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저 모티머 Roger Mortim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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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231년경 ~ 1282년 10월 26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 | |
아버지 | 랄프 모티머 | |
어머니 | 그우라두스 두 | |
형제 | 휴, 존, 피터 | |
배우자 | 모드 드 브라오스 | |
자녀 | 랄프, 에드먼드, 이사벨라, 마거릿, 로저, 제프리, 윌리엄 | |
직위 | 초대 위그모어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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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왕당파의 편에 서서 시몽 드 몽포르에 대적했다.2. 생애
모티머 가문은 본래 노르망디 공국에서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노르만 귀족으로, 조상 로저 모티머는 친척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걸 도운 뒤 잉글랜드 왕국 남서쪽인 헤리퍼드셔와 슈롭셔에서 광범위한 영지를 받았다. 이후 모티머 가문은 대대로 위그모어 성에 의존하여 웨일스를 공략하는 동시에 잉글랜드 내부의 정치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그들은 웨일스 변경지대의 대귀족으로서 배타적인 사법 및 행정 관할권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획득했다.로저 모티머의 4대손인 랄프 모티머는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의 딸인 그우라두스 두[1]와 결혼해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장남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로저 모티머다. 로저의 정확한 생년월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가 15살인 것으로 추정해 1231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246년 8월에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미성년자였던 그는 잉글랜드 왕실의 후견을 받았다. 6개월 후, 로저는 왕실에 2,000 마크를 지불하고 영지 소유권을 획득했다. 이는 로저가 성년이 될 때까지 모티머 땅을 통치할 법적 권리를 왕이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볼 수 있다. 1247년, 로저 모티머는 마지막으로 남은 브라오스 가문의 일원인 모드 드 브라오스와 결혼했다. 모드 드 브라오스의 아버지인 윌리엄 드 브라오스는 1230년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에게 생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로저는 모드와 결혼하면서 래드너셔, 나버, 빌스 및 브렉녹셔의 상당한 영지에 대한 권리를 얻었으며, 이는 웨일스 변경지대에서 그의 지위를 극적으로 강화했다.
한편, 로저 모티머의 시어머니이자 윌리엄 드 브라오스의 아내인 에바 마셜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손녀로, 1245년 12월 22일 안셀 마셜이 사망하면서 윌리엄 마셜의 아들들이 모두 사라진 뒤 남은 누이 및 외손자들과 함께 마셜 가문의 영지를 나눠가졌고, 이를 사위에게 물려줬다. 그 결과 로저 모티머는 웨일스, 잉글랜드, 아일랜드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누렸다.
다만 이 새로운 영지는 즉시 획득되지 않았다. 다른 브라오스 가문 영지 상속녀의 남편들과 분할에 대해 논쟁해야 했으며, 왕실의 후견을 받는 토지들을 자기 것으로 온전히 삼는 걸 허락받아야 했다. 로저 모티머는 헨리 3세의 외국 고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왕권 제약을 옹호했기 때문에, 왕실은 영지를 그에게 양도하는 걸 서두르지 않았다. 1259년 2월이 되어서야 브라오스 가문 영지가 로저 모티머에게 이전되었다. 이와 동시에, 헨리 3세는 모티머 가문의 영지 일부였던 글로스터셔의 장원 2개를 형제 콘월의 리처드에게 부여했다. 이는 로저 모티머가 헨리 3세에게 비판적인 입장이 된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만 로저 모티머와 왕실과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1253년, 헨리 3세는 윈체스터에서 로저 모티머에게 기사 작위를 준 뒤 자기 수행원으로 삼아서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1254년 가스코뉴에서 돌아온 로저 모티머는 웨일스 변경지대의 다른 귀족들과 함께 귀네드 왕국의 국왕 허웰린 압 그루퍼드의 봉기에 맞서 싸웠다.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조부인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처럼 웨일스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잉글랜드 영주들에 대한 습격전을 이어갔다. 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1241년부터 모티머 가문의 지배를 받았던 마일레니드와 구르티에니온이었다. 1256년,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구르티에니온을 무력으로 접수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이에 대해 로저 모티머를 위해 무력 지원을 꺼리다가, 1257년 1월이 되어서야 200마크를 군자금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로저 모티머는 단지 100마크만 받았다.
1258년 옥스퍼드에 모인 귀족들이 헨리 3세에 대한 요구 사항을 작성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로저는 이 위원회에 참석한 귀족 12명 중 한 명이었다. 1258년 10월 18일, 로저는 개혁을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왕이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는 옥스퍼드 조례에 서명했다. 이후 로저는 국왕이 국가 문제에 대한 결정을 조율해야 했던 15명의 왕실 고문 중 한 명이 되었고, 1259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종식하는 파리 조약에 서명했다.
