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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관련 정보/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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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표
2.1. 본편 이전2.2. 본편
2.2.1. 기원전 403~4002.2.2. 기원전 399~3902.2.3. 기원전 389~3802.2.4. 기원전 379~3702.2.5. 기원전 369~3602.2.6. 기원전 359~3502.2.7. 기원전 349~3402.2.8. 기원전 339~3302.2.9. 기원전 329~3202.2.10. 기원전 319~3102.2.11. 기원전 309~3002.2.12. 기원전 299~2902.2.13. 기원전 289~2802.2.14. 기원전 279~2702.2.15. 후일담

1. 개요

여러 해에 걸친 사건의 경우, 시작 연도를 기준으로 연표 세부항목에 분류하였다.

2. 연표

2.1. 본편 이전

발생 연도 명칭 관련국 개요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6세기
조선비사(朝鮮秘史) 조선(朝鮮) 작중 조선 국군(國君)들이 '자성 기씨'가 된 배경 및 그들의 '청동 옥좌'에 얽힌 배경 스토리

2.2. 본편

2.2.1. 기원전 403~400

발생 연도 명칭 관련국 개요
기원전 403년 주(周)의 삼진분립(三晉分立) 공인 주(周), 진(晉), 조(趙), 위(魏), 한(韓) 진(晉) -> 조(趙), 위(魏), 한(韓)
주(周) 천자가 진(晉)이 조(趙), 위(魏), 한(韓) 3국으로 나뉘는 것을 공인하고 3국 군주들을 제후로 인정.
기원전 403년 고 전투(顧戰鬪)[1] 조(趙), 연(燕)
vs 중산(中山)
조(趙), 연(燕) 연합의 승리.[2]
위(魏)에 망했다 복국한 중산(中山)이 다시 패망. 그러나 중산의 국군(國君)인 환공은 6백여 병력과 함께 도주에 성공해 재차 기회를 노림.
기원전 403년 송(宋)의 천도 송(宋) 초(楚), 위(魏), 한(韓)에 시달리던 송(宋)이 상구(商丘)[3]에서 팽성(彭城)[4]으로 천도.
기원전 403년 1차 서하 전투(一次西河戰鬪)[5] 의거(義渠)
vs 위(魏)
위(魏)의 대승.[6]
위의 서진을 경계하던 진(秦)이 의거(義渠)를 부추겨 위의 서하군 지역을 공격하게 함. 명장 오기가 이끄는 위군이 일방적인 대승을 거둠. 이후 패주과정에서 흩어진 병력도 다수 발생해 의거군은 1/4 정도인 1만 5천여 명만을 수습함.
기원전 403년 1차 남정 전투(一次南鄭戰鬪)[7] 진(秦)
vs 촉(蜀)
촉(蜀)의 승리.[8]
1차 서하 전투로 인한 의거(義渠)와 위(魏)의 상호 소모로 여유가 생긴 진(秦)이 촉의 남정을 공격해 영토 확장을 시도하지만 실패. 이후 전투피해 이외 퇴각과정 등에서 추가 손실이 발생해 결과적으로 진군은 전 병력의 4할 정도인 1만 4천여 명만을 수습함.
기원전 402년 의거 전투(義渠戰鬪) 진(秦)
vs 의거(義渠)
진(秦)의 대승.
진이 1차 서하 전투의 대패로 후유증에 시달리던 의거(義渠)를 공격. 의거 군주를 사로잡고 의거를 진의 괴뢰국으로 만듦.
기원전 402년 제(齊)의 국성교체 제(齊) 강제(姜齊) -> 전제(田齊)
제태공 제강공으로부터 국군(國君) 지위를 찬탈. 제(齊)의 군주 가문이 강성 여씨(姜姓 呂氏)에서 규성 전씨(嬀姓 田氏)로 바뀜. 주(周) 천자가 노(魯)와 제의 대립구도를 장기화하려는 삼진(三晉)의 압박을 받고 이를 승인.

