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전쟁 | ||
장소 | ||
일본 전역 | ||
기간 | ||
1868년 | ||
교전세력 | 에도 막부 | 삿초 동맹 |
지휘관 | 도쿠가와 요시노부 |
시마즈 타다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
결과 | ||
막부군의 승리, 존왕파 세력의 궤멸 | ||
영향 | ||
일본의 에도 막부로 일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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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작중에서는 세 번째로 등장하는 전쟁이며 작중 최초로 고종이 친정하지 않은 전쟁이자, 최초의 외국에서의 전쟁, 그리고 최초의 내전이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2. 배경
이 당시, 일본은 잠시동안 치열했던 에도 막부와 삿초 동맹의 소강기를 끝내고 다시 본격적인 내전 준비로 한창이었다. 제1차 조청전쟁과 제2차 조청전쟁의 영향으로 서양 열강들의 함대가 남중국해와 황해로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일본이 열강들의 침공에 노출될 수 있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두 진영은 잠깐이나마 천황을 중심으로 뭉쳤었지만 열강들이 물러서면서 더는 뭉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막부나 삿초나 똑같이 군비 경쟁을 하면서도 딱 한 가지, 장기전으로 흘러가면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내전을 준비하였다. 이미 대만이 열강들에게 넘어가고, 류큐도 열강의 세력권에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니 계속 내전을 지속했다가는 일본 또한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 같다는 우려에서였다.조선 반도는 우리 일본 열도를 향하여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이다. 만에 하나 조선이 강성해진다면 필시 우리 일본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고,
옛 몽골 시절의 침공을 되풀이될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일본은 조선에서의 침공에 대비하여 중화제국과 손잡고 조선을 선제타격해야만 한다! 조선을 꺾지 못한다면 우리 일본에 미래는 없다!
게다가 조선이 두 차례나 청을 꺾어서 만주를 차지하고 날로 강성해져가는 상황에서 반대로 일본은 아시아에서 설 자리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필두로 한 신 정부군 측은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언젠가 조선이 일본을 침공할 수도 있기에 최대한 빨리 일본의 내전을 마무리짓고, 분열을 종식시킨 뒤, 중화제국과 손잡고 조선을 선제 타격해야만 한다는 조선위협론과 선제 타격론을 제시한다. 사쓰마 번은 규슈에 위치해있고, 조슈 번은 주고쿠 지방에 있다. 이 두 지역은 모두 조선과 가까운 곳이기에 조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일. 외국인이다 싶으면 무차별적으로 칼질하고, 테러나 일삼는 양이지사(유신지사)들도 조선과의 국력 차이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이라고 내놓은 것이 고작 중화제국으로 하여금 청을 타격하게 하고, 일본은 조선을 타격한다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저 말은 당장 조선이랑 싸우자라기 보다는 조선이 위험하니깐 일단 대항이나 해보자는 말에 더 가깝다.
조선을 선제 타격하기에는 아무래도 우리 일본의 힘이 부족하다. 설령 중화제국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양이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조선을 압도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양이들과 손을 잡아 해군을 육성하여 조선이 함부로 바다에 나올 수 없도록 가두는 것이 옳다. 우리 일본은 섬나라다. 굳이 무리하게 대륙을 도모하기보다는
영길리의 선례를 따라 대륙에서 일본에 신경을 쓸 수 없도록 힘의 균형을 맞추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에 반해 신 정부군 내에서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끄는 일부 세력은 조선을 치기보다는 해군 육성에 전념하여 조선이 함부로 바다에 나올 수 없도록 가두는 해상봉쇄론을 내놓았다. 위의 선제 타격론보다 상당히 현실적인 의견이었으나 이들은 워낙 소수였고, 당장 막부와의 전쟁이 코앞에 닥쳐온 이 시점에서는 나약한 소리로 치부되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조선은 이미 우리 일본과 동맹 의사를 타진했다. 지난 200여 년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왔던 조선과 인제 와서 또 다시 전쟁을 결심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조선에서 먼저 일본을 침공하려 한다면 마땅히 그에 맞서 우리 일본도 준비를 해야겠지만, 우리 일본에서 먼저 조선을 적대하는 건 지금 정세에서는 몰지각한 행위이다. 조선의 국운은 나날이 욱일승천하고 있다. 우리 일본은 마땅히 떠오르는 태양인 조선과 손을 잡고 대륙에서의 근심을 덜고서 해군을 육성하여 태평양의 무역 강국으로 우뚝 서야 한다.
