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1:00:07

종횡대전

종횡대전
縱橫大戰
Great War of Zongheng
시기 기원전 291년
장소 진나라령 관중일대
조선령 임치일대
원인 합횡장 초가 연종과의 결전을 위하여 합횡 가맹국의 여력을 총동원하여 관중과 임치에 대규모 병력을 보냄
교전국 조선朝鮮
진秦
한韓
촉蜀[1]
돌궐突厥
초楚
제齊
송宋
지휘관 조선 대사마 악의
조선 임치군수 염파
조선 진남장군 진개

진 우서장 사마착
진 좌서장 백기
진 대부 왕흘

한 장군 신차†

촉 장군 사리[2]

돌궐 상경[3] 안재
초 관중전선 총사령관 소수
초 무안군 경취
초 장군 항연
초 임치전선 총사령관 경리

제 맹상군 전문
제 장군 전단

송 대부 송유
병력 조선 관중방위군 5만5천
조선 임치방위군 3만6천[4]
조선 임치증원군 10만2천
진군 5만2천
진 옹현주둔군 9천
한군 3만
촉군 1만3천
돌궐군 5천

총합 30만2천
초 관중방면군 6만6천
초 임치방면군 4만6천
제군 6만6천
송군 2만2천

총합 22만 3천
피해 조선군 약 4만4천
진군 약 1만6천
한군 약 1만
촉군 약 3천

총합 약 7만 3천
초군 약 4만2천
제군 약 2만3천
송군 약 1만

총합 약 7만 5천
결과 합횡군 패배, 연종군 관중과 임치 방위 성공
영향 합횡붕괴 및 연종주도하의 천하 탄생

1. 개요2. 배경
2.1. 합횡의 사정
2.1.1. 초의 사정2.1.2. 송의 사정2.1.3. 제의 사정2.1.4. 촉의 사정
2.2. 연종의 사정
2.2.1. 진의 사정2.2.2. 조선의 사정2.2.3. 위와 한의 사정
2.3. 흉노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관중전선
3.1.1. 초의 진격과 진의 대응3.1.2. 남정에 도착한 관중침공군3.1.3. 조선과 돌궐의 진공3.1.4. 옹현전투3.1.5. 관중으로 모이는 연종군3.1.6. 흉노의 의거 침공3.1.7. 1차 위수전투3.1.8. 악의, 연종군 결속을 위하여 신차를 베다3.1.9. 경취, 소수에게 후퇴를 건의하다3.1.10. 2차 위수전투3.1.11. 연종군 이후 전략을 논하다3.1.12. 악의와 항연의 협상
3.2. 임치전선
3.2.1. 합횡군의 진격과 조선의 대응3.2.2. 합횡군 전략을 논하다3.2.3. 진남군 진격과 제군 오현점령3.2.4. 제북군 임치에 합류, 하간군의 능숙한 병력소집3.2.5. 진개 오현이 점령된 것을 보고 회군하다3.2.6. 염파 합횡군에 맞서 전략을 짜다3.2.7. 1차 치수전투3.2.8. 염파 각오를 다지다.3.2.9. 임치성 공방전(공성전)3.2.10. 임치성 공방전(야전)3.2.11. 조선의 반격3.2.12. 합횡측의 대응3.2.13. 2차 치수전투
3.3. 결과
4. 영향
4.1. 의거, 생존왕 지다.4.2. 제, 봄은 오지 않고4.3. 송, 굴러온 돌과 박힌 돌4.4. 한, 조선의 거수기가 되다.
4.4.1. 제발 저희 나라에게 장군감 좀 주세요, 잘해드릴게.
4.5. 흉노, 조돌강점기4.6. 돌궐, 일단 살리고 보자4.7. 촉, 약소국의 생존법4.8. 진, 피폐해진 나라사정4.9. 초,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4.10. 조선, 명실상부한 패권국 자리에 오르다.
4.10.1. 기설의 진노, 하기의 사직4.10.2.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조선의 관제
4.11. 위, 후계자를 논하다.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291년 연종과 합횡이 각각 관중과 임치에서 벌인 대전으로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중원열국이[5][6]참전하였다. 상구대전의 패전으로 위신이 손상된 초는 관중에서 격발된 내전에 엮이게 되자 이것을 기회삼아 연종과의 결전을 벌일 것을 결의하고, 대군을 일으켜 관중과 임치로의 양방향 공세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초나라가 보유한 모든 여력을 총동원하였고, 합횡 가맹국들 역시 온 국력을 끌어모아 참전하게 되었다. 한편 연종측 역시 관중의 내전과 초의 개입을 지켜보고 초가 다시금 북진할 것이라 예상하고 대응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조선을 필두로 한 연종 진영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합횡 국면은 하남대전의 합횡측 유일의 대승 이후 단 10년, 합횡 결성 당시 기준으로 15년 만에 종막을 맞고, 조선 일극의 연종 체제로 시대가 넘어간다고 할 수 있는 작중 대사건 중의 대사건이다.
한편으로 2차 중원대전 이후 이때까지 온 천하가 연거푸 싸우면서 형성된 피폐함은 이를 수습함에 있어 다수의 사건을 후일 야기하게 되었다.

2. 배경

2.1. 합횡의 사정

2차 중원대전 이래 큰 국면에서는 연패한 탓에 전체적으로 구성국 전부가 몰려있었고, 이는 합횡 진영 전체가 최후의 도박수[7]를 던지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2.1.1. 초의 사정

관중에서 벌어진 진나라 내전에 한중군수 장신이 단독으로 개입하여 진창을 점령하게 되자 초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상구대전의 여파로 손실이 상당한데[8] 관중내전에 개입함으로써 진나라와의 외교적 해결이 사실상 무산되어 자칫 다시 조선과의 충돌이 벌어질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초왕 웅횡은 중신들을 소집하고 이에 대한 대책논의에 들어갔다.[9] 웅횡은 이번일로 연종과의 충돌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할지 아니면 기세를 이어나가 전쟁을 벌일것인지 중신들에게 질의하였다. 대부분의 중신들은 상구대전의 패전을 이유로 평화적 해결을 선호하였지만, 오직 소씨의 소수와 소서만이 전쟁을 선택하였다.[10]
경취는 평소 외교적 해결을 선호하던 소씨가 전쟁을 주장하는 것에 의아해하면서 이유를 묻자, 소서는 이대로 평화적 해결을 택할 시 그동안 관중에서 초를 도와줬던 인민들에게 무엇이라 설명해야 하냐며, 당장은 이득일지 모르지만 천하국가와 인민들에게 신용을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대국을 대국으로 만드는 것은 그 땅의 크기도 아니요, 그 가진 바 부도 아니다.
바로 대국다운 책임감, 대국다운 자세가 바로 그 나라를 대국으로 만드는 것이야!
이런 소서의 말에 영윤 경리와 경취가 마음을 돌려 전쟁지지측으로 돌아서 동률이 되자 사실상의 최종 결정권을 쥐게 된 채 지켜보던 초왕 웅횡 역시 단호하게 전쟁을 결의하였다. 웅횡은 제와 송 그리고 동초[11]의 여력을 모아 임치방면을 공격하고 나머지 남양과 강한의 여력을 관중에 쏟아부어 대국 초의 힘을 천하에 보여주겠다고 선언하자 모든 중신들이 환호하며 찬성하고 초나라는 거국적 전쟁준비에 임하였다.[12]

2.1.2. 송의 사정

초나라는 송나라에게 임치회복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직전 상구대전에서 적잖이 피해를 본 송나라[13]는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송나라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초왕 웅횡은 대노하며, 다시금 송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재촉하였다. 이에 송왕 연홍옥도 발끈하며, 송나라를 지나지 않고 임치로 향할 수 있으면 향해보라며 베짱을 부렸다. 결국 양측은 타협[14]하여 송도 참전하는 대신 어느정도 사정을 봐주어 동원할 군사 수량을 줄여주었다. 송은 연홍옥의 측근인 평민 출신 대부 송유에게 2만2천의 군사를 맡기어 임치로 향하게 하였다.

