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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9:52:18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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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트 제11대 국왕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Dmitar Zvonimir
파일:드미타르 즈보니미르.jpg
제호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Dmitar Zvonimir)
출생 미상
사망 1089년 (향년 불명)
재위 크로아트 왕국의 제11대 국왕
1074년 ~ 1089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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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트 왕국 제11대 국왕.

2. 행적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수의 학자들은 크로아트 왕국 제10대 국왕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친척이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왕실에 속하지 않은 유망한 크로아티아 거물 가문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어느 시점에 헝가리 왕국의 봉신인 슬라보니아의 반(Ban)을 맡고 있었으며, 헝가리 국왕 게저 1세의 여동생 옐레나 리예파를 아내로 뒀다. 1067년, 카르니올라 변경백 올리크 1세가 크로아티아 왕국 북부를 침공해 크바르네르 일부와 이스트리아 반도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달마티아 변경백'을 칭했다. 그는 이를 몰아내기 위해 헝가리 공동 국왕 게저 1세 셜러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게저 1세와 셜러몬은 즈보니미르를 도와서 올리크 1세를 물리치게 해줬다.

이렇게 헝가리 왕국의 등을 업은 드미타르를 무시할 수 없었던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070년 자다르에서 발행한 3개의 헌장에서 드미타르를 "크로아티아의 반"이라고 칭하는 등 후계자로 공인했다. 1074년 노르만 지도자이자 조비나초 백작 아미코가 달마티아 해안을 침공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이에 맞서 항전했지만 생포되었고, 옥고를 치르다가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이에 드미타르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미코를 축출한 뒤 달마티아 해안을 장악한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려면 교황청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주교 서임권 분쟁을 벌이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교황은 1075년 또는 1076년 9월, 특사 게비존과 풀콘 주교를 크로아티아에 파견했다.

드미타르는 두 주교에게 교황에 충실하겠으며, 교황이 왕관을 분배하고 영토 소유권을 승인할 권리가 있다는 그레고리오 7세의 주장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에 게비존은 1075년 또는 1076년 10월 8일 일요일에 솔린의 성 스테판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왕홀과 검, 그리고 교황 깃발을 건넸다. 그는 대관식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공작(Croatiae Dalmatiaeque dux)으로 칭해졌지만, 대관식 후에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국왕(Croatiae Dalmatiaeque rex)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드미타르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을 도울 것이며, 교황에게 매년 십일조를 바치겠으며, 인신매매를 막고 빈민과 과부, 고아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브라나에 있는 성 그레고리 수도원을 교황 특사를 위한 호스피스로 제공했다.

그리하여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뒤, 드미타르는 크닌에서 집권하며 경제와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크닌 인근의 비스쿠피야에 대성당을 세웠고, 크르크 섬의 바슈카에 있는 성 루시아 수도원에 영지를 제공했다. 1079년 하인리히 4세의 가신인 이스트리아 귀족 베셀린과 소규모 접전을 치렀고,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반도에 상륙해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연합과 맞붙었을 때 로베르 기스카르를 지원했다. 1083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크로아티아인의 지원에 힘입어 동로마-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하고 두라스 시를 점령했으며, 1084년에는 코르푸 섬 인근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크게 격파했다.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는 헝가리 왕 게저 1세의 누이인 옐레나 리예파와 결혼해 아들 라도반과 딸 클라우디아(Klaudija)[1]를 두었다. 그러나 외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라도반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1089년경 드미타르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로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드미타르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예루살렘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해방하는 원정에 가담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크닌 인근의 비스쿠피야에서 의회를 소집했다가 귀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나 등장하기에 신빙성이 없고, 학자들은 1089년 9월 8일 스테판 2세 국왕 헌장과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토마스 대주교의 <히스토리아 살로니타나(Historia Salonitana)>의 기록 대로 자연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크로아티아인들은 스테판 2세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스테판 2세가 2년만에 사망한 뒤, 크로아트 왕국은 내란에 휘말렸다.


[1] 랍차니 부족 지도자 카리나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