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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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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항민, 원민, 호민3. 재능 발견과 인재 양성4. 욕망 긍정5. 사상의 자유6. 양명학과의 관계7. 하느님에 대한 견해8. 자살에 대한 견해

[clearfix]

1. 개요

교산 허균의 사상을 다루는 문서이다.

허균의 사상이 굉장히 급진적이며 진보적이라고 전해지는데 아래 내용을 보면 기존의 사상들에 비해 과격하다고 할 수 있다.

2. 항민, 원민, 호민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ㆍ고무래ㆍ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 나라의 멸망은 진승(陳勝)ㆍ오광(吳廣) 때문이었고, 한(漢)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 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그것 때문에 인민과 나라가 멸망하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을 괴롭혀서 자기 배만 채우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편승할 수 있어서였다.
ㅡ 《성소부부고》 제11권 호민론 #
허균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글은 그의 <호민론>이라는 이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고 주장한 한자문화권의 민본주의와 일맥상통한 글이다.

여기서 그는 백성의 종류를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고 항민은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지만 원민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호민은 한술 더 떠서 반란을 기획한다고 썼다. 허균은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폭정을 일삼는데도 호민의 수가 적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높은 사람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사실 <호민론> 자체는 춘추전국시대 맹자가 주장한 역성혁명론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맹자의 역성혁명론은 천명을 받은 자가 하늘을 대리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천명을 잃고 새롭게 천명을 받은 자가 나타난다는 수준이었다면 허균의 <호민론>은 그 골조는 같으나 그 어떤 평범한 백성이라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맹자의 역성혁명론보다 서술의 정도가 다소 과격하다고도 볼 수 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단순히 관직에 있는 사람을 까는 정도가 아니라 고려의 조세 제도와 조선의 조세 제도를 비교하며 현재의 조정이 고려보다도 못하다며 직접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3. 재능 발견과 인재 양성

허균은 노비를 이렇게 정의했다.
사람이 방회(方回 요(堯) 시대의 선인)처럼 신선이 못 된다면 진정 남에게 부려지는 종(奴)이 될 뿐인데, 나는 사마장경(司馬長卿 장경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의 자신만만한 자세를 배우고 싶네.
ㅡ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文部) 18 ○ 척독 하(尺牘下) 임약초(任約初)에게 보냄 #
요나라 방회 전한 사마성여처럼 자신만만한 신선과도 같은 인재가 되지 못하면 노비와 같은 “남에게 부려지는 종”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그런 때문에 옛날의 선철(先哲)들은 명확히 그런 줄을 알아서, 더러는 초야(草野)에서도 인재를 구했으며, 더러는 병사(兵士)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더러는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도둑 무리에서 고르며, 더러는 창고지기를 등용했었다. 그렇게 하여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임무를 맡기기에 적당하였고, 임용당한 사람들도 각자가 지닌 재능을 펼쳤었다... 옛날의 어진 인재는 대부분 미천한 데서 나왔다...
ㅡ 《성소부부고》 제11권 유재론 #
유재론에 의하면 미천한 집안의 태생도 인재가 되어서 재능을 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미천한 집안의 태생은 노비, 서출, 기생 등 미천한 신분의 인물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허균은 출신이 고귀하든 미천하든 재능을 가지면 반드시 큰 일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재 양성을 위해서 강릉의 경포호수 옆 부친의 가옥 별장에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이란 조선 최초의 사설 도서관을 세우고 중국에서 구입한 1만권의 책들을 보관했으며 학문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빌려 읽고 싶으면 읽도록 했다.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것으로써 육경(六經)ㆍ사자(四子)ㆍ《성리대전(性理大全)》ㆍ《좌전(左傳)》ㆍ《국어(國語)》ㆍ《사기(史記)》ㆍ《문선(文選)》,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脩)의 문집, 사륙(四六)ㆍ《통감(通鑑)》등의 책을 연시(燕市)에서 구해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를 노새에 실어 그 고을 향교로 보냈다. 향교의 선비들은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사양하므로 나는 호상(湖上)의 별장에 나아가 누각 하나를 비우고 수장하고서,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만약 빌려 읽고자 하면 나아가 읽게 하고 도로 수장하여, 이공택(李公擇)의 산방고사(山房故事)와 같이 하였으니, 이로써 유후(柳侯)의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뜻을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의관과 문필을 갖춘 선비로 하여금 줄지어 늘어섬이 옛날의 흥성하던 시절과 같이 된다면 나도 그 공을 함께 지닐 터이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ㅡ 《성소부부고》 제6권 / 문부(文部) 3 ○ 기(記) 호서(湖墅) 장서각기(藏書閣記) #