2.2.2. 기원전 399~390

발생 연도 명칭 관련국 개요
기원전 398년 난릉대전(蘭陵大戰) 월(越) 귀족파, 초(楚)
vs 월(越) 국왕파, 노(魯), 송(宋), 제(齊)
월(越), 노(魯), 송(宋), 제(齊) 4국 연합의 대승.[9]
월(越), 노(魯), 송(宋), 제(齊) 4국 연합군이 월 반란군의 지원을 받아 동진하려던 초(楚)군을 대파. 이후 4국은 초도왕을 사로잡아 북방의 벽지에 유폐.
기원전 398년 초(楚)의 천도 초(楚) 난릉대전 패배로 초(楚)의 지방통제력 상실. 기존 수도인 영성(郢城)[10]까지 위태로워짐. 이에 따라 초숙왕은 즉위하며 서쪽의 이릉(夷陵)[11]으로 천도.
기원전 397년 정한전쟁(鄭韓戰争) 정(鄭)
vs 한(韓), 조(趙), 위(魏)
한(韓), 조(趙), 위(魏) 삼진(三晉) 연합의 대역전승.[12]
내우외환이 겹친 한(韓)의 빈틈을 노린 정(鄭)의 공격. 정군은 한군을 대파하고 수도 양책을 점령, 한경후를 사망 위기에 빠뜨림. 이후 조(趙)군을 상대로도 선전하지만 위(魏)군을 이끌고 친정한 위문후에게 대패, 한이 양책을 탈환함.
기원전 396년 ~ 기원전 395년 연나라 정벌(燕國征伐) 조선(朝鮮), 중산(中山), 누번(樓煩)
vs 연(燕), 조(趙)
조선(朝鮮), 중산(中山), 누번(樓煩) 3자 연합의 승리.[13]
중산의 복국, 연의 멸망.
위문후의 사망으로 발생한 힘의 공백을 틈탄 중산의 복국 시도. 중산의 복국, 조선의 연 정벌 모두 성공하지만 이후 최강국 위(魏)의 외교적 개입. 조선이 중산과 결별 및 조, 위와 화친하는 댓가로 위는 주(周)에 주청해 조선후(朝鮮侯)의 작위 및 조선후가 기자(箕子)의 후손임을 공인받아 줌.
기원전 395년 촉의 북벌 촉(蜀), 광한강, 무도강
vs 환도, 면제
촉(蜀)의 승리.[14]
광한강, 무도강을 용병으로 삼은 촉의 북진. 촉군이 환도와 면제를 접수하는 동안 진 서부군 2만여 명은 해당 지역의 영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음. 촉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가 진이 제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본 광한강, 무도강은 촉에 신속, 촉은 일시에 촉 연맹이라 해도 될 정도로 세를 확장함. 진후혜공이 이에 위(魏)의 명장 오기를 상대하던 동부군의 일부를 서부로 돌리면서 그 판단력에 대한 불안감이 증가, 위(魏)에 볼모로 가 있던 공자 영사습[15]이 탈출해 진으로 몰래 복귀함.
기원전 394년 중산국멸망전(中山國滅亡戰) 조(趙), 위(魏)
vs 중산(中山), 누번(樓煩)
조(趙), 위(魏) 연합군의 승리.[16]
중산의 멸망.
연나라 정벌의 결과 복국한 중산에 대한 위무후의 재정복 결정. 중산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하지만 위, 조 양국 모두 조선의 배후 개입은 눈치채지 못하고 무관한 제(齊)를 의심함. 또한 위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조가 조선과 공모해 위의 뒷통수를 치려 하는 것을 위가 눈치채는데 실패하면서 이후 영수 전투의 발발에 영향을 미침.
기원전 394년 ~ 기원전 389년 1~6차 서하 약탈전(一-六次西河掠奪戰) 흉노(匈奴)
vs 위(魏)
위(魏)의 피로스의 승리.[17]
오기의 실각 및 공숙좌로의 대체, 위(魏)의 서진 일시중단, 위(魏)가 장성 축조에 들어감.
