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마리 트랭티냥 Marie Trintigna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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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2년 1월 21일 |
프랑스 오드센주 불로뉴 비앙쿠르 | |
사망 | 2003년 8월 1일 (향년 41세) |
프랑스 오드센주 뇌이쉬르센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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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장루이 트랭티냥 (1930~2022) 어머니 나딘 트랭티냥 (1934 ~) 여동생 플린 트랭티냥 (1969~1969) 남동생 뱅상 트랭티냥 (1973 ~) |
배우자 |
리처드 콜리니카 (이혼) 프랑시스 클루젯 (이혼) 오스닌 지라드 (이혼) 새뮤얼 벤체트릿 (1998년 결혼 / 2003년 사별)[1] |
자녀 | 슬하 4남 |
직업 | 배우, 가수, 사회운동가 |
데뷔 | 1967년 영화 <몬 아모르> |
활동 기간 | 1967년 ~ 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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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여배우로, 1980년대~ 199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서 왕성히 활동하며 영향력 높은 여배우로 평가받았다. 명배우 장루이 트랭티냥의 장녀로, 1967년 5살의 나이로 데뷔해 2000년대 초반까지 총 45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2003년 연인 사이였던 록밴드 누아르 데지르의 보컬 베르트랑 캉타에게 구타를 당해 생을 마감한, 비극의 스토리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2. 생애
1962년 1월 21일 장루이 트랭티냥과 나딘 트랭티냥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나이에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이 후 1970년대부터 <남과 여>, <순용주의자>, <모드집에서의 하루> 등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는 1996년 개봉한 영화 <뽀네트> 에서 뽀네트의 모친 역으로 익숙한 인물. 마리는 세자르 영화제에서 3차례의 여우조연상, 2차례 최고배우상을 수상했다.또한 저널리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여성 인권운동을 활발히 펼치던 인물이었으며 이에 관련된 영화에도 여러 출연했다. 또한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말년인 2003년 이라크 전쟁 반전시위에도 참여해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유럽 연합의 이라크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아버지인 장루이도 진보주의 성향에 무정부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이어서 둘이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다.
마리는 생전 4번 결혼했으며 1998년 작가이자 배우인 새뮤얼 밴체트릿과 마지막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2003년 초부터 별거를 시작했지만 최종 이혼은 하지 않았고, 마리가 사망하기 전날에도 새뮤얼과 연락을 했다고 한다. 자녀는 총 4명으로 모두 아들이며, 네 사람 모두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형제사이다. 한편 리처드 콜리니카와 얻은 자식인 로만 콜리니카는 다가오는 것들 등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2.1. 갑작스러운 죽음
마리는 2003년 초 새뮤얼 밴체트릿과 별거를 시작한 뒤 록밴드 누아르 데지르의 보컬 베르트랑 캉타와 연애를 시작했다. 누아르 데지르는 198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밴드로, 특히 2001년 발표된 <얼굴들> 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이듬 해 가을에 열린 프랑스 전국투어까지 성황리에 마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6월 초, 두 사람은 마리가 촬영을 앞둔 신작 <콜레트> 촬영을 위해 리투아니아로 출국하여 어머니인 나딘과 아들 로만과 함께 호텔에서 머물렀다.그러던 2003년 7월 27일, 마리는 베르트랑과 말다툼을 벌이던 중 베르트랑에게 머리를 여러차례 구타당해 뇌사상태에 빠졌다. 전말을 살펴보면, 베르트랑이 마리가 전 남편인 새뮤얼과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언쟁이 시작된 뒤 베르트랑이 마리의 머리에 4차례 주먹을 날렸다. 당시 두 사람은 음주한 상태였다. 베르트랑은 마리가 쓰러지고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경찰에 신고했으며, 마리는 곧바로 뇌수술을 받았지만 뇌출혈 증세가 심각해서 결국 회생하지 못했다. 장 루이 트랭티냥은 딸이 뇌사판정을 받자 프랑스의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7월 31일 특별기편으로 자신의 고향인 오드샌주의 한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8월 1일 마리는 향년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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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트랭티냥의 장례식 |
2003년 8월 6일,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서 안장식이 거행되었으며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영화계의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다. 장 루이는 딸의 죽음에 몹시 비통해하며 장례식 내내 눈물을 흘렸고, 직접 추도사를 낭독하기도 했다.[2]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한국에서도 여러차례 보도되었으며, 마리의 양부였던[3] 영화감독 알랭 코르노가 타계했을 때 인연이 있었던 임상수가 부고에서 언급했을 정도.[4]
한편 베르트랑 캉타는 리투아니아 경찰에 체포되어 폭행치사 혐의로 기소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 해인 2004년 프랑스 정부의 신변인도요청으로 프랑스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2007년 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베르트랑의 사건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누아르 데지르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2010년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베르트랑은 2010년 록 페스티벌을 통해 복귀 공연을 한 뒤 현재는 공연 위주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사건의 여파가 여전히 엄청나서 이전의 명성은 거의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 베르트랑의 전 아내가 자살했는데 이것이 베르트랑의 가정폭력 때문이라는 보도가 나와 평판이 더욱 떨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