4. 욕망 긍정

1694년 간행된 성대중의 수필집인 <청성잡기>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이런저런 궤변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허균의 '욕망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고 도덕은 사람이 나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옳다'라는 발언을 같은 것으로 보아 비난했다.

이후 1741년 간행된 이병성의 시문집 <순암집>에서 허균의 욕망의 긍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으나 행실이 전혀 없어서 거상(居喪) 중에 고기를 먹고 아이를 낳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겼었다. 그래서 스스로 사류(士流)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불교에 귀의하여 밤낮으로 부처에 예배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옥을 면하기를 기구하였다. 그러면서 부르짖기를,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리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하였다.
ㅡ 《순암집》 순암선생문집 제17권 / 잡저(雜著) 천학문답(天學問答) #
이런 말이나 하니 역적이 된 것도 이상할게 없다는 결론. 굳이 역모 사건이 아니더라도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비판받을만한 구석이 꽤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 사상의 자유

허균은 유교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믿는 사람들과 교류했다.

동복 형 허봉의 친구 사명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나서 승려의 옷을 입고 불경을 외우고 부처에게 절을 하며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명나라 사신에게 불교 용어를 가지고 부처를 좋아하는 일을 얘기해서 사헌부에게 탄핵받은 적이 있다. #

허균이 지은 소설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에서 나이 80에 도교를 믿고 득도했다고 알려진 남궁두(南宮斗)라는 인물과 교류하면서 "도(道)에 통달하면 신선이고 도에 몽매하면 범인이다."라고 말하면서 도교를 믿으면 도를 깨우칠 수 있다고 말했다. #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에 의하면 허균이 명나라에서 천주교 12단(端)이라는 책을 들여옴으로써 천주교 전파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한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구라파(仇羅婆; 유럽)란 나라에 기리단(伎利但; 크리스트 교)이란 도(道)가 있는데, 그 나라 말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12장(章)의 게(偈 찬송가 )가 있는데, 허균(許筠)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적에 그 게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자동적으로 허균의 잔당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니, 그들이 사설(邪說)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ㅡ 《연암집》 제2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순찰사에게 답함 #
다만 허균 본인은 1610년 천주교 12단을 가져왔지만 허균의 작품인 <성소부부고>와 <한정록> 등에서는 천주교보다는 불교와 도교 신앙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는데 하느님에 대한 견해의 <을병조천록> 해석 참조.

1615년과 1616년 사이 허균이 명나라에 갔을 때 쓴 기록인 <을병조천록>에 의하면 탁오 이지 분서를 읽고 이지의 "사상의 자유"를 본받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맑은 아침 대머리 늙은이[1]가 책 태워도
그 도는 아직도 다 타지 않고 남아 있네.
불교와 이 유학은 깨달음이 한가진데,
인간의 세상은 멋대로 떠들어서 시끄럽네.

문선왕 나를 맞아 귀한 손 대접하니,
기린 봉황 높이 나와 친히 보니 기분 좋네.
나의 인물론을 늦도록 읽어주니,
이제야 선현의 책 그 사람을 알겠네.