2.1.3. 제의 사정

반면 제나라는 초가 작정하고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사실을 듣고서는 가능성이 있다 여겨 마찬가지로 온 국가의 여력을 이 결전에 쏟아붇기로 결정하였다. 상구대전이라는 피해가 있었음에도[15] 도합 6만6천이라는 대병을 소집하고 그 총사령관으로 맹상군 전문을, 부장으로 대조선 전쟁에서 맹활약한 장군 전단을 딸려 보냈다.[16]

2.1.4. 촉의 사정

한편 촉나라는 관중전선으로 향할 초군의 지원하라는 초나라의 요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재상 레이하의 실각 및 유배 이래 여태껏 초나라에게 끌려가며 각종 물자와 인력을 지원하였지만, 정작 초나라가 촉에 해 주는 것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었기에 촉 조정은 불만이 쌓여갔었고, 이윽고 이번 요청으로 크게 폭발하였다. 결국 촉은 이번 전쟁에서 초의 뒤통수를 치기로 결심하고 은밀히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조만간 초가 대병을 이끌고 관중을 노릴 것이라는 고급정보를 보낸다.

2.2. 연종의 사정

분명 큰 국면에서는 연전연승이라 할 수 있는 연종진영이었으나 형성된 과정 상 그 승리의 지분은 결국 맹주인 조선의 것이 절대다수였고, 그 외 구성국 각각은 이렇다 할 큰 성과가 없었으며 도리어 새로운 위기 등으로 이어짐을 야기하였다.
이 양상은 여기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조선이 이를 합횡의 예측 이상으로 능히 감당하였을 뿐이었다.

2.2.1. 진의 사정

친초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내전의 결과는 진조정에 좋지 않게 돌아왔다. 동부는 백기와 왕흘의 활약으로 제압에 성공하였지만, 서부지역은 생각지도 못한 초나라의 개입으로 진창과 그 인근지역이 점령당하고 미현 역시 함락 위기에 처하였다. 서부지역이 심상치 않자 영탕은 동부지역을 제압한 백기의 군대를 급히 불러들여 서부지역에 투입하였지만, 초나라의 장신과 항연의 활약으로 이 병력마저 전멸할 위기에 처하였다. 천운으로 장신의 초나라 군이 급히 내전에 개입하여 장기전이 힘든 상황이었기에 결과적으로 미현은 지켜내었으나, 진창이 초나라에게 함락되었기에 관중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진조정은 즉시 연종장인 조선과 위, 한에도 도움을 요청하였다.[17]

2.2.2. 조선의 사정

조선은 상구대전의 승전이 채 식기도 전에 초가 진나라 내전에 개입하여 진창을 점령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초나라가 이대로 진창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조만간 다시 관중경략에 나설것이라 여기고 대책 논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사마대장군 양수는 이번 파병의 목표는 초나라를 선제적으로 공격할지 아니면 초나라가 침공시 이를 요격할 것인지 정해 달라고 하였고, 기설은 고민 끝에 동맹국들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초나라가 공격시 이를 요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 맞게 전술수립에 들어갔다.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대사마 악의를 총대장으로 삼아서 5만5천의 군사를 진나라 위기시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논의는 그렇게 종결되었지만, 양수는 전선이 관중뿐만이 아니라 임치에서도 형설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하간군과 제북 지역 담당자들에게 제의 침공을 대비하여 유사시 병력동원에 차질이 없도록 권고하였다.

2.2.3. 위와 한의 사정

진의 지원요청에 연종국인 위와 한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2차 중원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합횡 진영의 양대 축이었다가 진나라를 기만하고 한나라를 괄시한 끝에 몰락하여 반강제로 연종의 시작 구성원이 된 위나라는 상구대전 당시부터 잔존 강역인 하남의 피폐도로 인하여 고작해야 4천명이 조선군의 의도치 않게 부재한 보급로 경비를 대신 맡는 것에 그쳤다.
이 사정은 얼마 되지도 않아 뒤이은 대전이었던 이 때에도 필연적으로 그다지 개선되지 못하여, 하남을 경유해 관중 전선을 지원해야 할 조선에게 도로사정만으로도 곤경을 줄 지경이었다. 그나마 길은 할 수 있는 한 신속히 터주었지만, 위나라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상방 망묘가 상구대전에서의 참전과 직접적인 전선이 되지 못함을 이유로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다.
반면 한은 군사를 보낼테니 대신 평여를 달라고 요청하였다.[18] 조선조정은 한의 거래를 받아들였고, 한조정은 장군 신차에게 3만의 병력을[19] 맡기어 진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2.3. 흉노의 사정

2차 중원대전에서부터 암암리에 조선을 견제하고 있던 흉노[20]는 조선의 기미부주 지역들에서 들려온 대대적인 전쟁준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대로는 조선의 덩치에 깔려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던 흉노는 이 소식을 듣고 우선 자신들의 체급을 불리기 위하여 인근의 소국 의거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21]

3. 전투의 전개

합횡측, 그 중에서도 맹주인 초나라의 전략에 의해 이 대전은 완전히 두 개의 전역으로 나뉜 채 전개되었다.
따라서 양 쪽에 힘을 쏟는 초나라 외에도 합횡의 구성국들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내다 시피 하였고, 연종 측도 이에 맞대응해야 하였으므로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여력을 맞춰 밀어넣음으로써 일단 승패와 무관하게 양쪽의 부담은 그 누가 보더라도 아득히 심해지게 되었다.

3.1. 관중전선

3.1.1. 초의 진격과 진의 대응

은밀히 촉에서 보낸 밀정이 초의 관중진공을 알리자 진조정은 대책논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마착은 촉이 보낸준 정보가 거짓일수도 있다고 신중론을 펼쳤고, 진왕 영탕도 그의견에 동의하였지만 초의 대군이 정말로 진격하였다면 못해도 남정인근에서는 감지되었을 것이라 보고 아직 초군이 관중에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릴것이니 그사이 진창을 공략할 수 있다고 여겼다. 영탕의 진창성 공략방안에 사마착이 무도쪽으로 올 수 있다고 염려하였지만, 백기는 그럴가능성은 적고, 남정을 거쳐 가야 하니 연락을 받은 돌궐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백기는 그보다 진창공략이 지지부진 하여 진군이 앞뒤로 포위될수도 있음을 염려하였다. 결국 영탕은 진창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병력 5만2천을 동원하여 백기를 주장으로 삼고 그 부관으로 사마착의 손녀 사마근을 임명하여 보좌하게 하였다.
백기가 진창성 공략을 준비하던 도중 남정방면을 감시하고 있던 진의 척후가 초의 대군이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백기에게 알렸다. 백기는 자칫 진창성에 아군이 포위될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고 진창공략을 미루었다.[22] 그러나 이 결정에 영탕은 크게 노하며 백기를 질책하고, 주장 자리에서 해임하고 사마착을 임명하였다.[23] 그리고 조선과 더불어, 원군을 약속한 한과 돌궐에게도 사신을 보냈다.

3.1.2. 남정에 도착한 관중침공군

남정에 도착한 초의 관중침공군은 관중으로 향하기 전 진격로를 정하기 위하여 회의에 들어갔다. 남정에서 관중으로 향하는 길은 각기 진창, 포야, 기산 세가지였다. 경취는 진창성에 주둔중인 항연을[24] 조공으로 삼고 자신들이 주공으로 포야도를 거쳐 관중으로 향하기로 결정하였다.

3.1.3. 조선과 돌궐의 진공

진의 사신을 통해서 초의 대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게된 경현군 조승은 급히 한단에 있는 대사마 악의에게 초군이 진격했음을 알리면서 분수, 상당, 태원, 한단의 각 군수들에게도 조선군의 진격에 차질없이 준비하도록 권고하였다. 마찬가지로 초군의 진격 소식을 들은 돌궐 역시 맹약에 따라서 준비해놓은 정예 궁기병 5천을 안재[25]에게 맡겨서 출격하도록하였다.