1259년 7월 25일, 로저는 몽고메리 성에서 허웰린과 1년 평화 협약을 맺었다. 1년 협약이 끝난 직후,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빌스 성을 무력으로 공략했다. 당시 로저 모티머는 런던에 가서 글로스터셔의 토지 소유에 대한 자기 주장을 변호하고 있었기에, 허웰린 압 그루퍼드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웨일스로 돌아온 그는 제6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와 함께 헨리 3세의 웨일스 원정을 돕고자 병력을 모집했지만, 헨리 3세는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협의한 끝에 2년간 휴전 협약을 추가로 맺기로 했다. 로저 모티머는 자기 영지를 탈환할 기회를 잃은 것에 강한 불만을 품고 협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로저 모티머는 휴전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웨일스 국경지대에 대한 습격전을 개시해 허웰린이 헨리 3세에게 불만을 제기할 근거를 제공했다. 1262년 11월, 마일레니드 영주들이 로저 모티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허웰린 압 그루퍼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허웰린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크누클라스, 블레드파 및 케프닐리스 성을 접수하고 로저를 격파했다. 로저는 곧 케프닐리스 성을 탈환했지만, 허웰린이 러드너를 점령하고 브레컨 주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로저는 왕에 반대하는 귀족들과 한동안 행보를 함께 했지만, 개혁을 진두지휘하던 시몽 드 몽포르와 갈등을 벌이면서 점차 행보를 달리하고 싶어 했다. 헨리 3세는 이를 주목하고 로저 모티머가 주장한 웨일스 영지 상당수를 제공했다. 한편, 로저 모티머는 웨일스 국경지대의 전반적인 상황이 악화하는 걸 고려해 이 지역의 왕실 영지를 장악한 에드워드 왕자와 웨일스 최대의 거물인 리처드 드 클레어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1261년 12월 7일, 권력을 다시 장악한 헨리 3세는 몽포르 가문과 모티머 가문을 포함한 일부 반대자들을 공식적으로 사면했다. 그 후 로저 모티머는 왕실파의 일원이 되었다.
1264년 제2차 남작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내전의 첫번째 충돌은 1263년 12월에 에드워드 왕자가 로저 모티머에게 시몽 드 몽포르가 주장하던 헤리퍼드셔의 3개 영지를 주었을 때 발생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헤리퍼드셔 3개 영지를 슴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264년 2월, 시몽 드 몽포르의 지시를 받은 앙리 드 몽포르, 소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 국경지대로 진군해 모티머 가문의 본거지인 위그모어 성 등 여러 성을 접수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로부터 보상으로 하이 성과 헌팅던 성을 받은 로저 모티머는 소 시몽 드 몽포르를 격파한 뒤 노샘프턴으로 추격했다. 그 해 4월 5일 노샘프턴 공방전은 왕실군의 승리로 끝났고, 노샘프턴을 지켰던 소 시몽 드 몽포르는 생포되었다.
12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 참전했다가 왕실군이 대패하고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가 생포되자, 로저는 다른 웨일스 변경지대 귀족들과 함께 전장을 떠나 페벤시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시몽 드 몽포르가 노샘프턴 공방전에서 생포했던 포로들을 풀어주고 로저 모티머의 막내 아들 윌리엄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이행되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시몽 드 몽포르는 귀족 의회에 소집하면서 로저 모티머를 소환했지만, 로저 모티머는 이에 응하지 않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그는 글로스터, 브리지노스 및 말버러 성을 접수했다. 이에 로저 모티머는 1264년 12월 허웰린 압 그리퍼드와 동맹을 맺고 웨일스 변경지대를 침공해, 자신에게 대적한 영주들의 땅을 황폐화했다.
자기들 영지가 파괴되는 꼴을 견디지 못한 웨일스 영주들은 평화를 얻기 위해 모티머가 1년 1일 동안 아일랜드로 망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로저 모티머는 이를 거부하고 위그모어에서 버텼다. 얼마 후, 시몽 드 몽포르에게 반기를 든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퍼느 드 클레어와 동맹을 맺었다. 그 해 5월 28일, 에드워드 왕자가 케닐워스 성에서 도망친 뒤 위그모어 성으로 피신해 로저 모티머의 영접을 받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탈출 계획을 작성했다고 한다.에드워드 왕자는 모티머 가문의 또다른 성채인 러들로에서 군대를 모집했고, 로저 모티머는 이어진 원정에서 사령관을 맡았다.
