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4:15:55

테오도르 몸젠

몸젠에서 넘어옴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rowcolor=#cd9f51> 1901 1902 1903 190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쉴리 프뤼돔 테오도르 몸젠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rowcolor=#cd9f51> 1904 1905 1906 1907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파일:폴란드 입헌왕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호세 에체가라이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조수에 카르두치 러디어드 키플링
<rowcolor=#cd9f51> 1908 1909 1910 1911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루돌프 오이켄 셀마 라겔뢰프 파울 폰 하이제 모리스 마테를링크
<rowcolor=#cd9f51> 1912 1913 1915 1916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로맹 롤랑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rowcolor=#cd9f51> 1917 1919 1920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카를 슈피텔러 크누트 함순
<rowcolor=#cd9f51> 1921 1922 1923 192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폴란드 국기(1919-1927).svg
아나톨 프랑스 하신토 베나벤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rowcolor=#cd9f51> 1925 1926 1927 1928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조지 버나드 쇼 그라치아 델레다 앙리 베르그송 시그리드 운세트
<rowcolor=#cd9f51> 1929 1930 1931 1932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토마스 만 싱클레어 루이스 에릭 악셀 카를펠트 존 골즈워디
<rowcolor=#cd9f51> 1933 1934 1936 1937
X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유진 오닐 로제 마르탱 뒤 가르
<rowcolor=#cd9f51> 1938 1939 1944 1945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핀란드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칠레 국기.svg
펄 벅 프란스 에밀 실란패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rowcolor=#cd9f51> 1946 1947 1948 1949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윌리엄 포크너
<rowcolor=#cd9f51> 1950 1951 1952 1953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영국 국기.svg
버트런드 러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프랑수아 모리아크 윈스턴 처칠
<rowcolor=#cd9f51> 1954 1955 1956 1957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어니스트 헤밍웨이 할도르 락스네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rowcolor=#cd9f51> 1958 1959 1960 1961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살바토레 콰시모토 생존 페르스 이보 안드리치
<rowcolor=#cd9f51> 1962 1963 1964 1965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존 스타인벡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장폴 사르트르(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rowcolor=#cd9f51> 1966 1967 1968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가와바타 야스나리
<rowcolor=#cd9f51> 1969 1970 1971 1972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칠레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사뮈엘 베케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블로 네루다 하인리히 뵐
<rowcolor=#cd9f51> 1973 1974 1975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패트릭 화이트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에우제니오 몬탈레
<rowcolor=#cd9f51> 1976 1977 1978 1979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스페인 국기(1977-1981).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그리스 국기.svg
솔 벨로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rowcolor=#cd9f51> 1980 1981 1982 1983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체스와프 미워시 엘리아스 카네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윌리엄 골딩
<rowcolor=#cd9f51> 1984 1985 1986 1987
파일:체코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클로드 시몽 월레 소잉카 조지프 브로드스키
<rowcolor=#cd9f51> 1988 1989 1990 1991
파일:이집트 국기.svg 파일:스페인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나기브 마푸즈 카밀로 호세 셀라 옥타비오 파스 나딘 고디머
<rowcolor=#cd9f51> 1992 1993 1994 1995
파일:세인트루시아 국기(1979–2002).svg.pn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데릭 월컷 토니 모리슨 오에 겐자부로 셰이머스 히니
<rowcolor=#cd9f51> 1996 1997 1998 1999
파일:폴란드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다리오 포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rowcolor=#cd9f51> 2000
파일:프랑스 국기.svg
가오싱젠
}}}
}}}}}}}}}
[ 21세기 ]
##
||<table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1 || 2002 || 2003 || 2004 ||

}}}}}} ||
물리학 | 화학 | 생리학·의학 | 평화 | 경제학
<colbgcolor=#000><colcolor=#fff>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파일:Theodor-Mommsen.jpg
[[노벨문학상|{{{#white 19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크리스티안 마티아스 테오도르 몸젠
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국적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17년 11월 30일
홀슈타인 공작령 가르딩
사망 1903년 11월 1일 (향년 85세)
독일국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직업 역사학자, 언론인, 정치인, 법학자, 고고학자

1. 개요2. 생애3. 업적4. 명예5.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 법학자.

덴마크계 독일인으로, 19세기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로마에 관한 연구에서는 당대 사람들 중 가장 독보적인 업적을 자랑하는 인물로 이를 바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였다. 단순히 역사뿐만이 아니라 언론, 정치, 법률, 고고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였고 각각의 영역마다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2. 생애

1817년 덴마크 영토였던 슐레스비히 지역의 가르딩에서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이 지역인 만큼 덴마크의 혈통도 꽤나 섞인 가계였지만, 본인은 평생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바탕으로 학위를 수여받은 데 이어 1837년에는 홀슈타인에 있는 킬 대학교로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1] 이 시기 킬 대학교에서 로마법을 주전공으로 연구하였는데 훗날 그의 로마사 연구에 지대한 도움이 되었다. 이후 덴마크 왕실의 장학금을 바탕으로 몸젠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옛 로마 제국의 영역들을 여행하면서 당시까지 보존된 로마의 문서들을 연구하는 기회도 얻었다.[2]

그렇지만 1848년 혁명의 와중에 몸젠은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프로이센 왕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합병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덴마크인들에게 분노를 사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3] 뭄젠은 고향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여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교수로 임용되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1857년에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초빙되었고, 1861년부터는 베를린 대학교의 로마사 전담 교수까지 겸임했다.