3.1.4. 옹현전투

경취에게서 본대의 움직임에 맞춰서 옹을 치라는 명령을 받은 항연이었지만, 진나라가 진창을 공격하려다 돌아간 사실을 통하여 진군이 다른 신경 쓸 일이 생겼거나, 진창보다는 미현 쪽에 주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여겨서 독단적으로 옹현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창의 항연이 움직이자 사마착 또한 본대에서 1만5천을 나누어 왕흘에게 주고 옹현의 구원을 명하였으나 항연이 지휘하는 초군의 기동력에 초군이 한발 앞서 옹현에 도달하였다.
옹현에 도착한 항연의 초군은 성에 맹공을 가하였고, 옹현 수비군이 저항을 해보지만 항연의 지휘에 속수무책이었다. 생각보다 성의 저항이 미미한것에 항연은 쉽게 옹현을 접수할 수 있을 것이라 미소를 짓는순간 초군의 서쪽에서 돌궐이 기병대가 도착하였다. 돌궐군 지휘관 안재는 성이 함락 직전인것을 보고 돌궐군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돌궐 궁기의 화살과 돌격에 초군의 1할이 전사하였고, 진형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자 항연은 경악하며[26] 옹현의 포위를 풀고 진창으로 퇴각하였다. 안재의 부관이 물러나는 초군을 추격할 것인지 묻자 안재는 무리하게 싸울 필요가 없다며 추격하지 않았다.[27] 그렇게 관중 방면의 첫번째 전투인 옹현전투는 연종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사마착의 명령으로 옹현의 구원을 위해서 파견된 왕흘은 초군이 옹현에서 물러날 때 즈음 도착하였고, 후퇴하는 초군을 추격하였지만 후퇴하는 초군의 기동력이 더 높아서 추격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28] 왕흘은 옹현에서 돌궐군 지휘관 안재와 만나는데 안재가 중원식 관제에 익숙지 않아 자신을 하대부[29]라 소개하자 자신은 중대부라고 뻗대었다. 그러나 도중 무언가 이상함[30]을 느낀 안재의 정정으로 왕흘이 황급히 사죄하였지만, 안재는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 여겨 관대히 넘어간다.
옹현에서 승전보를 받아본 사마착은 왕흘에게 돌궐과 연계하여 진창방면의 초군을 견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3.1.5. 관중으로 모이는 연종군

관중으로 향하는 조선군의 집결속도가 지지부진 하였는데, 원인은 바로 생각보다 피폐해진 하동지역에 있었다. 지난 2차 중원대전의 여파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흉년까지 찾아와 조선군의 진격시 물자를 보급해주는데 차질을 빚은 것이었다. 위의 사정을 전해들은 악의는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다며, 위나라 관리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늦어진 만큼 서둘러 관중으로 향하기 위하여 진격을 재촉하였다.
한편 한나라 원군은 남전을 통과하여 위수를 넘어가 위수 북안에 있을 진나라 본대와 합류하려 하였다.

3.1.6. 흉노의 의거 침공

의거를 노리고 있던 흉노는 진군과 조선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규모 병력이 관중으로 향하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흉노는 진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의거의 무도함을 규탄하며 흉노는 무도한 의거를 응징하기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니 오해말라고 전달한다.[31] 영탕은 갑작스러운 흉노의 선언에 당황하며 멸국만은 봐달라고 은근히 부탁해보지만 사신은 딱 잘라 거절하며 의거는 멸국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초나라의 공격을 막기도 바빴던 영탕은 한숨을 쉬면서 이를 용인하였고, 진나라의 허락을 받자마자 준비하고있던 흉노의 대군이 의거로 진격했다. 흉노 국경 인근의 부족들이 흉노의 공격에 쓸려나가자 의거는 다급히 진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이미 흉노와 사전 밀약이 있었고, 사실이 그랬던지라 영탕은 초의 대군이 쳐들어와 여유가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의거왕이 인망이 있었는지 왕의 원군요청에 각지에서 원군이 몰려왔고, 이내 의거성에서 공방전이 펼쳐졌다. 흉노의 대군이 의거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지만, 의거성 인근은 산악지형이었고 기병중심의 흉노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었기에 의거는 수성하며 버티기만 하며 공격측인 흉노는 물자부족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지리한 공방전에서 의거성의 깃발은 바뀌지 않았고 흉노는 후퇴하면서 공방전은 의거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막판에 흉노가 퇴각하면서 비어있는 각 지역을 약탈한 탓에 쌍방 모두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3.1.7. 1차 위수전투

위수를 넘어서 도착한 한군이었지만 도중 정보전달에 착오가 있던 탓에 진군은 이미 위수를 넘어 남안에 있는 상황이었다. 사마착은 한군에게 조선군이 하수를 넘어서 진격중이니 급히 다시 위수 남안으로 와달라고 요청하였고, 신차는 다시 군사를 몰아 건너간 위수를 재차 도하하여 사마착이 있는 남안으로 향하였다. 또한 위와 같은 해프닝이 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군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남안으로 향해달라고 전달하였다.
진군과 한군이 남안에 합류하여 조선군을 기다리는 사이 초군이 먼저 남안에 도착하였다. 아직 조선군이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경취는 각개격파를 노렸고 양군은 전투에 돌입하였다. 비록 양군의 숫자는 길항이었지만, 한군은 징집한 농민들에게 창만 쥐어준 수준이었기에 경취가 연합군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려서 이내 진한 연합군의 진형이 무너지고 초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려던 차였다.

그러나 직전 동쪽에서 급행하여 달려오는 조선군을 발견하였고 경취는 자칫 조선군에게 측면을 내 줄 수도 있다고 여겨 무너지는 진한연합군을 놔두고 남쪽[32]으로 후퇴하였다. 증원으로 달려온 조선군 지휘관 악의는 물러나는 초군을 두고 먼저 무너지려는 진한연합군을 수습하여 관중은 대치국면으로 전환되었다.

3.1.8. 악의, 연종군 결속을 위하여 신차를 베다

간신히 초군을 물러나게 한 연종군은 다음 싸움을 위한 재정비에 들어갔다.
문제는 한나라군을 지휘하는 신차가 이 이상의 싸움은 무리라면서 후방으로 물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동석하고 있던 사마착이 신차의 발언에 분노하였지만, 신차는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서 다음 싸움에 병사들이 전열을 제대로 갖출수 없음을 이유로 들며 출전을 거부했다.
악의는 신차의 해명에 일개 농민 자경단만도 못한 한군을 데리고 싸우기보다는 전후 외교관계를 생각하여 신차에게 이후 전공에서 한군은 제외하겠다는 조건을 허락하면 한군을 후방으로 돌리겠다고 답변하였다. 악의의 말에 신차는 앞의 전투에서 1만이상이 죽거나 다쳤는데 전공에서 제외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반박했지만 사마착은 이전 전투에서 한군은 도움은 커녕 짐만 되었는데 전공이 왠말이나며 비아냥거렸다. 사마착의 비아냥에 신차도 분격하여 이러한 대접을 받을 바에야 전군을 이끌고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악의는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동맹군간의 분열은 좋지 않겠다고 여겨 신차를 지금 관중에서 나가면 한나라의 연종 탈퇴선언으로 알겠으며 이 일을 모두 조선왕에게 보고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럼에도 신차는 노기를 거두지않고 더 화를 내며 이와같은 일을 반드시 한왕께 보고하겠다고 하자, 결국 분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악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신차를 초와 내통한 배신자로 몰아세웠고 악의의 숨은 뜻을 알아챈 사마착 또한 이에 응하여 신차가 내통해 앞선 전투에서 졌다고 몰아세웠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변화에 당황한 신차에게 악의는 문답무용으로 검을 휘둘러 신차를 참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조선군에게 명령을 내려 한군을 포위. 신차가 초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한군을 무장해제시키고 한군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33][34]
한군의 문제가 정리되자 악의는 사마착과 앞으로 전투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악의는 조선군 5만5천과 남은 진군 2만3천이면 위수 남안에 주둔중인 초군보다 병력수에서 앞서고 옹현의 진군과 돌궐철기가 진창의 초군을 견제해주면 후방도 안전하니 이대로 결전을 치르자 하였고 사마착도 이견은 없다면서 동의하였다.[35]

