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21:12:31

민치구

閔致久
1795년( 정조 19) ~ 1875년( 고종 12) 1월 21일[1]

1. 개요2. 가계3. 생애4. 사후

[clearfix]

1. 개요

조선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2], 는 경칙(敬則),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여흥부대부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장인, 고종의 외할아버지이다.[3]

2. 가계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3남 민진영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민단현(閔端顯)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10촌 동생 뻘로, 명성황후는 민치구의 11촌 조카 뻘이다.

그런데 사실 실제 민진영의 후손은 아니다. 민진영과 민치구의 가계는 인현왕후의 5대조인 민사용(閔思容)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4] 그러나 민치구의 아버지 민단현이 민진영의 손자인 15촌 숙부 민백술의 양자로 가서 민진영의 법적 후손이 된 것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이고 장인은 덕흥대원군의 11대손 이옥이다. 이옥은 도정궁[5] 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의 차남이자 前 달선군 이영[6] 양자이며 도정궁 13대 종손 경원군 이하전의 친할아버지이다. 따라서 민치구의 부인은 이하전의 고모이다.[7]

이씨 부인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적으면 큰딸 여흥부대부인, 장남 민태호[8], 차남 민승호, 3남 민겸호, 둘째딸이다.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간 사람이고, 민겸호는 민영환의 친아버지이자 그 유명한 임오군란을 유발시킨 부패한 관리이다.

3남 1녀 중 2남이다. 동생 민치인의 증손자가 대한민국 초대 교통부 장관이자 주 LA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초대 총영사였던 민희식이다.

3. 생애

1795년( 정조 19년)에 태어났고 1812년( 순조 12년)에 혼인했다.

관직 생활은 음서로 시작했다. 효명세자의 묘 연경묘의 수위관과 #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는 사절단 수행원을 지냈고 금부도사, 사과 직을 맡았다.

정선군수, 연안부사, 인천부사, 청주목사를 지내는 등 지방직도 많이 맡았다. 1863년(철종 14년)에는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받았고 그해 말에 외손자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왕의 외할아버지여서 그런지 이전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공조 참의를 거쳐 1864년(고종 1년)에는 동지돈령부사,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잠시 한성부좌윤[9]을 지냈다가 그해 말에 공조판서로 승격했다.사위와 손자 잘 둔 덕 사실 이도 고종이 효명세자(익종)의 양자로 입적해서, 명목상으로는 외조부-외손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외조부인 경우보다는 덜 대접받은 것이다.

1865년(고종 2년) 초에는 광주부유수로 임명받았고 재직 중에 숭정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1866년(고종 3년) 고종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릴 때는 가례부사가 되어 가례 업무를 맡았다. 또한 그해에 익종(고종의 양아버지)의 옥책문 만드는 일을 금보 전문 서사관으로서 담당했고, 숭록대부와 보국숭록대부로 계속 승진했다. 1868년(고종 5년)에는 판의금부사 및 지중추부사와 판돈령 부사 직을 맡았고 외손자 고종에게서 공이 많은 노인 신하들에게 주는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9년(고종 6년)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고 1872년(고종 9년)에는 혼인 60년을 맞아 왕실에게서 1000냥과 쌀 20석, 2등악을 하사받았다. # 이듬해 사별했다. #

1875년(고종 12년) 1월 5일[10] 원인모를 폭탄 테러로 민치록의 양자로 갔던 아들 민승호와 손자가 폭사했다. 그 충격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외손자 고종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 결국 폭사 사건 2주 뒤인 1월 21일[11]에 사망했다. # 향년 80세.

4. 사후

사망 직후 바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로 추증받았고 시호 '효헌(孝獻)'을 받았다. #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에 있다.

[1] 음력 갑술년 12월 14일. 공교롭게도 양력 기일 1월 21일은 외손자 고종이 즉위한 날이자 승하한 날이다. [2] 삼방파 26세 치(致) 항렬. [3] 단, 고종은 익종(효명세자)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법적인 외할아버지는 조만영이다. [4] 정확히는 민사용의 장남 민여건의 후손이 인현왕후와 민진영, 5남 민여임의 후손이 민치구이다. 사실 여기서도 더 세부적으로 따지면 장남 민여건의 아들 민기 역시 양자로 원래는 민사용의 차남인 민여준의 아들이다. [5] 덕흥대원군의 종가. [6] 숙종의 막내 아들 연령군의 양자인 낙천군의 양자였으나 파양당했다. 그래서 '前'을 붙인 것. [7] 그런데 이하전은 전주 이씨 기준에서 고종보다 한 항렬 아래이다. 그러니까 이씨 부인은 외손자랑 같은 항렬(...)이다. [8] 순명효황후 민영익의 생부 민태호와는 다른 사람이다. [9] 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 급. [10] 음력 갑술년(고종 11년) 11월 28일. [11] 음력 갑술년(고종 11년) 1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