노자는 나기 전에 아는 것이 많았고,
평생에 참선에 듦이 큰 기쁨이네.
글은 이뤘어도 아직 진[2] 분서 없어
대간의 탄핵 세 번 마음은 상쾌하네.
ㅡ 《을병조천록》 이씨의 분서를 읽음[3]
위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허균은 "이지의 저서들은 불탔지만 이지의 사상은 불멸하다"라고 주장했으며 불교든 유교든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

6. 양명학과의 관계

명나라의 사상가 왕수인이 창시한 양명학을 연구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제자였던 이식과 후대의 인물 김창흡은 "허균의 사상인 욕망의 긍정이 양명학자 안산농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출처1]

허균은 저서 <학산초담>에서 " 왕수인은 문장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을 가지고 표현했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했다."라고 왕수인을 평한 적이 있다. # 하지만 허균 본인이 양명학파라고 말한 적은 없다. [출처2]

7. 하느님에 대한 견해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최강현 교수가 번역한 <을병조천록>에 의하면 허균은 하느님을 믿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허균이 1615년과 1616년 사이 명나라에서 쓴 시 "우연히 읆음"이다.
수놓은 옷을 입고 20대에 장한 놀이
거듭 오니 모르는 새 머리털 희어졌네.
고향은 멀리 격해 삼천리 밖에 있어
지나간 자취 돌아 19년을 생각하네.
나는 한안 성총 영욕 갈림길에 있기에
기쁨과 근심에서 한결같이 쉬고 싶네.
집에 돌아가도 나그넨 건 나의 운명.
하느님(天公) 오직 믿고 나의 거취 맡기려네.
ㅡ 《을병조천록》 우연히 읆음[6]
최강현 교수는 위 시를 토대로 해서 국역 을병조천록 155쪽과 156쪽에서 아래와 같이 허균은 천주교 신자였다고 해석했다.
"이 작품의... 7-8구는 귀국하여도 벼슬살이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그네일 수 밖에 없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 하면서 하느님(天公)을 믿고 벼슬살이의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자기 의지를 밝힌 것이다. 특히 이 끝구의 '天公(천공 = 하느님)'은 빌어쓰기로 풀이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쓰는 "天主(천주 = 하느님)"과 똑같은 말이다.

필자는 이 것을 천주교와 같은 의미로 천주교 이전에 교산에 의하여 일컬어진 말 "천공교"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교산이 집단적 기도처(祈禱處)인 성당(聖堂)이나, 예배소(禮拜所)들이 없었던 당시이므로 이미 광해군 2(1610)년에 교산 자신이 북경에서 가지고 들어온 기독교(基督敎)의 주기도문(主祈禱文) 12단을 암송하는 천공교 신앙 생활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여 본다."
ㅡ 최강현 <국역 을병조천록> 국립중앙도서관 pp. 155 ~ 156 (2005).
허균의 다른 작품들 <성소부부고>[7]와 <한정록>[8]에서도 "하느님"이 여러번 언급된다. 다만 작품마다 하느님의 한자가 다르다. 성소부부고 제1권 "포은(圃隱)의 구택(舊宅)을 지나면서 노래하다"에서 "어진이엔 복 주는 법 하느님(天何)이 취했겠다"라고 말했고 #, 성소부부고 제2권 "궁사(宮詞)"에서 "명년에 하느님이 복 내릴까 점을 치며 / 暗卜明年天降嘏"라고 말했고 #, 한정록 제11권 "명훈(名訓)"에서 명나라의 책 <미공십부집>와 <소창청기>를 인용해서 "좋은 복(福)은 하느님이 아끼고 잘 주지 않는 것인데 경거망동하여 분주하면 복(福)을 감쇄하며, 좋은 명성은 상제가 기피하고 잘 주지 않는 것인데 비방을 얻으면 이름을 더 얻기 어렵게 된다. 《미공십부집》"와 "부처에게 기도하여 만약 죄를 참회할 수만 있다면 형관(刑官)의 권한은 없어지고, 신선(神仙)을 찾아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하느님[上帝]이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달인(達人)은 나에게 있는 것 곧 본심(本心)을 다한다. 지성(至誠)이 자연(自然 교사작위(巧邪作爲)의 인위가 없이 천지 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르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다. 《소창청기》"라고 말했다. 허균이 말하는 "하느님"은 "복(福)을 내리는 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복(福)의 신"이 최강현 교수가 말한 것처럼 천주교의 하느님을 가르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도교의 옥황상제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상제(上帝)는 "중국에 가톨릭교가 처음 도래하였을 때 가톨릭교의 하느님을 이르던 말"을 의미하므로 천주교의 "하느님"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