3.1.9. 경취, 소수에게 후퇴를 건의하다

위수 남안에 진을 친 초군 진영에서는 경취는 진창의 항연이 옹현으로 진공에 실패하였고, 한군이 뒤로 물러났다는 첩보를 듣게된다. 한군이 후방으로 물러났지만, 대신 한군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예군인 조선군이 더해지고 병력도 조선과 진의 연합이 2~3만정도 더 많았다. 경취는 이 이상의 싸움은 초에 득이 되지 않다고 여겨 총사령관인 소수에게 연종과의 협상과 철군을 권하였다. 그러나 소수는 명분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지금 상황에서 전쟁을 그만두고 협상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경취에게 남은 병력으로 연종군의 진공을 요격하라고 요구하였고, 경취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3.1.10. 2차 위수전투

다음날 초군과 연종군은 위수 남안에서 재격돌하였다. 양군의 지휘관이 진영을 펼치고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동맹이었던 촉군이 갑자기 진격방향을 선회하여 초군 방면을 향해 돌격하였고, 연종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명장 경취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연종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명령을 내렸고, 초의 최정예군인 경가군조차도 경취의 말이 닿지 않는 상황에 조선군과 진군까지 들이닥치며 전장은 난전 상태로 들어갔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촉과 번번히 접촉하며 교류하던 진군은 초와 촉을 구분할줄 알았지만, 일체 교류도 없었고 말도 통하지 않았던 조선은 초와 촉 구분치 않고 공격하면서[36], 그 일대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그리고 경취는 이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고 초군을 지휘하여 난전에서 빠져나와 철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초군은 전체의 3할이 전사하면서 이미 전멸판정을 받았고, 더 이상의 싸움은 무리였기에 그대로 남정으로 퇴각하였다.[37] 경취의 입장에서는 상구에 연이은 패전이었고 그녀 생전 최후의 싸움이었다.

3.1.11. 연종군 이후 전략을 논하다

위수에서 대승을 거둔 연종군은 경취가 남정으로 완전히 물러나자 옹현에 주둔중인 진군, 돌궐군과 합류하여 진창을 공격하려 하였지만, 진나라 내부에서 이 이상의 전쟁을 지원할 물자가 없었기에 오래 싸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악의는 괵현을 접수하고 진창을 포위하여 무력시위를 펼쳐 초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전 전투에서 아군측으로 전향한 촉군에 대해서는 진군이 맡아서 보살피기로 하고 서둘러 괵현으로 진격하였다.

3.1.12. 악의와 항연의 협상

한편 경취가 보낸 번령을 통하여 본대가 참패하였다는 소식과 경취의 퇴각명령을 전해들은 항연은 괵현에 있는 연종군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을 요청하였다. 협상장에서 악의는 진창과 산관을 비운다면 초군의 무사철군을 보장하겠다고 선공을 날렸고 항연은 그 조건에는 협상할 수 없다며 맞받아쳤다. 항연의 거절에 진창성을 포위하고 있는 병력은 12만인데 진창의 초군이 버틸 수 있겠나며 위협하였고 항연 역시 지지 않겠다듯 기병중심의 조선군이 공성에 많은 병력을 할애할 수 있겠냐고 반박하였다.
지리한 협상과정에서 악의가 이미 초군 본대는 남정으로 물러났고 원군도 없는 상황에서 농성이 가능하겠냐고 나오자 항연은 배반한 촉군이 남정으로 안전하게 통과하게 보장할테니 진창성만 받고 끝내자고 제안하였다. 악의도 이것이 초군과 촉군[38]의 한계선이라 생각하고 항연의 제안을 받아들여 협상은 타결되었다.
그렇게 관중전선은 연종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2. 임치전선

3.2.1. 합횡군의 진격과 조선의 대응

임치군수 염파는 진남장군 진개로부터 교동 방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직감적으로 제나라가 다시 임치를 도모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임치를 노리는 것인 만큼 상당한 대군이 올 것이라 여겨 조정 및 인근 군현인 제북현과 하간현에 파발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사마대장군 양수가 진즉부터 제가 임치를 노릴것이라 여겨 인근 군현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명령을 내려 내사지와 제북군에서는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원군을 보내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하간군은 이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해놓지 않았는데 하간현 유지들이 이전 산동대전에서 활약하였던 이들이라 하나같이 제나라를 얕잡아보고 있었고 군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방심하고 있었다.
염파의 전령을 받은 양수는 올 것이 왔다고 여겨 즉시 준비해놓은 병력들을 이동시키려 할 때 조선상 하기가 원군을 인솔할 이를 보낼시 그 직위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군수보다 높으면 원군 지휘관이 총사령관이 되고 군수보다 낮으면 임치군수인 염파가 총사령관, 군수와 동급으로 보낼시 상호 협의를 통해서 움직이게 된다. 양수는 고민 끝에 상대부 이하의 장수를 보내 염파의 지휘 하에 싸우게 하였다.

3.2.2. 합횡군 전략을 논하다

한편 합횡측은 유수방면에 집결을 완료하였고 임치방면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경리가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앞으로의 진로를 논의하였다. 송측 지휘관인 대부 송유가 이대로 임치로 향하는가 묻자 제나라측 장수 전단이 후방의 위협을 놓고 싸울수는 없다며 조선이 점령하고 있는 오현을 확보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39] 경리는 전단의 의견이 옳다 여기면서 자신과 송유는 이 인근 지형에 대해서 잘 모르니 제나라 측에서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맹상군 전문이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였다. 경리는 전문이 나서겠다고 하자 일군의 장군[40]이 할일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전단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래야 할 사정이 있으니 맡겨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이에 경리도 왕의 친척이 사소한 일을 맡고 전단이 남는 걸 보고 대충 상황을 이해해서 더는 말리지 않았고, 전문은 1만4천을 이끌고 오현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3.2.3. 진남군 진격과 제군 오현점령

진동장군 진개는 자신이 지휘하는 진남군을 이끌고 태산을 따라서 진격해 오현방면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조선군이 장악하고 있는 태산을 활용하여 유사시 적의 후방을 공격하려는 이유였다. 그러나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산을 따라 움직이는 속도가 평야를 움직이는 속도보다 느릴 수 밖에 없었기에 전문이 있는 제군이 먼저 오현에 도착하였다. 전문은 오현성을 포위하고 한껏 기세를 올리며 항복을 권유하였고, 오현현령은 가망이 없다 여기고 그대로 투항하여 오현을 개성하였다.

3.2.4. 제북군 임치에 합류, 하간군의 능숙한 병력소집

한편 대사마대장군의 명령을 받은 제북군 2만은 임치에 있는 염파와 합류하였고, 동시에 내사에서 진격하는 5만 대군이 하간군에 진입하였다. 하간군은 비록 병력동원은 늦게 시작하였지만, 군수가 능숙히 병력을 모아서 내사군이 진입하였을 때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문제없이 병력을 인계하였다.[41] 이때 원군을 지휘하는 무관이 미리 임치로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하간군 군수는 모난 돌이 정맞고 괜히 의욕적으로 움직이다가 피보기 마련이라며 보신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관은 이러한 군수의 태도에 속으로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관리가 그저 책임회피에만 급급하다며 욕하였고, 군수는 무관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는지 알아챘지만 굳이 이를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3.2.5. 진개 오현이 점령된 것을 보고 회군하다

힘겹게 산을 타고 오현에 거의 다다른 진개의 진남군이었지만, 이미 오현은 제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진개가 급히 정찰병을 보내 오현을 점령한 이가 누군인지 알아보자 이내 전문이 지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개는 이대로 오현을 공격하느냐 물러나느냐 고민하였고 장고 끝에 은밀히 군사를 물려 임치로 귀환하기로 하였다.

