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 라틴어: Marcus Antonius Creti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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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7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크레타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아버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형제) 안토니아(누이) 율리아 안토니아(아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장남)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차남)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삼남) 안토니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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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법무관, 크레타 총독.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버지다.2. 생애
헤라클레스의 아들 중 한 명인 안톤을 시조로 삼은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고 나라에 긴급한 일이 생길 때 이와 연관된 구절을 찾아본 뒤 원로원에 보고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를 역임한 티투스 안토니우스 메렌다, 기원전 422년 집정 무관을 역임한 퀸투스 안토니우스 메렌다, 기원전 333년 삼니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독재관으로 발탁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휘하의 기병장관을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1]를 자신의 역사서에 언급했다. 이렇듯 역사가 오래됐지만 집정관이 한 명도 없었기에, 안토니우스 씨족의 지위는 로마 귀족 사회에서 그다지 높지 않았다.그러다가 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대에 이르러 안토니우스 가문의 가세는 급성장했다. 그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전 시대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힐 정도로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서 맹활약했다. 기원전 99년 집정관에 올랐고, 기원전 97년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간의 내란이 벌어졌을 때 술라를 따랐다가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한 뒤 피살되어 수급이 포로 로마노에 전시되었다.
생년월일과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번째 단계를 통과한 상황을 포함해, 그가 법무관을 역임하기 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일당의 대숙청에 휘말려 살해되었고, 그의 형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함께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발칸 반도로 향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아버지 사후 그리스로 도망쳐 술라에게 가담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의 장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83년 로마에서 태어났고, 술라는 기원전 82년까지 로마에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는 로마에 남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74년, 그는 법무관에 당선되었다. 서기 1세기에 활동한 로마 작가 퀸투스 아스코니우스 페디아누스에 따르면, 그가 당선된 것은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를 비롯한 원로원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은 그가 민회 투표가 아니라 원로원의 결의에 의해 법무관으로 선임되었음을 암시한다고 추정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안토니우스의 먼 친척이었고, 케테쿠스는 마리우스파였다가 술라파로 전향한 뒤 원로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받았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그가 받은 권한은 7년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받은 권한과 동일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연안 전체와 해안에서 최대 50마일 떨어진 곳에서 임페리움을 행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그는 폼페이우스보다 먼저 지중해에서 활개치는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전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후 그는 기원전 74년~73년에 로마의 곡물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지중해 서부, 특히 리구리아 해안과 시칠리아 해안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에서 지역 주민들이 의무적으로 로마에 보내야 하는 곡물 공급을 현금 등가물로 대체하고, 가격을 명백히 부풀려 설정했다고 한다. 또한 릴리바이움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레가투스 중 한 명이 함대에 등록하기 위해 지역 주민의 노예를 징발하려고 시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노예가 여주인과 함께 베누스 에리키나 여신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역사> 단편에 그의 해적 토벌에 관한 에피소드가 언급되었다. 그는 리구리아인들을 상대로 육지와 바다에서 격돌해 고전 끝에 격퇴했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어 퇴각하는 그들을 잡지 못했다. 그후 그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싸우기 위해 히스파니아 속주로 항해하기로 마음먹고, 함대를 이끌고 아레시나리에 상륙한 뒤 딜룬 강을 건넜으나 인근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독일의 고전 역사가 아돌프 슐텐(Adolf Schulten. 1870 ~ 1960)은 아레시나리는 에브로 강과 피레네 산맥 사이에 살았던 이베리아 부족 에레노실리 족이며, 도시는 엠포니온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고고학자 폴 프랑수아 푸카르(Paul-François Foucart, 1836 ~ 1926)는 이 사건이 발레아레스 제도 중 한 곳에서 발생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기원전 72년, 그는 이번에는 지중해 동부로 이동했다. 그가 그리스에 있었을 때 세워진 2개의 비문이 현존한다. 하나는 아르골리스의 에피다우로스 시 주민들이 자기들 도시에 부과된 공물 납부액을 줄여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고, 두번째 비문은 라코니카의 항구 도시인 기티온 시민들이 그에게 보호와 신용을 제공한 클로아티온 형제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비문은 그가 해적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아내고자 노력했음을 암시한다고 추정한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는 크레타에서 해적들과 조우했을 때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배에 포로들을 싣기 위해 무기보다 사슬을 더 많이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해적들은 그를 격파했고, 로마군의 사체를 돛과 닷줄에 묶고 전속력으로 항구로 돌아왔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크레타인과의 전쟁은 잘 풀리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기록들을 토대로 그가 해적들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뒤 사망했으며, 죽기 직전에 받은 아그노멘 크레티쿠스(Creticus: 크레타 정복자)는 조롱이나 패배를 숨기려는 시도로 부여되었다고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전쟁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나중에 승리를 거두고 로마에 유익한 평화 협약을 이뤄내고 그런 아그노멘을 부여받았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어쨌든 그는 로마로 돌아 오기 전인 기원전 71년에 크레타 섬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기원전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척인 율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율리아 안토니아는 순결함과 고귀함에서 당대 최고 자리를 경쟁할 만 했다고 한다. 이 결혼에서 세 아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태어났으며, 딸 안토니아는 기원전 4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율리아는 그가 사망한 뒤 기원전 7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 재혼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그가 속주민들을 착취하고 해적들을 상대로 패배를 면치 못한 무능한 인간이라고 비난했으며,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에 동의한다. 다만 플루타르코스는 그에 대해 긍정적인 에피소드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남에게 소유물을 베푸는 걸 좋아했지만, 그의 아내가 그가 적은 재산을 축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섣불리 그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돈이 없었던 그는 노예에게 은색 머그잔에 물을 담아서 가져오라고 시켰다. 이후 면도하려는 듯 턱을 적시더니, 또다른 구실로 노예를 방 밖으로 내보낸 뒤 친구에게 머그잔을 주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이후 머그잔이 사라진 걸 알게 된 아내가 노예가 훔쳐간 줄 알고 집안의 모든 노예를 불러서 일일이 고문하려 들자, 그는 자기 때문에 노예들이 심한 꼴을 당하는 걸 견딜 수 없어 모든 것을 고백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1]
그러나 종교 의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 모두 같은 해에 사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