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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트 제10대 국왕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Petar Krešimir 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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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Petar Krešimir IV) |
출생 | 미상 |
사망 | 1074년 (향년 불명) |
재위 | 크로아트 왕국의 제10대 국왕 |
1058년 ~ 10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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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트 왕국 제10대 국왕.2. 행적
크로아트 왕국 제9대 국왕 스테판 1세의 장남이다. 1058년, 스테판 1세가 사망한 뒤 크로아트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에게는 형제 고이슬라브가 있었는데, 스테판 1세는 두 형제가 공동으로 왕위를 물려받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고이슬라브는 얼마 안가 사망했는데, 이에 대해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코르출라 코덱스(Korčula Codex)>에 따르면,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한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이나르드(Majnard)를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2명의 장관과 함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맹세했고,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여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크로아트 국왕으로 군림하는 걸 받아들였다고 한다.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054년 동서 대분열 이후 발칸 반도에서 가톨릭 전례를 추종하는 세력을 포섭하길 원하는 교황청과 협력했다. 1061년 마이나르드가 스플리트의 사보르 교회를 찾아왔을 때, 그는 고위 귀족들과 함께 맞이한 뒤 교황청의 입장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교황청은 크로아티아 성직자들이 긴 수염과 머리 스타일, 결혼하는 것에 반대했고, 교회 예배에서 글라골 문자를 쓰지 말고 라틴어만 쓰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에 따랐고, 이에 반발한 크르크 체데다의 주교와 부크라는 사제를 탄압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비오그라드 , 닌 , 시베니크, 카린 , 스크라딘 등 달마티아 해안 도시 및 섬들에 자신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항구 수입의 1/3에 달하는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해, 이들 도시의 발전을 도모했다. 그는 이들 도시가 벌어들이는 무역 수입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내 권력 강화에 힘썼다. 또한 비오그라드에 성 전도자 요한 수도원(1060년)과 성 토마스의 베네딕토회 수도원(1066년)을 잇따라 설립하는 등 여러 수도원을 견설했고, 교회에 많은 땅을 기부했다. 또한 자다르에 있는 성 마리아 수도원에 헌장을 내렸는데, 이 수도원의 창립자이자 첫번째 수녀원장은 그의 사촌인 치카였다.
1069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셀주크 제국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달마티아 테마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총독이나 에파크 등 제국의 호칭을 피하고, 자신의 영토를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왕국(Regnum Dalmatiae et Chroatia)'이라고 칭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인정한 바 없었지만, 그는 이를 근거로 삼아 크로아티아 전역의 통일된 정치 및 행정권을 구사했다. 한편, 그의 친족이자 슬라보니아의 반(Ban)인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는 1067년 크로아티아 왕국 북부를 침공해 크바르네르 일부와 이스트리아 반도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달마티아 변경백'을 칭한 카르니올라 변경백 올리크 1세를 헝가리 국왕 게저 1세와 셜러몬의 지원하에 몰아냈다. 이에 페타르 크레시미르는 1070년에 자다르에서 발행한 3개의 헌장에서 드미타르를 "크로아티아의 반"이라고 칭하는 등 후계자로 공인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에게 완패하면서 위상이 추락하자,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인과 두클랴 공국은 크로아트 왕국과 연계해 독립을 꾀했다. 동로마 제국은 두클랴 공자 콘스탄틴 보딘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인의 반란을 간신히 진압한 뒤, 이 반란에 크로아트 왕국도 관여했다는 걸 알게 되자 이들을 견제하기로 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지자인 노르만 지도자이자 조비나초 백작 아미코는 동로마 제국의 의뢰에 따라 1074년 3월 19일 달마티아 해안을 침공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랃, 나모루, 자다르를 장악했다. 뒤이어 라브 섬을 4월 14일부터 5월 초까지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했고, 5월 9일 크레스 섬을 공략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아미코의 침략과 맞서던 중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생포되었다. 아미코는 1년 만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파견한 함대에 축출되었지만,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그 전에 이미 사망했다. 자세한 경위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노르만족의 포로로 지내던 중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유해는 솔린의 성 스테판 교회에 안장되었고, 자녀가 없었기에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새 왕이 되었다. 훗날 오스만 제국이 성 스테판 교회를 파괴했을 때, 그의 무덤도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