한편 오현에서 조선군을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전문은 조선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마찬가지로 정찰병을 태산 위로 보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부관이 이대로 물러나서 본대와 합류하겠느냐 묻자 전문은 고개를 저으며 정찰병수를 늘려 다시 태산으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전문은 올려보낸 정찰병중 7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문은 역시 태산에 조선군이 있었다고 여겼으나 전문을 따라 종군하고 있던 풍훤이 전문을 제지하며, 만일 저 산위에 조선군이 있다면 7명이 죽은게 아니라 7명만 살아서 오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라 말한다. 전문은 그럼 정찰병을 기습한 것은 누구냐고 묻자 아마 조선과 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에서 당한것이니 한몫 잡으려는 산적들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답하였다. 전문은 풍훤의 말을 옳다고 여겨 이 이상 오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여기고 3천의 주둔병을 남긴 채 본대와 합류하기로 한다.

3.2.6. 염파 합횡군에 맞서 전략을 짜다

오현이 제군에게 함락된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임치로 돌아온 진개의 보고에 염파는 수고했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그대로 남아서 합횡군의 옆구리나 후방을 노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돌아온 병력인 만큼 활용해야 하였기에 염파는 치수전선 남부전선을 진개에게 맡기고 자신은 북쪽방면과 유사시 예비대로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조선군의 수비전략이 완성되었을 즘 합횡군도 치수에 도착하였다. 경리는 치수 중앙의 안평에 세워진 높은 요새에 질려하면서 전장을 살펴보니 조선군은 치수 북쪽과 중앙의 안평 그리고 남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에 합횡군 역시 셋으로 갈라져 각기 한방면을 맡아서 전투를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북쪽은 경리의 초군이, 중앙의 안평은 전단의 제군이, 마지막으로 남쪽방면은 송유의 송군이 맡게되었다.

3.2.7. 1차 치수전투

치수전투 초반 양측은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내 중앙전선의 안평성이 전단의 맹공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합횡측으로 넘어가는 추세였다. 이에 조선측도 그냥 밀리지 않는다듯 남쪽전선의 진개가 상태편 송군의 숙련도가 높지 않고 초반에 무리한 공세를 펼쳐서 이를 숨긴 것을 간파하고 공세로 전환해 송군에 피해를 입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또한 염파 역시 안평성이 위험한것을 보고 열세를 뒤엎기 위하여 공세로 전환, 남은 예비군 전원을 동원하여 염파 스스로 앞장서서 돌진하니 초군의 전열이 무너져 내리고 일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42]
북쪽전선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에 중앙을 맡고있는 전단이 일순 당황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오현에서 귀환한 맹상군 전문의 1만을 북쪽전선으로 급파하고 자신은 중앙의 안평성에 맹공을 가해 이내 함락시켰다.[43]
안평성이 함락당하자 염파와 진개는 이 이상의 싸움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치수에서 물러나니 1차 치수전투의 승자는 합횡측으로 마무리되었다.

3.2.8. 염파 각오를 다지다.

치수전선에서 물러난 염파와 진개는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진개가 임치성의 상황을 물어보니 염파는 아직까지는 잠잠하지만 합횡군이 치수를 넘는다면 임치성내 민심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증원군 중 1만5천은 임치 근교에서 전투시 합류가 가능하며 내사지와 하간에서 증원한 6만7천은 전투 한번은 막아내야 도착할 듯 하였다. 또 애초에 임치성은 너무 커서 농성에 걸맞은 성도 아니었다.
진개는 아무리 보아도 임치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 여겨서 임치성을 포기하고 원군과 합세하여 싸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진언하였지만 염파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였다.
진개: 출세와 명성이 탐나서요?
염파: 믿음을 저버릴 수 없을 뿐이다.[44]
진개: 당신의 사감에 나의 목숨까지 끌어들이겠다는 것이오?
염파: 그대들의 목숨을 주게.
-염파의 각오
염파가 각오를 보이자 진개 또한 자신의 목숨을 걸어주었다. 대신 충원된 1만5천은 자신이 받겠다고 말하면서 조선군의 방위 전략이 정해졌다.[45]
한편 합횡군 또한 임치공략을 위한 전략수립에 들어갔는데 조선군이 성 밖에 대략 6만의 군사를 전개해 놓자 자신들도 성을 공략할 공성군과 바깥의 조선군을 상대한 야전군으로 나누어 상대하기로 하였다. 임치성 공략에는 전문과 제군 3만의 병력이 담당하고[46] 남은 8만1천으로 야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3.2.9. 임치성 공방전(공성전)

본대가 조선 야전군을 담당하는 사이 전문이 이끄는 3만의 제군은 임치성을 포위하였다. 전문이 당당하게 일장연설[47][48]을 통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후 공격명령을 내리자 제군이 일제히 임치성에 맹공을 가하였다.
임치를 방어하는 염파는 어떻게든 막아내 보려 하였지만 제군의 공격과 더불어서 그동안 얌전히 숨죽이고 있던 구 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군의 공격과 내부반란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는사이 결국 서문이 점령되고 염파는 끝을 직감해 탄식하면서도 검을 고 쳐잡고 주변 군사들과 더불어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49].
이윽고 성문이 열리자 염파는 준비해놓은 궁병대에게 선두에서 달려오는 이부터 쏘라고 명령하였고…
조선군의 화살이 제군 선두를 향해 날아간후 갑자기 제군이 무언가에 홀린듯이 허둥지둥 하다가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제군의 선두에 바로 장군인 전문이 있었다. 전문 또한 고향이며 숙원이던 임치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했고, 임치의 성문이 열리자 그곳으로 돌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문제는 장군이나 병사나 너나 할 것 없이 임치로 진격하다 보니 전문 자신도 모르게 최선두에 달려와버렸고, 뒤늦게 이를 알아채고 후방으로 빠지려 하였지만 이미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군병사들에 의해 물러날 수도 없었다. 결국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 그자리에서 실신하고 호위군사들은 놀라서 쓰러진 전문을 부축하여 성 바깥으로 나가려 하였다.
그리고 제군의 이러한 반응을 놓칠 염파가 아니었다. 그대로 준비한 병력을 몰아붙여 제군을 몰아내고 다시 서문을 점령하여 성문을 닫는데 성공하였다. 주변병사들이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쓰러져있을 때 제군은 더 이상의 공성을 멈추고 빠르게 후퇴하였다. 그렇게,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임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때 무리한 염파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50]

3.2.10. 임치성 공방전(야전)

임치성에서 한창 공방전이 벌어지는 사이 임치성 외곽에 전개된 조선군과 합횡군도 전투에 들어갔다. 지형은 조선군에게 약간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조금이라도 합횡군 본대를 떨어뜨려 놓기 위하여 진개는 일부러 자신들이 불리한 장소에 진형을 차렸다.
전투에 들어서자 질에서 앞서는 조선군과 수에서 앞서는 합횡군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크게 밀리지 않는 상황에서 균형이 무너진 계기는 합횡군에 달려온 공성군의 전령이었다.
전문이 공성도중 부상을 당해 공성을 일시 중단하고 군사를 뒤로 물린 것이었다. 가뜩이나 이전 치수전투에서 전문이 행한짓에 마뜩치 않았던 경리는 분기를 누르지 않고 폭언[51]을 퍼부었고 그 사이 이번에는 초군 정찰병이 조선군의 증원군이 다가오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경리는 싸워서 이길 시 조선의 야전 전력을 대대적으로 깎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 훨씬 더 크다고 여겨 "일단" 퇴각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임치 외곽 야전은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3.2.11. 조선의 반격

