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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안티고노스 왕조 2대 국왕 | |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Δημήτριο Πολιορκητής | Demetrius I Poliorcetes |
|
|
|
휘 |
데메트리오스 Δημήτριο |
별명 |
폴리오르케테스 Πολιορκητής |
출생 | 기원전 336년 |
프리기아 켈라이나이 병영 | |
사망 | 기원전 283년(52~53세) |
셀레우코스 제국 아파메이아 | |
재위 기간 | |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
기원전 294년 ~ 기원전 2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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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왕조 2대 국왕.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췄고 가슴에 품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등 쟁쟁한 경쟁자들과 힘겹게 싸워야 했고, 운마저 따르지 않아 끝내 패망해버린 비운의 인물이다.2. 생애
기원전 336년 프리기아 켈라이나이 병영에서 안티고노스 1세와 코르헤오스(Corrhaeus)의 딸 스트라토니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동생으로 필리포스를 두었다. 그는 프리기아의 수도인 켈라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고급 교육을 받았다.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용감했다고 한다. 거기다 용모까지 잘생겼으니 그야말로 엄친아. 안티고노스는 그런 아들을 매우 신임해 아들이 자신을 대면할 때도 무기를 항상 휴대하도록 허용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두 남자는 오입쟁이에 술꾼, 투사였으며, 둘다 자유분방하고 사치스럽고 오만했다. 이러한 유사성은 그들의 운명의 유사성에 반영되었다. 그들은 일생 동안 엄청난 승리와 재앙을 겪었고, 대제국을 정복했지만 쉽게 잃었다.
또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왕들이나 입는 복장인 자주색 옷을 입었고, 금으로 수놓은 가장 고급스러운 자주색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3세를 동경하여 그와 같은 왕이 되기를 갈망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그 후 제국의 섭정을 맡은 페르디카스는 안티고노스를 프리기아, 팜필리아, 리키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가 페르디카스로부터 할당된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를 공략하는 걸 도우라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자, 페르디카스는 안티고노스를 징벌하기로 결심했다. 페르디카스의 대군이 소아시아로 쳐들어오자, 안티고노스는 13살 된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여 안티파트로스의 보호를 받았다. 이때 데메트리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딸 필라와 결혼하였고,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딸 스트라토니케를 낳았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이집트 정벌에 실패하고 부하들에게 살해된 뒤, 안티파트로스가 제국의 새 섭정으로 취임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그는 페르디카스와 한 편이었고 저명한 마케도니아 장성 크라테로스를 죽인 에우메네스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에우메네스는 오키니아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한 뒤 노라 요새에서 농성했다. 안티고노스는 노라 요새를 포위하고 페르디카스의 다른 잔당을 쓸어버렸다. 그러던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뒤 폴리페르콘이 새 섭정을 맡자, 그를 인정할 수 없다며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봉기했다. 이에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이후 안티고노스는 아시아 각지를 돌며 에우메네스와 대적했는데,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의 원정에 동행하여 일정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316년, 안티고노스는 메디아의 가비니 전투에서 은방패부대의 배신에 힘입어 에우메네스를 사로잡았다. 안티고노스의 부하 대부분은 에우메네스를 위험인물로 여겨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평소 그를 흠모했던 데메트리오스는 에우메네스를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티고노스 역시 에우메네스의 재능을 아깝게 여겼기에 고심했지만, 에우메네스가 끝내 자신의 부하가 되길 거부하고 장수들의 요구가 극렬하자, 어쩔 수 없이 처형을 집행하게 하였다. 이렇게 에우메네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빌론의 사트라프 셀레우코스 1세가 위협을 느끼고 이집트로 달아나면서, 안티고노스는 인도 근방에서 소아시아까지 이르는, 디아도코이 중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고무되어 장차 제국을 통합하여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가 기원전 314년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에 대항하기로 했다. 그들은 안티고노스에게 공동으로 사절을 보내 프리기아를 리시마코스에게, 페니키아와 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바빌로니아를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안티고노스는 콧방귀를 뀌며 "전쟁을 알아서 대비하라"라고 답했다. 그는 아리스토데모스 장군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보내서 군대를 일으키게 했고, 조카 폴레마이오스 휘하의 군대를 헬레스폰트로 보내 폴리페르콘과 손잡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연합에 대항하게 하였다. 그리고 본인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하에 있던 페니키아를 직접 침공하여 티레를 포위했다. 1년간의 공성전 끝에 티레를 공략하고 페니키아를 확보한 뒤, 페니키아의 방어를 장남 데메트리오스에게 맡긴 후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에게 맡겨진 병력은 10,000명의 그리스 용병대, 2,000명의 마케도니아인, 5,000명의 리키아인과 팜필리아인, 4,000명의 페르시아 궁수와 투석병, 5,000명의 기병과 43마리의 코키리였다고 한다. 