 예(禮)로 남을 대우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붕우(朋友)가 상호간에 권면(勸勉)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역시 각자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文部) 18 ○ 척독 하(尺牘下) "박숙야(朴叔夜)에게 보냄"[6] #

6. 택리지에 소개된 일화

택리지에 박엽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택리지에서는 박엽이 재물을 잘 활용했고, 첩자를 잘 썼다고 평가한다. 평안감사 시절 순찰 도중 청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었는데, 한밤 중에 만주족 한 사람이 귓속말을 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박엽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꼬치구이를 대접했는데, 대접한 꼬치구이의 숫자가 청나라 군사의 숫자와 딱 맞아 떨어지자, 만주족 장수가 괴이하게 여겨 공격하지 않고 화친을 청했다고 한다.[7]

7. 일화

그의 죽음에 얽힌 일화 연려실기술에 전해진다. 박엽은 평소 미신을 잘 믿어 점쟁이의 말을 잘 들었는데, 어느 날 그로부터 천인(또는 일만)을 죽여야 무사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 때부터 사소한 죄에도 트집을 잡아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인조반정 이후 이러한 실상이 조정에 전해졌고, 그를 처형하러 구인후라는 금부도사가 파견되었다. 처형당하는 순간에서야 박엽은 점쟁이가 죽이라는 '천인'이 바로 구인후[8]을 깨달았다고 하며, 이후 박엽의 시신은 분노한 평안도 백성들에 의해 가루가 되었다고 한다.[9]

2010년 12월 5일자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일을 소재로 방송하였는데, 그 점쟁이가 금발의 미녀(?)[10]이다... 여기서는 '천인'이 아닌 '일만'버전으로 소재를 삼았다. 작중에선 마치 멀쩡한 사람이던 박엽이 이 점괘 때문에 사람을 마구 죽이다 정적이던 김자점에 의해 고발당해 사형당한 것처럼 묘사되어, 선인인 박엽과 악당 김자점 같은 구도를 만들어냈다. 현실은 박엽이 김자점보다 훨씬 악독한 인물이었음에도.

실록에 의하면 여종을 겁탈하는 것을 반쯤 취미 생활로 여겼다고 하는데, 자신이 관계한 여종이 예전에 다른 관리와 사귀었다는 이유로 같이 배를 타고 가서 그 관리를 일부러 바래다 준 다음에 그대로 그 배에 여종을 매달아 강에 빠뜨리고 강을 왔다갔다하는 잔인한 행동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단순히 궁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질투가 나서 휘하 별감의 아들을 곤장을 때려 죽인 적이 있다. 매사가 이런 식이라 한 관리는 박엽이 자신에게 곤장을 치려 한다는 소문만 듣고 겁에 질려 목을 매 죽었다.

영조 때는 이인좌의 난에 참여한 이유익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 지인이 자신과 이유익의 관계를 부정하면서 '이유익이 박엽을 태산 같은 인물이라고 칭송하는 걸 보고 사람 수준을 알 만해서 그 뒤로 이유익을 승냥이나 이리처럼 여기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고 변명한 일화가 실려 있다. # 박엽에 대해 고평가하는 인물들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사회에서 상식적인 의견으로 치부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박엽의 능력이 나름 뛰어나긴 했지만, 사관들은 박엽이 평생 극악한 범죄들을 숱하게 저지르면서 살아남은 이유를 이 연줄에서 찾았다. [2] 광해군-인조 시기의 명 관료 이창정으로, 딱히 당파 때문에 악평을 한 것도 아니다. 실록에 의하면 오히려 이이첨과 친목이 있는 친 정권 인사였기 때문에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 친위 무장인 박엽을 비난할 이유가 딱히 없는데도 연줄을 끼고 오만을 부리는 박엽이 미워서 사실대로 보고했으나 왕이 박엽의 해명만을 믿고 다시 감싸줬다고 한다. [3] 중종반정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임사홍 신수근이 반정세력에게 의해 자객을 보내서 결국에는 살해되었는게 이것도 역시 몇 안되는 사례였고, 대북과 소북을 비롯해서 북인 실력자를 처벌한 인조반정과 다르게 중종반정은 신하들을 정치 견제 문제로 처벌하지 않았다. [4] 애초에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조사하지 않은 책이다. 박엽이 잔혹하기는 해도 청렴한 인물이었고 오직 정치적 목적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박엽은 대량살육 행각만큼이나 엄청난 비리와 부정축재로 유명한 인물이며, 비리 행각은 박엽이 일개 현감 시절이던 선조 시기부터 실록에 등장한다. 그것도 수정실록이 아닌, 박엽이 왕의 인척으로 권력을 누리던 광해군 시기 쓰여진 선조실록이 출처다. # 정치적 목적 때문에 비호를 받은 건 오히려 박엽 쪽인데, 숱한 만행에도 부당하게 번번이 용서받았던 것에는 광해군과 인척 관계라는 점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5] 염흥방 같은 극악한 간신배를 섬기는 음사도 있었을 정도로, 단순히 끔찍하게 비명에 죽었다는 이유로 생전의 행적에 무관하게 어떤 사람을 섬기거나 동정시하는 정 많은 민간신앙이나 야사는 여러 곳에 실존한다. 그것들을 함부로 역사적 평가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6] 숙야는 박엽의 자이다. [7] 《완역 정본 택리지(보급판)》(이중환 지음, 안대회 이승용 외 옮김, 휴머니스트) , 제50면 [8] 하지만 구인후의 자는 '중재'이다. 구인후가 파견된 것은 맞지만... [9] 청성잡기에서는 자가 '일만'인 김자점이 박엽을 죽인다. 하지만 김자점의 자는 '성지'이다. 이 경우 김자점의 아명이 일만이라는 판본도 있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은 이 얘기 자체가 북위 도무제 탁발규와 그를 죽인 탁발소의 얘기와 비슷하다는 촌평을 내렸다. [10] 정인홍도 총애했다고(물론 극중 내용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