합횡군이 물러나자 진개는 후방에서 다가오는 원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원군을 지휘하는 조선군 장수를 만난 진개는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 물었다. 이에 임치군수에게 증원군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고 그의 명령대로 움직일것이라 답하자 진개는 아직 합횡군이 완전히 치수를 넘어가지 못했으니 자신과 함께 그대로 합횡군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원군지휘관은 자신은 임치군수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받았기에 월권행위는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고 진개도 더이상은 권하지 않았다.[52]
그렇게 증원군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임치성에 합류하고 중상을 입은 염파도 원군의 증원으로 치료를 마쳐 다시 전선에 나갈수 있게 되었다.[53] 진개는 회복한 염파에게 이후 어떻게 움직일지 묻자 염파는 우선 안평성을 내놓으면 무사히 퇴각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기로 하였다.
합횡군 사령관 경리는 이러한 염파의 협상안에 고작 오현 얻기위해서 이 대군이 모인것이 아니니 가져가고 싶으면 힘으로 가져가라며 협상을 거부하였다.
협상이 파토나자 염파도 결국 싸울 수 있는 병력과 증원군을 재편, 자신이 직접 10만5천의 대군을 이끌고 안평 탈환전에 나섰다.

3.2.12. 합횡측의 대응

임치성 공략에 실패한 이후 합횡군은 그대로 치수를 넘어서 진영을 차렸다. 협상이 파토났으니 이제 조선군이 힘으로 안평을 탈환할 것이라 예상한 합횡측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논의에 들어갔다. 경리는 이전 조선군이 했던것 처럼 치수를 방패막이로 삼아 조선군을 요격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전단이 그렇게는 이길수 없다며 남쪽방면을 비워두어 아군에게 유리한 지역으로 적을 유인하자는 전략이었다.
이에 경리는 조선군의 주력인 기병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북쪽 습지지대가 더 좋지 않겠냐고 반문하였지만, 전단은 기병을 막는다 하더라도 조선군 전체의 련도가 아군보다 위이니 차라리 최대한 유리한 전장을 만들 수 있는 남쪽이 낮다고 강변하였다.
가만히 지켜보고있던 송유도 전단의 말이 옮다고 보태었지만, 경리는 그래도 조선군 기병이 신경쓰인 듯 남쪽 대신 북쪽을 비워두어 적을 유인하자고 최종결론을 지었다.[54]
한편 치수인근까지 진격한 조선군은 합횡측이 의도적으로 북쪽을 비워둔 사실을 정찰을 통해서 알아내었다. 이에 염파는 함정인 것이 뻔히 보이지만 정면에서 분쇄할 수 있으니 그대로 북쪽방면에서 도하하여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3.2.13. 2차 치수전투

조선군이 도하하기 시작하고 경리는 조선군이 적절한 숫자가 도하할 때 까지 기다리다가 대략 8만쯤 도하가 완료되자 공격에 나섰다. 이미 함정임을 알고 도하한 염파는 대비책이 있다는 듯이 반격에 나섰다. 양군은 치열하게 싸웠고 전체적 분위기는 조금씩 합횡측으로 기울어져갔으며, 예상보다 단단히 준비한 합횡군의 전력에 조선군의 전열이 조금씩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싸움이 길어져 합횡군이 보유한 물자가 결국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단은 이 이상의 싸움은 무리이고 조선군의 피해가 크니 이쯤에서 협상으로 안평만 확보하고 물러나자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경리는 조금만 더하면 승기가 보인다며 사실상 일축한 채 재차 공격명령을 내렸지만, 합횡군은 장기전의 피로와 물자부족으로 지칠대로 지쳤고 염파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싸우는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치수 너머에서 군사들을 도하시킨 염파는 아직 팔팔한 부대를 앞장세워 몸소 직접 반격에 나서자 합횡군에서도 가장 약한 송군이 그대로 퇴각하였고 송군의 퇴각이 다른 초군과 제군에게도 영향을 주어 전열이 붕괴되어 더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55]
결국 경리는 염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평을 내놓을테니 퇴로를 열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염파는 이를 받아들여 임치전선은 최종적으로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3. 결과

연종 진영의 최종 승리, 합횡 국면의 종결
이 대전이 결과적으로 연종 진영의 총체적 승리로 종결남과 동시에 합횡 진영은 최후의 동력을 이로써 완전히 상실하고 공중분해하였다. 대전 중부터 돌아선 촉을 시작으로 마지막 여력을 끌어 쓰고도 임치 수복을 실패해버린 제나라가 조선에 무릎을 꿇었고, 송나라는 이를 계기로 조선의 아래로 들어갈 의사를 전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 끝내는 초나라도 스스로 연종에 숙이고 들어옴으로써 합횡 진영은 그 구성원 전체가 몰락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종횡대전으로부터 최근 5년까지의 연전은 천하 그 자체를 완벽한 내핍상태로 빠뜨렸으며, 이는 연종체제가 제시하는 기치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4. 영향

4.1. 의거, 생존왕 지다.

흉노의 의해서 전국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의거 내부 귀족들은 더 이상 의거왕실을 모실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며 강대한 세력에 몸을 의탁하기로 합의하였다. 물론 의거왕이 반발하였지만, 이번전쟁에서 보여준 왕의 추태와 더불어 전국의 약탈로 흉흉해진 탓에 어느 누구도 왕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귀족들이 선택한 세력은 크게 3가지로 왕실과 핏줄이 연결된 진나라[56], 서쪽의 돌궐연맹[57], 마지막으로 중원제일국 조선[58]이었다. 귀족들은 논의 끝에 진나라를 선택하고 사신을 보내서 귀부의사를 밝혔다.
영탕은 의거의 귀부를 받아들였지만, 의거 귀족이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받아들였는데 바로 의거국을 폐하고 그자리 진나라령 북지군을 설립,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고 그 관리가 지역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예상보다 더 제한된 형태의 자치권을 가지게 된 것에 당황했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합의하고 영탕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각종 악재 속에서도 무려 1세기 이상 존속해왔던 의거국은 멸망하였다.[59]

4.2. 제, 봄은 오지 않고

제왕 전지는 합횡군이 받아온 성과의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그야말로 남아있는 여력을 다 끌어내어 쏟아부은 공격이 실패한 것이었다. 당장 제나라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무익한 전쟁을 벌인 조정을 비방하고 빨리 조선과 화평하라고 성화를 냈다. 이에 전교사가 군대로 반전파들을 일거에 쓸어버리자 제안하였고 전지가 혹하였지만 전문과 왕촉이 필사적으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60]
결국 전지는 종횡대전 이전에 논의하였던 조선과의 화평 건을 꺼내들었고 이에 전문은 칭신과 인질을 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조정 신료 대부분이 이에 찬동하자 전교사만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반발하고 패전의 주 원인인 전문을 향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희생시켰다며 비난하자 전문은 이미 귀국하면서 봉지를 반납하였다고 답변하였다.
전문: 그밖에, 제가 사죄드릴 것은...이 무모한 전쟁을 막지 못하고, 수많은 생령을 희생시켰다는 점입니다.
전교사: 아니예요. 아직, 아직.
전문: 이 문이 천학비재하고 부덕하여 작금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모님께는 입이 열이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교사: 그만해!!! 그 이상 말하지 마!!!!!
전문: 봄을 그리던 한바탕의 꿈은 끝났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 제 조정이 모든 것이 끝이 났음을 직시하고 한탄하며.
전문이 그자리에서 전교사에게 울부짖으며 사죄하자 끝끝내 받아들일 수 없던 전교사는 더욱 난동을 부렸고 이에 전지는 호위병들을 시켜 전교사를 자택으로 보내고 그대로 유폐시켰다. 전교사가 물러나고 진정 이되자 곧 누구를 사신으로 파견할것인가 논의하였고 전문이 자청하자 전지는 단 한치의 땅도 줄 수 없다는 조건을 덧붙이며 전문을 사신으로 보냈다.
맥경에 올라가 조선왕 기설과 마주한 전문은 제나라를 남번이라 칭하며 기설과 조선을 높이는 아부와 더불어서 제가 조선에 굴복하고 연종에 들어서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에 기설은 그 조건으로 제나라의 태자와 극현의 반환을 조건으로 삼았다. 전문이 태자 인질 건을 받아들일수 있지만 극현 반환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대신 자신이 조선 조정에 나와 기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기설이 완고하게 반대하자 전문은 조선의 태산 방어선 동단과 극현의 교환을 제시하였고, 기설은 이전에 하기가 조언한 오현점령으로 인해 태산방어선 동쪽이 힘들 것이다라는 조언을 기억하며 영토교환 요청을 받아들여 결국 조선과 제의 화평이 성립하였다.
힘들게 화평을 성립시킨 전문이었지만, 제 조정에서는 결국 땅을 내 준셈이니 전문을 처벌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전지는 처벌 겸 제나라에서 전문을 피신시키기 위해 인질로 가는 태자의 보좌로 임명하게 된다.[61]