기원전 312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가 소아시아로 떠나 있는 틈을 타 페니키아로 쳐들어갔다. 데메트리오스는 즉각 응전에 나섰지만, 가자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의 부하 중 5천 명이 전사했고, 8천 명이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이송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전장을 탈출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했고, 데메트리오스는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는 본부를 트리폴리로 옮긴 뒤, 그곳에서 패잔병들을 재집결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킬리스를 파견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첩자로부터 킬리스가 별다른 경계 태세 없이 한 지점에 진을 쳤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가벼운 무장을 한 병사들을 이끌고 새벽에 적진으로 접근하여 이른 아침에 진영을 습격해 크게 승리했고 킬리스를 사로잡았다. 얼마 후 구원군을 이끌고 아들과 합세한 안티고노스는 가자 전투의 책임을 묻기 보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수습한 뒤 적절한 반격을 가해 적장을 사로잡은 것을 칭찬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가 시리아에 당도하자 점령지를 대거 약탈한 뒤 이집트로 돌아갔다. 그 후 데메트리오스는 아랍인들에 대항하는 원정을 맡았지만, 셀레우코스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병력을 받아서 바빌론으로 돌아가서 세력을 구축했다는 급보를 들은 아버지에게 소환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격퇴하기 위해 데메트리오스에게 5,000명의 마케도니아인과 10,000명의 용병, 4,000명의 기병을 맡겨 바빌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안티고노스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하고 기원전 309년 셀레우코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기원전 307년,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로부터 250척의 배와 5,000 달란트를 받고 그리스를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출정하였다. 이 함대의 첫번째 목표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디미트리오스 팔레리오스가 10년간 군사령관을 맡은 아테네였다. 아테네에 주둔한 수비대는 함대가 처음 접근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라고 오판하여 해안가에 접근하도록 허용했다. 그 덕분에 무사히 상륙한 그는 피레우스 항을 맹렬히 공격하여 하루만에 공략하고, 뒤이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아테네로 쳐들어갔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성벽 일부가 허물어지자 수비대는 항복했고, 디오니시오스 팔리레오스는 체포되었다. 한편 아테네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고 있던 데메트리오스 팔레로스는 테베로 탈출한 뒤 다시 이집트로 달아났다.
그는 아테네가 15년 전 라미아 전쟁에서 패한 뒤 잃어버렸던 민주정을 회복하게 해주고 수비대를 주둔하지 않기로 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에 감격하여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의 황금 동상을 건립하고 그를 해방자라고 칭송했다. 이후 기원전 306년 키프로스 탈환 작전에 착수하여 수차례 승전을 거두고 키프로스의 중심지인 살라미스를 포위했다. 수비대 지휘관 메넬라오스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프톨레마이오스는 140척의 군함에 10,000명의 보병을 태운 200척 이상의 수송선을 출격시켜 데메트리오스를 치게 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일부 병력으로 살라미스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친히 108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이집트에서 몰려온 적 함대와 격돌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는 적 함대가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걸 알고 자연 항구를 형성한 곶 뒤에 자신의 함대를 숨겨뒀다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급습했다고 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디아도코이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친히 중앙 대열을 이끌었고, 데메트리오스는 좌익 대열을 이끌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적의 중앙에 집중 공격을 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가 선두에서 앞장서서 맹렬한 돌격을 가한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함대의 우익이 궤멸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광경을 보고 패배를 인정하고 이집트로 패주했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살라미스 항구를 봉쇄하던 적 함선 10척을 돌파하고 외해로 나왔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미 패주한 걸 보고 항구로 돌아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이날 전함 40척과 수송선 100여 척이 포획되었으며 80척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 데메트리오스 함대의 손실은 20척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후 메넬라오스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하면서, 키프로스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안티고노스는 아들의 승전 소식을 듣고, 이제 이집트를 공격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8만 이상의 보병, 8천 명의 기병 83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시리아를 통과하여 이집트로 진군했다. 여기에 데메트리오스는 150척의 군함과 1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함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아서 해상에서 육군과 나란히 진군했다. 그러나 육군은 늪으로 가득 찬 험난한 지형에 직면해야 했고, 함대는 악천후로 인해 많은 배가 실종되었다. 