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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23대 군주 მირიან | 미리안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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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미리안 3세 |
조지아어 | მირიან | |
라틴어 | Mirian III | |
생몰 년도 | 277년 ~ 361년 | |
재위 기간 | 284년 ~ 3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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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23대 군주. 기독교를 이베리아의 국교로 확정한 인물이다.2. 생애
284년 아스파쿠레스 1세가 카루스의 동방 원정에 협조했다가 사산 왕조군의 역공을 받아 패배한 뒤 오세티아로 달아나 새 군대를 모집하다가 돌연 사망했다. 당시 아스파쿠레스 1세에겐 아들이 없었고, 어린 딸 아베슈라만 있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이베리아 귀족들은 한 자리에 모여 차기 왕으로 누굴 세울 지 논의한 끝에 "호스로의 아들 미리안"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고 한다.키릴 투마노프는 미리안이 파르티아부터 사산 왕조까지 이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7대 가문 중 하나인 미흐란 가문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시 이베리아는 사산 왕조의 치하에 있었으며, 미리안은 사산 왕조를 섬기는 왕으로서 옹립되었다고 덧붙였다. 반면 조르지 멜리키슈빌리 교수는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를 작성한 중세 역사가들이 미리안을 이국적인 외국 왕족 출신으로 묘사함으로써 권위를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로는 이베리아 귀족 출신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한편 역시 중세 조지아의 역사 기록인 카르틀리의 개종에서는 미리안이 레위의 아들이라고 서술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즉위했을 때 7살이었으며, 선왕의 어린 딸인 아베슈라를 아내로 들였다고 한다. 그가 미흐란 가문의 일원인지, 이베리아 지역 귀족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사산 왕조의 비호를 받은 건 분명하다. 그는 사산 왕조의 협조 아래 콜키스와 알바니아를 통치했으며, 시리아에서 사산 왕조군과 함께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다 로마 부황제 갈레리우스의 대반격으로 사산 왕조군이 참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지자, 사산 왕조의 샤한샤 나르세스 1세는 로마 정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니시비스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의 패권을 로마에 헌납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되었고, 곧바로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첫번째 아내 아베슈라가 292년경 사망한 뒤 "폰토스의 올리고토스의 딸" 나나와 재혼했다고 한다. 키릴 투마노프는 나나의 아버지 올리고토스는 306년경 테오도시아에 세워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정하는 비문에서 등장하는 로마 총독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소고스 올림피아누스와 관련있을 거라고 추정했다. 반면 크리스티앙 세타피니는 그녀가 폰토스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폰토스를 영역으로 삼았던 보스포로스 왕국의 군주 토토르시스가 그녀의 아버지였을 거라 주장했다.
카르틀리의 개종에 따르면, 그는 확고한 이교도 신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 므츠헤타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어둠이 땅에 갑작스럽게 내려오더니 눈이 완전히 멀어버렸다. 역시 이교도였던 나나가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남편을 치료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이때 카파도키아의 수녀 니노가 맹인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즉각 찾아가서 남편을 치료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했다. 니노가 자기 손을 미리안의 감긴 눈에 덮고 예수에게 기도하자, 얼마 안가서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어둠이 사라졌다. 나나는 곧바로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 역시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개종했다고 한다. 그 후 337년, 그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이베리아의 국교로 선포했다. 역사학계는 그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을 염두에 두고 로마 제국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확정한 뒤 이교 사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일부는 교회에 양도하고 나머지는 국고에 충당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이교를 믿었다. 특히 산악지대에 사는 이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고수하며 기독교를 배격했고, 이로 인한 민란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백성들이 기독교를 수용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로마 역사가 루피누스에 따르면, 이베리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사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즉시 사제와 유물을 이베리아로 보냈고, 그들은 이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므츠헤타에 대성당을 지었고 죽기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고 한다.
361년 사망 후 아내 나나와 함께 므츠헤타의 삼타브로 수도원에 묻혔다. 사후 공동 왕이었지만 그보다 일찍 죽은 레브 2세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사우로마케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