4.3. 송, 굴러온 돌과 박힌 돌

송나라 조정은 송유를 통해서 합횡의 패전소식을 듣고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일단 파견한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에 대하여 송유의 책임론이 일어났지만 송유는 총사령관인 경리의 탓으로 돌리고 초나라는 믿을수 없는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상방 위염과 대부 전불예가 책임소재를 송유에게 돌리며 종국에는 사형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켜보고있던 송왕 연홍옥이 송유를 처벌하면 그보다 위의 사람도 마찬가지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위염과 전불예를 압박하였고 두 사람은 이 압박에 사형을 거두고 대신 송유를 좌천하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으려 하였다.
[62] 그러나 유능한 왕실파 일원인 송유를 좌천되게 두고 싶지 않았던 연홍옥은 송유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는 것으로 죄를 상충하려고 하였다.
송유는 사신으로 가기전 협상의 상한선을 물었고 연홍옥은 연종가입과 칭신 그리고 송이 연종에 합류시 생길 이익으로 조선을 납득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렇게 조선으로 떠난 송유는 한단에서 임치전선에세 예상외의 사상자를 내는 바람에 조선인들의 감정이 좋지않음을 깨닫고 우선 정보수집을 최우선으로 하여 촉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낸건과 조선왕 기설이 자신의 조카사위 위포를 아낀다는 정보를 듣게된다.
송유는 촉의 사신파견을 이용하여 촉과 송이 돌아섬으로서 초를 완전히 고립시킬수 있다는 논지를 들어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맥경에 당도하여 기설을 알현한 송유는 기설을 크게 찬양[63]하며, 준비한 논지를 말하며 화평을 청하였지만, 기설은 송유의 입에서 촉사신이 나오자마자 대번에 송유의 노림수를 깨닫고는 마침 자숙중인 고나를 송의 사마로 천거하면 협상을 받겠다고 하였다.[64]
송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유력 무관가문이 송나라 대사마가 될시 초의 이목이 송에 집중될것이 뻔하였지만, 도저히 거부할 방도가 없어 이를 받아들였고 송왕 연홍옥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송은 합횡에서 이탈하고 연종에 가입하게되었다.

4.4. 한, 조선의 거수기가 되다.

한나라 조정은 관중에서 날아온 소식에 발칵 뒤집어졌는데, 그 소식의 내용이 자신들이 보낸 장군 신차가 측근과 부하 병사들을 이용해서 초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65] 다행히 조선에서 한나라가 참전보상으로 요구한 평여는 보장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신차 건을 무마시켜 준것도 조선이었기에 한나라의 예상보다 더한 외교적 빚을 지게 된 상황이었다.
한왕 한구는 결국 이 외교적 빚 채무를 위하여 앞으로 한나라는 조선의 거수기가 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는 결정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66]
여튼 외교적인 건수는 이렇게 해결되었지만 한나라의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신차의 죽음은 외교사안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대응을 요하게 되는데...

4.4.1. 제발 저희 나라에게 장군감 좀 주세요, 잘해드릴게.

승전국임에도 대부 신차를 잃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과거의 명장이었던 정동장군 도 이래 또 다시 무관의 공백이라는 고질적 상태에 노출된 상황은 안 그래도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중원 중의 중원이었던 한나라에겐 발등에 불씨와 기름이 쏟아부어진 격이었다.
따라서 소식을 접하자마자 한왕은 영입할 무관을 물색했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성과가 영 좋지 못하였다.

4.5. 흉노, 조돌강점기

노리고 노리던 의거점령에 실패하자 선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이에 흉노선우는 자신과 인척관계로 있는 동월지에 도움을 요청하여 자신에게 반항하려는 무리를 힘으로 짖누르려 하였다. 그러나 동월지는 막후에서 조정이 필요할 때만 개입하고 전면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거기에 더해 동월지 대인은 곧바로 운중군수와 회담을 가져 흉노의 저변을 알리고 흉노의 내분과 분란으로 인한 초원내의 싸움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흉노의 안정이 필요하니 흉노내부의 반선우파가 조선에 도움을 요청할시 이를 묵살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운중군수는 그것이 조선에 어떠한 이득이 있냐고 묻자 동월지 대인은 그 빌어먹을 전쟁[69]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운중군수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로 인하여 흉노는 사실상 동월지가 속한 돌궐연맹과 조선 양강의 세력권에 들어와 그들의 간섭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4.6. 돌궐, 일단 살리고 보자

전쟁이 종결되고 귀환한 안재는 즉각 연맹회의에서 진의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리며, 옥과 같은 사치품 보다는 진나라의 실정에 맞춘 물자를 판매하자고 제안하였다.[70] 이에 그 방도를 묻자 군마[71]를 판매하여 여차하면 군마를 마경에도 활용하여 다용도로 쓸수 있음을 강조하여 상대방이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하자고 하였다.
만일 진나라가 이것도 힘들다고 할 시에는 약소하게나마 공물을 받아서 돌궐의 위신상승을 노리자 하여 모든 이들이 동의하니 회의는 종료되고 즉시 진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었다.
돌궐의 사신을 만난 영탕은 돌궐의 제안에 현재 진은 군마를 살 여력이 없으니 자신의 동생 영통을 통하여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협상을 맺었다.

4.7. 촉, 약소국의 생존법

촉은 성공적으로 초를 배반했으나 초나라가 타격을 받았다 하여도 그 부용국인 파나라의 존재까지 더해 그 격차가 아득했으며, 여전히 외부와 이어지는 길은 한중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 점 때문에 주변의 소세력들에게 영향력을 그다지 확보하지 못하는 사태도 겹쳐, 승전했음에도 나라의 상태가 경각에 달한 이유로 진나라에게 협조를 구하고자 했으나 진의 여력이 실상 다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 때 진에 사신으로 보내진 모아[72]는 협조 요청을 거절당한 즉시 새로운 길을 바로 모색하는데, 연종이라는 체제의 가입을 위해 맹주인 조선에게로 향하는 것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모아는 이에 기꺼이 응한(것으로 보이는) 진왕의 배웅 이후 각종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강역인 경현군 조승의 영지 내에 도착하였고, 기력과 여비를 보충한 뒤 맥성으로 향하며 마침 때를 맞춘 소서와 약간의 신경전을 벌이긴 하였지만 조선왕으로부터 가입 신청을 쾌히 승낙받는 성과를 거두었고, 귀환로의 안전 또한 조선왕이 몸소 보장하게 되었다.
후일, 촉은 연종회맹의 일석을 받게 되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내용이 될 것이었다.