조선(朝鮮)의 사주로 인한 흉노의 서하군(西河郡) 약탈 시도. 양측은 서로 상대가 낸 대응책을 파훼하며 꾸준히 피해를 주고받음. 결국 기원전 389년, 오기의 후임으로 부임한 공숙좌가 흉노의 우대장을 죽이고 장성 착공에 들어가면서 위나라의 판정승으로 종결. 그러나 흉노를 사주한 진짜 흑막 조선은 같은 해 영수 전투로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함.
기원전 393년 산조 전투(酸棗戰鬪) 위(魏)vs 정(鄭) 위(魏)의 대승[18]
공숙좌가 정의 산조를 공략하고 중앙군을 대파하여 정의 세력 약화, 한의 하남령과 상당군 사이 연결로 약화
큰 공을 세운 공숙좌의 위나라 내부 위상 강화, 위무후가 흉노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오기 대신 공숙좌를 기용할 생각을 품음.
기원전 393년 진나라 반정(秦國反正) 진헌공(24대) vs 진후혜공 진헌공의 승리[19]
진영공(영성)의 아들인 진헌공이 영공 사후 나이가 어리단 이유로 위에서 인질생활을 하다 서장 균개의 도움을 얻어 진후혜공에게서 국군위를 빼앗고 그 가족들을 살해함. 빠른 시간 안에 국내를 장악하고 위에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진의 부국강병을 위한 노력을 시작.
기원전 393년 가정 전투(街亭戰鬪) 촉(蜀)vs 진(秦) 진(秦)의 승리[20]
진헌공의 반정을 틈타 촉이 진의 수도 옹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거점을 공격함(후대의 가정 근처)
수도 근방의 병력이 진헌공파였기에 진의 내분으로 인한 혼란은 최소화되었고, 길게 늘어지는 보급선으로 인해 촉이 장기전 수행 불가로 후퇴
진 내부의 안정화를 위해 진군은 추격 대신 피해복구를 선택하고 면제는 촉이 계속 점유, 촉과 연계했던 적도와 광한강은 동맹을 파기, 촉 내부 대진 주전론 득세.
기원전 391년 상채[21] 공략전(上蔡攻略戰) 위(魏) vs 초(楚) 위(魏)의 부분적 승리.[22]
무력확장을 국가적 기조로 내세운 위무후가 난릉대전의 패배 이후 지방통제력을 상실한 초나라의 상채 지방으로의 확장을 시도. 상채 주변 읍의 60%[23] 가량을 확보하지만, 나머지 40%는 위나라의 지배를 거부함. 결과적으로 위나라가 영토 일부 확장 및 상채 지역 주도권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지역 지배권의 온전한 확립에는 이르지 못했으므로 부분적 승리로 취급.
기원전 391년 상규 전투 1 1
기원전 391년 즉묵 토벌전 1 1
기원전 390년 조(趙)의 천도[24] 조(趙) 조나라가 중모(中牟)[25]에서 한단(邯鄲)[26]으로 천도함.
위(魏)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조는 위를 맹주로 한 기존의 위한조 삼진(三晉) 연합 체제를 깨고, 위가 월경지 형태로 점령한 옛 중산(中山) 방면으로의 확장을 노림. 이 과정에서 외교적으로는 물밑에서 조선과 손잡고 내부적으로는 한단으로 천도. 이유는 기존의 수도인 중모의 경우 위에 공격받을 경우 지나치게 다방면이 노출되어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
위는 조의 천도에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지만, 별다른 대응이나 조치 없이 그냥 넘어감.[27]
그 결과 기원전 389년 영수 전투의 발발로 이어짐.