그래도 나일강 인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안티고노스의 용병들을 돈으로 유인하면서 수많은 탈영병이 발생했다. 안티고노스는 많은 탈영병을 죽이고 일부를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이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군하기로 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붙은 로도스를 포위하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까지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보낸 지원군에게 막혀 결국 로도스를 공략하지 못했다. 다만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칠 때만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안티고노스의 패권을 인정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이 일로 인해 "공성자"라는 뜻의 폴리오르케테스(Poliorcetes)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로도스인들은 데메트리오스가 떠난 뒤 헬레폴리스를 팔아서 챙긴 수익금을 사용하여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로도스의 거상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동상은 불행히도 기원전 228년 또는 226년에 지진으로 무너졌다.
기원전 304년,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돌아와서 아테네를 포위 공격하던 카산드로스를 격파했고, 뒤이어 코린토스 전역을 탈환하여 카산드로스를 마케도니아로 내쫓았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아테네에 입성한 뒤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행각을 보였고, 아테네인들은 차츰 카산드로스가 나았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한 번은 '잘생긴 데모클레스'라는 어린 소년을 목욕탕에서 강제로 범하려 하자, 소년은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뛰어들어가 죽어버렸다. 아테네인들은 소년의 죽음을 자신과 조국의 명예를 지킨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시민에게 부과된 50달란트의 벌금을 면제해줌으로써 그 시민의 아들인 클레에네토스의 호의를 얻으려 했으며, 아테네인들에게 250달란트를 받아낸 뒤 창녀 라미아 및 다른 창녀들에게 비누와 화장품을 사주었다고 한다.
한편, 카산드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전부 귀속시킨 뒤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안티고노스에게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아시아의 셀레우코스에게 연합을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바로 옆에 있던 리시마코스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합류하였고, 카산드로스가 테실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상대하는 사이 자신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소아시아를 전격 침공했다. 얼마 후 사절단을 접견한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기로 하고, 시리아의 시논을 침공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인도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사절단을 접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원전 302년 소아시아를 침공한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안티고니아에서 축제를 즐기는 틈을 타 플라펠루스 장군의 활약을 앞세워 많은 영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안티고노스는 즉시 대군을 일으켜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조우해 곧바로 결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리시마코스는 결전을 미뤘고, 그 사이에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날씨가 풀릴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동계 숙영에 들어갔다. 그 사이 인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셀레우코스 1세는 카산드로스가 보낸 사절단으로부터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셀레우코스의 대군이 소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전갈을 보내 당장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에페수스에 상륙한 뒤, 리시마코스가 점령한 해안의 많은 도시들을 순식간에 탈환하고 셀라에나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헤라클레아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후 양 측은 디아도코이 전쟁 사상 최대의 격전을 벌이니, 이른바 입소스 전투였다. 그는 이 전투에서 우익 기병대 5천 명을 직접 이끌었는데, 그중 1,500명은 그의 직속 기병대였다. 전투가 개시되자, 휘하 기병대에게 상대편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안티고노스군의 우익 기병대는 쏜살같이 돌진하였고, 연합군 좌익 기병대는 빠르게 압도당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도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한편, 전장 한 가운데에서 양측의 보병대가 격렬하게 맞붙었다. 양측 모두 잘 무장되었고 전투 기술이 잘 갖춰져 있었기에, 전황은 한 쪽으로 쉽게 기울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안티고노스의 보병대가 상대를 천천히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때 데메트리오스가 추격을 중단한 뒤 적의 보병대의 후방을 노리려 했다. 그러자 셀레우코스가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사전에 예비대로 두었던 300마리의 전투 코끼리들을 파견해 데메트리오스의 기병대를 덮치게 했다. 그렇게 많은 코끼리들과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던 군마들은 겁을 집어먹었고, 데메트리오스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셀레우코스는 뒤이어 경기병대를 친히 이끌고 기병대가 모두 출격하는 바람에 텅 비어버린 안티고노스 군의 우익 쪽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적 팔랑크스 진형의 오른쪽 측면으로 돌아간 뒤, 화살비를 퍼부었다.