학문적 성취와 그에 따른 명예가 나날이 높아졌지만, 아무래도 최고점은 몸젠 본인의 저서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를 통해 19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4] 이러한 명예의 절정에서 1903년 몸젠은 향년 85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3. 업적

로마와 관련하여 평생 1500개 이상 논문 및 출간물을 발간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로마사의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특히나 그는 당대 로마인들이 남긴 문서에만 집중하던 역사학계의 관행에서 벗어나 비석, 화폐와 같은 유물들을 중시하면서 로마사 연구의 새로운 체계가 뿌리내리게 했다. 금석학은 몸젠이 거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5] 몸젠이 생전에 수집한 여러 비석들은 오늘날도 베를린 아카데미에 보관되어 활발히 연구된다.

몸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로마사》 1~3권은 그가 겨우 37세일 때 저술된 것이다(1854~1856년. 1년에 1권 꼴이다). 《로마사》 1권은 가장 긴 분량으로 이탈리아 통일과 포에니 전쟁까지, 2권은 그리스 복속까지, 3권은 카이사르의 죽음까지이다. 덕분에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고... 다만 후세에는 아쉬운 것이, 몸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부터는 더 이상 책을 펴내지 않았다. 그는 《로마사》를 3권까지 쓴 뒤 제정을 다룬 4권을 건너 뛰고 70세가 다 된 1885년에 로마 속주를 다룬 5권을 먼저 써서 마무리지었다(1904년 유작으로 개정본 공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몸젠이 카이사르를 깊이 존경했고, 자기의 영웅이 죽은 이후의 역사를 쓸 마음이 안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 여사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아들로 내심 공화정을 지지했던 몸젠이 차마 로마 제정이 수립되는 것을 서술할 엄두가 안 나서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글쎄... 어쨌든 당대에도 《로마사》를 완결지어달라는 독자들의 욕구가 빗발쳤지만 몸젠은 묵묵부답이었다. 또한 베를린 학술원의 대표로서, 동료들의 교회사 연구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설립한 라인강 방어선 연구 등을 출판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로마법 채권법에 관련한 그의 연구는 훗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으로까지 이어지는 근대적 민법 체계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6]
몸젠은 독일 진보당 소속 의원으로 프로이센 하원과 제국의회(Reichstag)에서 거의 20년에 걸쳐 의정활동을 펼쳤다. 몸젠은 자유주의자로 통일 이후 여전히 전제적인 제2제국의 정치상에는 꽤나 실망을 했다고 전한다. 특히나 비스마르크 사민당 탄압을 신나게 까시다가 코렁탕 먹을 뻔하셨다고...

동시에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합병 시도를 지지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사후에 등장하는 히틀러와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고, 소수민족(특히 유대인)의 독일 내 동화를 추구했다. 일단 본인부터가 덴마크계이니 뭐... 그런데 슬라브족은 두형만 보더라도 열등민족이라고 깐 적도 있다... 우생학이 판치던 당시 시대에 따른 한계라고 봐야 할 듯.

4. 명예

5. 여담



[1] 당시 법학의 중심지는 괴팅겐이었지만 괴팅겐에서 유학할 만한 돈이 없어서 집 가까운 킬 대학교에 갔다고 한다. [2] 법대 시절 소일거리 삼아 친구들과 시집을 하나 냈는데, 이 책이 덴마크 왕의 마음에 쏙 들어서 장학금 수혜자로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카더라... 그리고 이 시집은 나중에 몸젠이 명성을 얻은 뒤 인기 대폭발... [3] 결국 이 땅은 20년 뒤에 비스마르크가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손에 넣었다. [4] 100년이 넘는 노벨문학상 역사상 정말 몇 안 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문학 작가이다. 1950년대 이후부터는 애초에 노벨상 위원회가 문학작가에게만 상을 주었는데, 2015년에는 수필가, 2016년에 가수로서 비문학 작가에게도 수여했다. 여기에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최고령이다. [5] 《라틴 금석문 전집》(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몸젠이다. 다만, 《그리스 금석문 전집》(Corpus Inscriptionum Graecarum)은 몸젠보다 먼저 아우구스트 뵈크(August Boeckh)가 기획했다. [6] 오늘날 로마법 연구자들이 《 로마법 대전》 연구에 사용하는 표준판본이 바로, 몸젠이 교감(校勘)한 텍스트를 파울 크뤼거(Paul Krueger), 루돌프 쇨(Rudolf Schoell) 등이 다시 수정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