반면, 막부는 낙관적인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 이후로도 아직까지 막부측 인사들이 정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고, 일본이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막부에게 힘이 쏠리게 된다. 게다가 제1차 조청전쟁 직전에 조선이 박규수를 통신사로 삼아 일본으로 보낸 덕분에 에도 막부야말로 정통성이 있는 정부라 인정받아 힘을 되찾은 실정이었다. 그외에도 일본은 날로 확대되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경제가 활성화되니[1] 굳이 극단적인 의견을 제시하여 상황을 망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삿초 동맹을 위시한 신 정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은 변함이 없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반드시 그들을 멸망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가 친 막부파 다이묘들을 모조리 부른 시기에도 삿초 동맹은 영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시도하였는데 괜히 시간을 끌었다간 도쿠가와 가문의 패망은 필연적인 일. 그리하여 요시노부는 결단을 내려서 조러전쟁 동안 프랑스를 끌어들인 뒤, 한시적으로 해역을 봉쇄하여 신 정부군이 영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이들을 모조리 소탕하려는 것이었다. 질적인 면은 몰라도 병력 면에서는 막부 측이 우세하니 요시노부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요시노부는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에게 명을 내려 늘 그렇듯이 역도 토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신센구미로 하여금 교토를 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삿초 동맹은 이와쿠라 도모미를 내세워 천황의 칙서를 위조한 뒤, 조적 도쿠가와를 토벌하라는 토벌령을 내린다.
3. 진행 과정
조선이 음력 설을 기념하고 있는 때에 낭인을 가장한 삿초 동맹의 사병들이 순찰 중인 신센구미 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두 진영은 교토에서 처절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게다가 교토의 귀족들도 자기 가문의 식객과 하인들까지 무장을 시켜 이 전쟁에 가세하여 사태는 더욱 난장판이 되가고 있었다. 근대식 총기류들 외에도 조총, 활, 칼, 창, 죽창 등의 구시대적 무기까지 난무하는 상황에서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의 입구에만 수백여 구의 시체가 쌓여버렸다. 그리고 그런 혼란 속에서 먼저 천황의 신병을 확보한 것은 미마와리구미를 황궁에 침투시키는데 성공한 막부군이었다. 마츠다리아 카타모리는 천황을 만나 어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조적으로 지목하라고 강요하였지만 존황양이파들에게 마음이 가있는 천황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막부 측은 이와쿠라 도모미가 했던 그대로 천황의 칙서를 거짓으로 위조하여 삿초 동맹을 향해 토벌령을 반포해버렸다.[2]그리고 끝내 막부의 방어를 뚫지 못한 삿초 동맹은 각자 자기들 영지로 도망쳤고, 막부 측의 항복 권고마저 거부한 채 결사항전으로 나선다. 한편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종은 심드렁하게 방관자적인 자세로 나왔다. 개입할 명분도 없고, 기껏해야 전쟁 물자를 팔아먹는 것 외엔 개입해서 얻는 이득도 없기에 그런 것. 게다가 러시아와의 전쟁이 더 급선무니 일본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얼마 후, 조러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로 바꾼 뒤, 정식으로 황제국으로 선언하며 이제 대만왕이 된 흥친왕 이희를 흥선군과 함께 보낸 상황에서도 일본은 싸움박질로 한창이었다. 이미 막부 측이 승리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도 삿초 동맹은 마지막까지 항전으로 일관한 것. 사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이유는 삿초 동맹 측에서는 좌막파 번들의 병사들 중, 근대화가 덜 된 무리들만 노려서 공격하게 된 탓에 시간이 끌린 것이다. 이에 보다못한 요시노부가 근대 무기로 무장한 막부파의 정예 병력들[3]을 꺼내들면서 철저하게 조슈군을 토벌하는 동안, 좌막파 번의 사병들이 민심 안정을 하도록 역할 분담을 하여 토막파의 퇴로를 원천봉쇄하였다.
