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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45:35

김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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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서
金景瑞
파일:김경서 영정.jpg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1564년
조선 평안도 용강군 옥도리
(現 평안남도 남포특별시 룡강군 옥도리)
사망 1624년 (향년 60세)
후금
성보(聖甫)
초명 응서(應瑞)
시호 양의(襄毅)
본관 김해 김씨
부모 부친 - 김인룡(金仁龍), 모친 - 나주 정씨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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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신. 원래 이름은 김응서였으나 왜란 이후 김경서로 개명했다.

2. 생애

용강 사람으로 1583년 무과에 급제해 1588년(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해 8월 조방장으로 평양성 전투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었다.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적을 소탕하였다. 협상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를 만난 적이 있었고 1595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고니시 의 휘하 요시라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시라의 역정보에 넘어가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불복해 별장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울산성 전투에도 참전했다.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와 북로방어사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요청을 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원수  강홍립과 함께 출전하여 사로군 지휘관 중 한 명인 유정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명나라군 총사령관 양호와 유정이 이전부터 사이가 험악해 유정이 사천지역의 정예병을 보내달라 요청했으나 거부당해 겨우 수천의 병력정도 밖에 없고 대포도 부족해 조총병이 절대 다수였던 1만 8000명에 달하는 조선의 병력에 의존했다.

이듬해 심하에서의 전초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부차벌판까지 진군했으나 이미 4로군 중 2개군이 각개격파 당한 상황이였기에 양호는 퇴각 신호를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하고 모래바람, 기병을 활용한 후금에게 각개격파에서 패하였다. 게다가 명군과 조선군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명군은 유정을 포함해 전멸했고 조선군은 좌영장인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을 포함한 8천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강홍립이 남은 부대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

후금에게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강홍립과 달리 김경서는 적극적으로 비밀리에 적정을 기록하여 고국에 보내려 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되었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