즉 <을병조천록>을 토대로 해도 허균의 다른 작품들과 교차검증을 해도 확실하지 않으므로 허균이 천주교를 믿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정된 것이 아닌 추측의 영역이다. 이는 최강현 교수가 허균의 천주교 신자 설을 확정된 사실이다 혹은 확신한다고 말하지 않고 " 의심하여 본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다.

8. 자살에 대한 견해

무릇 곡하는 데도 역시 도(道)가 있소. 대체로 사람의 칠정(七情) 중에서 쉽게 움직여 감발(感發)하는 것은 슬픔만한 것이 없소.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는 것인데, 슬픔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단서가 여러 가지이지요. 그러므로 시사(時事)를 행할 수 없는 것에 상심하여 통곡한 이는 가태부(賈太傅 가의(賈誼))요, 흰 실이 그 바탕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곡을 한 이는 묵적(墨翟)이요, 갈림길이 동서로 나뉜 것을 싫어하여 운 것은 양주(楊朱)요, 길이 막혀서 운 것은 완보병(阮步兵 완적(阮籍))이었으며, 운명이 불우함을 슬퍼하여 자기를 세상 밖으로 내쳐 정을 곡(哭)에 부친 자는 당구(唐衢)입니다. 이들은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서 운 것이지, 이별에 상심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으며 하찮은 일로 해서 아녀자의 통곡을 흉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그들의 시대에 비해 더욱 말세요,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야박해져서 친구들 사이에 배치되는 것도 갈림길이 나뉜 것보다 더하며,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비단 길이 막힌 것뿐만 아니어서, 모두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해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만약 저 몇 분의 군자로 하여금 이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게 될는지 모르겠소. 아마도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팽함(彭咸)이나 굴대부(屈大夫 굴원(屈原))처럼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투신 자살하고자 할 것이오. 친(親)이 서실 편액을 곡이라 한 것도 역시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은 그 통곡을 비웃지 않는 것이 옳겠소.
ㅡ 《성소부부고》 제7권 통곡헌기 #

조카 허친[9]이 통곡헌(慟哭軒)이라는 글을 지으면서 "나는 시속의 기호를 위배한 자다. 시류가 기쁨을 즐기므로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세속사람들이 흔쾌해 하므로 나는 근심해 마지않는 것이다. 심지어 부귀와 영화에 있어서도 세상이 기뻐하는 바이지만, 나는 몸을 더럽히는 것인 양 여겨 내버리고, 오직 빈천하고 검약한 것을 본받아 이에 처하며, 반드시 일마다 어긋나고자 한다. 그래서 세상이 항상 가장 싫어하는 바를 택하고 보면 통곡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으로써 내 집의 편액을 삼는 것이다.”라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비웃었다. 이 때 허균이 조카 허친을 변호하면서 한 말이다.

여기에서 허균이 "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1] 탁오 이지를 의미한다. [2] 탁오 이지를 의미한다. [3] 국역 을병조천록 43쪽, 44쪽 참조, 2005년 12월 31일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강현이 번역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출처1] 이종호 지음,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249쪽 (2004) [출처2] 이종호 지음,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247쪽 (2004) [6] 국역 을병조천록 83쪽 참조, 2005년 12월 31일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강현이 번역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7] 1611년 작품 [8] 1618년 작품 [9]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의 차남이다. 허균의 역모 사건 당시 연루되어서 연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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