1265년 8월 4일, 로저 모티머는 이브샴 전투에 참여해 반란군을 섬멸하고 시몽 드 몽포르 등 의회파 귀족들을 처단했다. 이때 그는 휴 르 디스펜서를 직접 처단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로저 모티머는 허웰린 압 그리퍼드를 향해 진군헀지만, 1266년 5월 15일 브레컨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 반란 잔당이 모인 케닐워스 성을 공략하기 위한 케닐워스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헨리 3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헤리퍼드셔의 보안관으로 선임하고, 그에게 허리퍼드 성과 여러 영지를 부여했으며, 슈롭셔에 있는 그의 영지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여기에 더해, 로저 모티머는 반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몰수된 귀족들의 영지 상당수를 인수했다.
나중에 반란 귀족들이 사면되면 자기 영지를 돌려달라고 소송을 거는 걸 우려한 로저 모티머는 왕에게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의 계승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추방하자고 건의했고, 안 그래도 반란 귀족들에게 악감정을 품었던 헨리 3세는 받아들였다. 그러자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반발해 1267년 4월 봉기해 런던을 접수했다. 이후 헨리 3세는 길버트 드 클레어와 협상한 끝에 반군 귀족들이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사면하고 계승권도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로저 모티머는 빼앗았던 영지를 돌려줘야 했지만,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제2차 남작 전쟁 종결 후,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왕자의 절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이 되었다. 1270년 8월 2일 에드워드 왕자가 십자군 원정을 떠났을 때, 로저는 에드워드 왕자의 자녀들을 돌보고 그의 영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콘월의 리처드와 함께 분담했다. 1272년 11월 헨리 3세가 사망한 후, 로저 모티머는 섭정을 맡은 귀족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1세가 1274년 8월에 돌아오기 전에 북부 주의 반란을 진압했다. 잉글랜드에 돌아온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허웰린 압 그리퍼드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로저 모티머에게 슈롭셔, 스태퍼드셔, 헤리퍼드셔의 보안관으로 삼고 그곳에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레이시와 함꼐 웨일스 중부로 진군하도록 했다.
뒤이은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서, 로저 모티머는 헨리 드 레이시와 함께 허웰린에 의해 추방되었던 포이스 왕족들을 해당 영지로 복귀시키고 빌스를 포함한 여러 성을 탈환했다. 1277년 허웰린이 에드워드 1세에게 굴복한 뒤, 에드워드 1세는 로저에게 웨일스 중부 지역의 여러 영지를 수여했으며, 허웰린이 잉글랜드 왕을 제외한 모든 적에 맞서 로저와 동맹을 맺도록 강요했다. 허웰린은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1281년 10월 구르티에니온을 로저에게 돌려줬다.
이후 건강이 악화된 로저 모티머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케닐워스 성에서 군 복무에서 은퇴한 것을 엄숙하게 축하하며 호화로운 잔치와 토너먼트를 조직했다. 이 행사에 참여한 이는 기사 100명과 숙녀 100명이었고, 로저는 이들을 대접하고자 많은 돈을 썼다. 1282년 가을 회복이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그는 왕실에 많은 빚을 졌기에 자손들이 영지를 물려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유언장이 엄격히 집행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이야기를 전해듣자, 같은 해 10월 27일에 로저가 질병으로 사망할 경우 그의 후계자는 로저의 빚 때문에 잉글랜드 재무부에 의해 영지를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특허를 발행했다. 1282년 10월 26일, 로저는 위그모어 성에서 숨을 거두었고 위그모어 성 인근 가족 무덤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모드 드 브라오스(1225 ~ 1301): 제10대 에버게브니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 에바 마셜의 딸.
- 랄프(? ~ 1275)
- 에드먼드(1251 ~ 1304): 제2대 위그모어 남작. 초대 마치 백작이며 프랑스의 이자벨의 애인으로서 잉글랜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로저 모티머의 아버지.
- 이사벨라(? ~ 1292): 제7대 아룬델 백작 존 피츠존과 초혼, 로버트 헤이스팅스와 재혼.
- 마거릿(? ~ 1297): 제6대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의 부인.
- 로저(? ~ 1326): 치크 남작.
- 제프리(? ~ 1273)
- 윌리엄(1259 ~ 1297): 기사. 로버트 드 무세그로스의 딸이자 상속인인 하와이즈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