그렇게 조러전쟁이 마무리 될 무렵, 좌막파는 조슈군을 궤멸하여 폐번하는데 성공하고, 요시노부는 도사 번과 사쓰마 번에게 항복을 제의했다. 그 조건은 번주 외의 가로들의 할복과 폐번 조치를 수용한다면 그 외 나머지 식솔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 다행히 도사 번은 이를 받아들이고 항복했지만 반대로 사쓰마 번은 조러전쟁이 끝나게 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영국의 지원을 받아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조슈 번은 위치상으로도 교토와 가깝고, 조러전쟁 도중에 막부의 군대와 맞서 싸운 탓에 어떠한 외부적 지원도 못받고 그대로 털려서 멸망당했으나 사쓰마 번은 운좋게도 극서부 지역이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결국 요시노부가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장기전이 도래한 것. 하는 수 없이 막부 측은 프랑스와 대한제국에게 많은 전쟁 물자들을 구매하였고, 곧 규슈에 상륙하여 사쓰마 번 토벌에 나선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 도쿠가와 사병과 근대화가 잘 된 번의 사병들과 그렇지 않은 번의 사병들의 차이는 극심한 탓에 사쓰마 번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온 요시노부가 각 번의 번주들에게 "얼마나 더 어쩔 수 없을래? 얼마나 더 많은 병사들을 잃어서야 정신 차릴 거야? 내가 마음 같아선 이 형편없는 졸전에 책임을 지고 할복하라고 말하고 싶거든?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병사들 내놔."라는 말로 군권을 회수해버렸다. 그렇게 하나의 지휘권 아래 통제된 병사들은 사쓰마 번에게 압박을 가하였고, 때마침 돈이 올인난 사쓰마 번은 전쟁을 지속시킬 힘도 없었고, 전쟁 때문에 지쳐가는 백성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결국 시마즈 가문과 사쓰마 번은 막부에게 항복을 제안했지만 항복하라고 할 때 안 하다가 자기들이 불리해지니 항복을 하겠다는 저들의 졸렬함에 치를 떤 요시노부는 절대 사쓰마 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사쓰마 번은 조슈 번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토벌되어 멸망하였고, 막부군은 상처뿐인 승리만 얻게 되었다.
4. 전후 처리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시마즈 가문과 가로 이하 300여 명의 병력들이 류큐로 쳐들어가서는 슈리성에 있는 쇼타이왕을 유폐시키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허나 쇼타이는 미국 상선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탈출하여 대한제국으로 가서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고종은 흔쾌히 쇼타이를 도와주게 된다. 그렇게 상선으로 가장한 대한제국 해군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항만에 정박한 뒤, 오키나와 공화국을 자칭하는 사쓰마 번의 병력들을 일망타진했다. 자결을 시도한 시마즈 타다요시를 비롯하여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사쓰마 번의 주요 인물들이 포로로 잡혔고, 고종의 명에 따라 이들의 처분은 류큐 국왕 쇼타이에게 넘겨진다. 그리고 쇼타이는 이들을 해적으로서 처분을 내려 모조리 처형한다.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요시노부는 일본 내부의 혼란을 평정하는데 성공했으나 오히려 한탄했다. 우려했던대로 전쟁이 장기화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해외로 눈독을 들이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대한제국이 영국과의 거래로 러시아의 해군을 막기 위한 장기말 신세가 됨에 따라 완전히 대한제국에 종속되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참초제근을 위해 큰 피해를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잔당들이 잇키를 일으키고 있어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5. 관련 문서
[1]
물론 그 돈들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곤 하지만 어쨌든 막대한 돈이 일본 내에서 순환하게 된 건 사실이고 이는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2]
사실 천황의 권위가 막강했다면 막부 측이나 신 정부 측이나 황명사칭죄로 백번 죽어도 할 말없는 짓이다. 황명사칭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반역에 준하는 죄기 때문.
[3]
실제 역사에서
막부육군은
1866년 게이오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영국에게서
샤스포 소총과
엔필드를 비롯한 신형
라이플들을 몽땅 사들이는 한편, 프랑스군 장교인 샤를 샤노와를 군사 고문으로 초빙하여 병사들의 훈련을 맡겼는데, 이렇게 프랑스군에게서 훈련받고 외국산 무기를 사용했던 부대를 전습대(伝習隊 / 덴슈타이)라고 불렀다. 덴노파 입장에서는 상대하기조차 매우 꺼렸던
정예 부대였다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