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 前 말라야 공산당 서기장
라이 텍 Lai Te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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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e400> 본명 |
팜 반 닥[1] Phạm Văn Đắ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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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3월 2일 | ||
안남 보호령 느헤 틴주 호앙 아 낙(Hoang A Nhac)[2] | |||
사망 | 1947년 3월 6일 (향년 45~46세) | ||
태국 방콕 | |||
장지 | 메남강 | ||
재임기간 | 말라야 공산당 서기장 | ||
1939년 4월 ~ 1947년 3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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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가명 | 라이 텍, 로이 탁, 리숭, 웡김걱, 창헝, 미스터 라이트, 미스터 라이터[3] | |
종교 | 무종교 | ||
소속 정당 | 말라야 공산당 (출당·제명 / 1947.3.6) | ||
군사 경력 | |||
복무 | 말라야 항일 인민군 | ||
1941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대장 (말라야 항일 인민군) (군적 삭제 / 1947.3.6)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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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계 베트남인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간첩. 정체가 배일에 싸여있는 인물로 유명하다.[4]2. 생애
2.1. 간첩 및 공산당 활동
1901년에 판 반 닥(Phạm Văn Đắc) 혹은 호앙 아 낙(Hoang A Nhac)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바 리아(Bà Rịa)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5] 추정되는 이름으로 보아선 베트남인인 것은 확실하게 여겨지나, 그 이상의 정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이후 프랑스의 간첩으로 활동했으나 곧 정체가 밝혀졌다. 이후 영국의 간첩으로 포섭되어, 1934년에 싱가포르로 이동하여 말라야 공산당에 몰래 가입하였다.[6]
처음에는 말라야 공산당에 대한 공작과 정보 취득을 이유로 가입한거였으나, 의외로 활동에 재능이 있어서인지 고위급으로 승진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권력욕이 생긴건지 영국령 식민지 경찰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적을 경찰 및 영국 통치기구에게 희생당한 척 제거하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공산당원으로서는 일도 활동도 잘해서 승진하고, 영국 간첩으로서는 공산당원을 계속 제거하면서 라이 텍은 자신의 임무와 권력욕을 둘 다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영국의 스파이인것을 모르는 공산당원들은 일도 잘하고 열심히 잘하는 라이 텍을 서기장으로 추대했다. 또한 서기장이 된 이후 기존의 당의 방향성을 바꾸어 영국과 미국과 서방세계와 협조하기로 했다.[7] 어차피 반대파가 모두 '희생' 당했으니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공산당원들은 주변 국가들로 도망가거나 숨었으나 라이 텍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후 일본군이 말라야에 진주하였을때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서 대부분 사살했다. 이때 라이 텍도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갔으나 이후 그냥 수용소에서 나왔다.[8]
1942년 9월 1일, 라이 텍은 바투 케이브에서 공산당 전체회의를 개회했다. 100명이 넘는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항인 인민군 지휘관들이 모였으나 라이 텍은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일본군이 해당 장소를 급습하여 대부분의 위원들과 지휘관을 사살했다.[9]
이후 전쟁이 끝나자, 라이 텍은 연합국 산하에 공산당 자치정부를 만들어서 나중에 독립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존 계획과 매우 달랐는데, 원래 계획은 일본이 말라야에서 철수하자마자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계획이였다. 이 때문에 라이 텍은 공산당원들과 갈등을 빚었는데, 지금 당장 독립하면 우리는 이전과 달리 연합국의 지원이 없어 고립되고, 또한 동맹국인 연합국과의 갈등이 불가피 해지기 때문에 안된다고 강조했다.
2.2. 실종
이후 1946년, 라이 텍에 대한 안좋은 소문이 퍼졌다. 전쟁 당시 소극적이고 보수적이었던 항일 운동, 정적 숙청 의심, 연합국의 꼭두각시 스파이라는등 이러한 소문들이 당내를 떠돌자 어린 당원들을 중심으로 라이 텍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야한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이후 1947년 3월 6일, 감사 날짜가 잡혔고 당일이 되자 당 자금을 들고 도주해버렸다. 이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홍콩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태국으로 도망갔고 그 직후에 잠적했다.2.3. 이후
라이 텍이 도망가자 선거를 통해 친펑을 새로운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친펑은 방콕과 홍콩을 방문해 현지 공산당원들에게 라이 텍을 찾아서 죽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후 각각 2명의 베트남인 및 태국인 공산당원들이 라이 텍을 찾아다니다가, 이후 태국 공산당 고위 당원의 증언에 의하며 3명의 당원들이 라이 텍을 잡으려고 했으나 실수로 목을 졸라 죽여버렸고, 이후 시체는 메콩강에 마대에 담겨 버려졌다고 했다. 이 증언에도 신빙성이 의심되는 부분은 많으나, 일단 이 사건 이후로 라이 텍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않는 관계로, 주류 역사학계는 이 증언이 진실에 가깝다고 추정하고 있다.3. 여담
- 친펑에 따르면 공산당 내부에선 별명으로 Mr. Wright로 불렸다고 한다.
- 라이 텍이라는 이름은 친펑에 따르면 라이 텍이라는 이름은 Mr. Wright에서 r 발음을 빼서 Lai Te로 바꾸었고 이후 어떤 사람하고 대화하는지에 따라 이름이 라이 텍 혹은 로이 텍 혹은 라이터가[10] 되었다고 한다.
- 1950년 일본 헌병대 기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라이 텍이 공산당과 136부대[11]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전부 보고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로서 그는 프랑스, 영국, 일본의 삼중 스파이를 한셈이다.
[1]
논란이 있다. 자세한건 후술
[2]
혹은 팜 반 닥(Phạm Văn Đắc) 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바 리아(Bà Rịa)가 유력하다고 한다.
[3]
이외에도 다 합해서 가명이 50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4]
본명과 어디서 태어났는지조차 미상이다.
[5]
혹은 저 두 이름이 태어난곳의 지명이라는 말도 있다.
[6]
이때
프랑스에서 활동할때 썼던 가명 쯔엉 푸옥 닷(Truong Phuoc Dat)을 버리고 라이 텍으로 바꾼 걸로 추정된다.
[7]
사실 이건 이상할 것은 없는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워낙
추축국이 저지르는 만행이 천인공노할 수준이라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식으로 세계 각지에서
공산당이 성향을 막론하고 기존 정당들과 연대해서
파시즘 세력에 맞서 싸웠던데다, 아직
냉전이 시작하지도 않았을 때라서 대놓고
미국이
소련에게
물자를 지원해주면서 함께 싸울 정도로
공산주의 진영과 비공산주의 세력의 연대가 활발했던 시기다. 당장 옆 동네의
베트남 공산당도 미국의 지원 하에
일본을 상대로 투쟁을 벌인 만큼,
말라야 공산당 내부에서도 라이 텍의 본심이야 어쨌든 간에
연합국과의 합작은 필수불가결이라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8]
아마도
일본의 간첩이 되기로 하고 나온 걸로 추정된다.
[9]
이후 해명하기를 자신의 자동차가 고장나서 갈수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간첩이였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는 설도 존재한다.
[10]
우리가 아는 그 불붙히는 라이터가 맞다.
[11]
영국군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