상황이 이와 같이 되자, 안티고노스의 병사들 중 일부가 항복했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의 구원을 기대하며 전장에서 끝까지 싸웠으나, 데메트리오스는 코끼리들을 끝내 뚫지 못했다. 결국 안티고노스는 투창 세례를 받고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에페소스에서 5,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을 수습한 후 그리스로 돌아가 항전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일전에 자신을 구원자라고 칭송했던 아테네는 이번엔 항구에 들어오는 걸 거부했다. 결국 아테네를 포기하고 코린트 해협으로 항해했지만, 얼마 안 가 그리스에 남겨져 있던 모든 수비대가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오랜 동료들이 다른 왕들에게 귀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영토는 테살리아, 그리스 일부, 그리고 키프로스 섬뿐이었다.
그야말로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세력 재건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우선 기원전 299년 자신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셀레우코스의 후처로 들이게 하였고,[1] 그 대가로 킬리키아를 받아냈다. 한편 기원전 296년 참주 라카레스가 아테네에서 폭정을 일삼자, 그는 아테네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세를 개시해 2년간의 전투 끝에 기원전 294년 아테네를 공략했다. 주민들은 보복당할까 봐 공포에 떨었지만, 그는 복수 대신 관용을 베풀었다. 이후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4세의 공격을 물리치고 스파르타를 압박해 들어갔다.
이 무렵, 마케도니아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안티파트로스 1세가 어머니 테살로니케를 죽이고 동생이자 공동 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5세를 추방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데메트리오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부 해안과 암브리아, 아카르나니아, 암필로키아 속주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행로를 스파르타에서 마케도니아로 돌려서 안티파트로스를 몰아내고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5세는 그를 겉으로는 환영했지만 내심 껄끄럽게 여기며 얼른 내쫓을 생각을 했다. 이를 짐작한 데메트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연회 자리에 초청한 뒤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 데메트리오스가 떠날 채비를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테살리아까지 배웅했다. 여기서 열린 연회자리에 들어선 그는 경비병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가 시종드는 친구들과 함께 암살당했다고 한다. 한편 안티파트로스는 트라키아로 도망쳤지만 리시마코스에게 살해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케도니아를 장악한 그는 마케도니아 국왕에 즉위했고, 테살리아 남부의 마그네시아에 새로운 수도인 데메트리아스를 건설했다.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베를 두 번 봉쇄한 끝에 항복을 받아냈고, 피로스 1세의 전처인 라나사와 결혼하면서, 그 대가로 코르푸를 얻었다.
이리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확보한 뒤, 그는 아버지가 한때 통치했던 아시아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이루기 위해 500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를 건설하여 장차 소아시아로 쳐들어갈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가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자, 그 주변의 통치자들인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피로스는 불안감을 느꼈고, 이내 함께 힘을 합쳐 그를 치기로 하였다. 기원전 288년 적군이 사방에서 쳐들어오자,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달아나 테살리아 남부에서 버텼다. 기원전 287년 프톨레마이오스와 평화 협정을 맺은 뒤, 그리스와 테살리아를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맡기고 소아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초반에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고 킬리키아를 장악했지만, 하필이면 기근과 역병이 도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고,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마련하기도 어려워졌다.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의 군대가 급료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다는 걸 눈치채고, 사람을 몰래 보내 거액의 돈을 줄 테니 자기 편에 서라고 꼬드겼다. 이후 킬리키아에 도착한 그는 데메트리오스의 군대 앞에 투구를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고, 장병들은 곧바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에게 붙잡힌 뒤 아파메이아에 수감되었다. 셀레우코스의 장인 또는 사돈이 되는 사람이었기에(그 이유는 전술했듯이 장녀 스트라토니케가 셀레우코스와 안티오코스 둘 모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나름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몇년간 유폐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283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전달된 뒤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