2.2.3. 기원전 389~380

2.2.4. 기원전 379~370

2.2.5. 기원전 369~360

2.2.6. 기원전 359~350

2.2.7. 기원전 349~340

2.2.8. 기원전 339~330

2.2.9. 기원전 329~320

2.2.10. 기원전 319~310

2.2.11. 기원전 309~300


2.2.12. 기원전 299~290


2.2.13. 기원전 289~280

2.2.14. 기원전 279~270


2.2.15. 후일담


[1] 고(顧): 오늘날의 허베이성(河北省) 딩저우시(定州市). [2] 투입병력: 조군 3만 9천여 명, 연군 2만 7천여 명 / 중산군 1만여 명.
피해: 조군 극소수(1% 미만), 연군 7천 8백여 명(29%) / 중산군 3천 9백여 명(39%).
[3]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상추시(商丘市). [4] 오늘날의 장쑤성(江苏省) 쉬저우시(徐州市). [5] 서하군(西河郡): 오늘날의 산시성(섬서성)(陕西省) 웨이난시(渭南市) 화인(현급)시(华阴市) 이북, 옌안시(延安市) 이남, 황하(黃河) 이서, 뤄허(洛河, 과거의 낙수洛水) 이동 지역. [6] 투입병력: 의거군 6만 1천여 명 / 위군 6만 2천여 명.
피해: 의거군 2만 5천여 명(41%) / 위군 1천 9백여 명(3%).
[7] 남정(南鄭): 오늘날의 산시성(섬서성)(陕西省) 한중시(汉中市) 한타이구(汉台区). [8] 투입병력: 진군 3만 6천여 명, 촉군 1만 7천여 명.
피해: 진군 1만 2천 2백여 명(34%)/촉군 2천여 명(12%).
[9] 투입병력, 피해 상세는 항목 링크 참조. [10] 현재의 후베이성(湖北省) 징저우시(荊州市), 삼국지의 형주 강릉 일대 [11] 현재의 후베이성(湖北省) 이창시(宜昌市), 삼국지에선 이릉대전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 [12] 투입병력, 피해 상세는 항목 링크 참조. [13] 투입병력, 피해 상세는 항목 링크 참조. [14] 투입병력: 촉군 1만 9천여 명, 광한강군 4천여 명, 무도강군 4천여 명 / 환도군 5천여 명, 면제군 8천여 명
피해 미상.
[15] 훗날의 진헌공 [16] 투입병력, 피해 상세는 항목 링크 참조. [17] 투입병력, 피해 상세는 항목 링크 참조. [18] 투입병력: 위군 1만 2천여 명 / 정군 1만여 명(산조 수비군 7천, 지원군 3천)
피해: 위군 언급없음(미미한 수준) / 정군 1천 8백여 명(수비군의 26%)+@(지원군의 경우 상세 피해비율 판정 없이 그냥 와해되었다고 묘사됨.)
[19] 투입병력 및 피해 상세는 미상. [20] 투입병력: 촉 연합군 3만여 명 / 진군 3만 5천여 명
피해: 촉 연합군 4천 5백여 명(15%) / 진군 2천 5백여 명(7%)
[21]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주마뎬시(驻马店市) 샹차이현(上蔡县) 일대 [22] 투입병력 및 피해는 미상. [23] 전투로 점령 10% + 알아서 귀부 50% [24] 작중 연표에선 기원전 389년의 '위의 야읍 공략 결의.조조 연합의 중산령 침공결의' 항목에서 확인 가능 [25]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허비시(鹤壁市) 산청구(山城区) 일대 [26] 현재의 허베이성(河北省) 한단시(邯郸市) [27] 다소 걸리긴 하지만, 중모 수준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을 뿐, 한단 역시 위의 땅이자 명신 서문표가 담당 중인 업에 지척인 곳인데 조가 감히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오판한 결과. [28] 1차 팽성 전투, 2차 서하 전투를 포함 [29] =4차 서하 전투 [30] 1차 팽성 전투는 기원전 382년 노국멸망전의 일부 [31] 3차 수춘 전투 포함 [32] 3차 수춘 전투는 기원전 356년 1차 송나라 내전의 일부 [33] 4차 서하 전투 = 기원전 364년의 1차 서하대전 [34] =1차 완 전투 [35] 팽려택 전투 포함 [36] 2차 완 전투, 5차 수춘 전투 포함 [37] 5차 수춘 전투는 기원전 333년 초한송 전쟁의 일부 [38] 민지 전투 + 6차 서하 전투 + 석문산 전투 [39] 역사대로. 작중 연표에서 기원전 330년의 '알렉산드로스가 흉노를 죽였어..!' 항목에서 언급. [40] 3차 팽성 전투 포함 [41] 2차 농서 약탈전(옹현 전투) + 8차 서하 약탈전 [42] = 7차 서하 전투, 6차 서하 전투는 기원전 331년 진의 3면전쟁의 일부 [43] 무관 전투 + 상 전투 [44] 남전 전투 + 두현 전투 [45] 8차 수춘 전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