4.8. 진, 피폐해진 나라사정

진혜문왕 영사가 초의 사신인 굴경과 장의를 벤 이래 이 때까지 초나라를 위시한 합횡 각국의 공세를 감내해 왔던[73] 진나라는 개입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가려 했던 돌궐조차 눈대중으로 한 번 보고는 나름 사정을 봐줄 정도로 여력이 남아날 겨를이 없었다.
이로 인해 승전국 진영이 되고도 바로 활로를 모색해야 했던 촉의 직접적인 협초 요청에 도저히 응할 수 없음을 내비친 영탕에게는 그 대신으로 연종에 가입하기 위해 조선행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은 그 자체만으로도 곧바로 뒤이은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초나라는 아직 합횡의 장으로써 여전히 상정중인 적국이었고, 자연스레 공동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동일한 여파가 미친다는 것을 직감한 영탕은 표면적으로는 이에 응했으나 속으로는 촉의 사신 모아가 절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할 생각뿐이었다.
처음에는 도적을 가장한 자객들을 보내어 일행을 전부 참살할 생각이었으나 때마침 영직의 심부름으로 진에 와있던 아탈란테가 이 광경을 보고는 그 장을 저격해 죽이니 궁술과 무위에 자객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아가 아탈란테에게 동행을 간곡히 청하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잠시 함께 머무르는 동안 독을 통하여 그 마수를 뻗쳤건만 끝내 일행들은 도망쳤으나 정사인 모아와 부사는 이를 극복하였다.
하동을 위시한 황하로 향할 때 자객들은 이를 추격하였으나 일행이 줄은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아탈란테가 받은 중원제일마인 조선마가 그 수레를 끌고도 1인 1마였을 자객들을 모조리 따돌렸다.
황하에서라도 수를 쓰고 싶었던 영탕이었겠지만, 이미 이 일대는 삼국의 사람들이 어지러이 뒤엉킨 국제지대였고, 특히 조선인의 눈을 피할 길이 마땅치 않았던지라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사신 일행이 경현군의 환대를 받고 여력을 추스르는 동안 아탈란테는 심부름을 끝마쳤는데, 그 심부름이라 하는 일이 영탕의 서신을 영직에게 전하는 것이었고, 그 안에는 촉의 사신 일행이 만약 조선으로 들어온다면 제거해달라는 당부가 들어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상수에게 사태의 전모를 파악한 영직은 크게 웃으면서 어차피 영탕도 큰 기대는 안 하고 쓴 것이니 괜찮다며 덮어버렸고, 가히 하늘의 뜻 아래 영탕의 흉수는 실패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간파한 조선왕은 지금까지의 기여를 봐서[74] 우회적으로 영탕에게 경고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지었지만, 이내 기근이 예견된 진나라의 수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4.9. 초,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합횡의 장으로서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초나라는 비록 근간이 있어[75] 여파가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았으나 엄연히 막대함을 자각하고 이후를 생각해야 할 처지였다.
대국의 덕목을 들며 최후의 시도를 종용한 소수, 양 전선의 주장으로써 엄연히 양방향의 대패에 최종 책임을 져야 할 경취와 경리는 즉시 어전에서 물러나야 했고, 거기에 이로써 경가는 가문 자체가 오랜 근신에 들어가는 처분이 되어 위세가 줄게 되었다.
마지막 한 표로써 실질적으로 종횡대전을 최종 승인한 초왕 웅횡의 권위, 특히 발언권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의 결정으로 결국 참패에 이르고도 뻔뻔하게 굴 정도의 철면피는 못되는 초왕은 한동안 어전에서 중론을 따르는 형식의 의사만을 표하였다.
한편 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왕제 황헐과 자란이 나서 국정을 주도하니, 이에 곧바로 차후를 위해 한중의 견제와 조선의 패권 인정을 알릴 사신의 결정, 패전국으로써 어디까지 내주어야 할지 등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허나 이 결정은 부족한 여력 속에서 동초[76]의 본령화는 다시금 후순위가 될 것임을 감수하는 결정이었고, 이내 해당 지역에 안 그래도 즐비하던 빈민과 도적떼를 더욱 창궐시키는 형국으로 이어졌다.

4.10. 조선, 명실상부한 패권국 자리에 오르다.

313년의 산동대전 이래로 최강국이 되었고, 295년 2차 중원대전과 292년의 상구대전, 그리고 이번 종횡대전을 거쳐서 힘으로 합횡을 완전히 박살낸 조선에게 더 이상 적수는 없었고, 조선의 패권에 반항할 수 있는 여력이 남은 국가도 없었다. 결국 온 중원은 이내 스스로 조선의 발 아래 조아렸다.
막하에 구름같은 맹장들과 하늘을 덮을 지모를 넘치도록 거느린[77] 끝에 중원의 맨 위에 올라 천하를 경영하게 된 조선과 조선왕가의 위상은 정점에 달하였고, 그 필두인 기설의 위광은 끝을 모르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천하를 경영함으로써 야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을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조선이 중원 천하를 휘어잡음을 거듭 말해주었다.
그러나 기설은 기뻐하지 못하였다.

4.10.1. 기설의 진노, 하기의 사직

기설의 스승, 당대 조선 유가의 필두, 그리고 함께 천하를 논하던 사석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우인 양소룡이 임치에서 명을 달리한 것이다.
염파는 현지의 책임자로써 양소룡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제반 상황 자체가 당장 승리조차 장담하기 힘든 임치의 사정은 끝내 내부의 소요가 겹쳐 양소룡에게 충분한 호위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혼란 속에 휘말려 객사해버린 것이다.
기설은 격노해서 감히 자신의 것, 자신의 사람을 잃게 만든 제나라의 멸국을 맹세했고, 그것을 진정시킨 것은 장왕사우 중 마지막으로 조정에 남아있던 조선상 하기였다.
어째서 자신의 것 자신의 사람만을 보며, 조선에 장왕이 있었다면 제나라의 장왕이 없어야 할 이유 등을 다그쳐 묻는 하기를 지켜보던 기설은 끝내 왕 또한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자신밖에 이해 할 수 없다고 답하며 만감을 토해내었다.
이에 하기는 그제서야 조선왕의 곁에 연장자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확신함과 동시에 자신이 조선왕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동시에 조선상의 좌를 더는 감내할 수 없음을 말하며 물러나니, 후일 하기는 실질적으로 마지막 조선상으로 남게 되었다.

4.10.2.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조선의 관제

당장 급한 일이 끝나고 남은 것은 역시 논공행상이었다.
먼저 임치군수 염파는 임치군이 제군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고 도리어 합횡군을 격퇴하며 영토를 일부 되찾았고, 계속 그를 중용한 왕의 신뢰에 보답해주었고, 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진남장군 진개는 대사마 악의가 하필 진개의 전적을 간과하고 승진과정에서 군정 쪽인 병관으로 들이는 등 약간의 혼선을 빚었으나 이후 좌장군 등극으로 결론이 났다. 이전에 군무는 몰라도 정무에서 차질을 빚어 한 번 징계를 받은 적이 있어 자신의 분수를 자각하고 있던 그녀는 이 소식에 조선왕을 연호하였다.
그리고 이 실책으로 악의는 상관인 양수의 노기를 건드렸고, 기껏 전쟁에서 이기고도 공으로 과를 상쇄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염파가 위장군에 봉해졌으니 기존에 위장군이었던 조사의 향방을 결정해야 했는데, 조사가 무관에 남아버리면 주요인사가 무관에 편중되며 진개는 군정을 볼 수 없고, 음진현령으로써 무난하다 못해 큰 성과도 거두었던 경력을 근거로 조사는 대사도에 봉해졌다. 이 사실이 통보될 당시 조사는 과로할 게 뻔했고 군사업무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당황했지만, 과로 중인데다가 왕에게 경고 먹고 무척이나 짜증이 나있던(…) 승상 가현의 강권으로 대사도 직을 받아들였다.
대사마대장군으로써 임치군으로의 진공을 예견하고 일대를 대비시켜 조선의 승리에 토대를 단단히 다졌던 양수는 원래라면 조선상이 된다 하여도 뭐라 할 이는 없었겠지만, 조선왕은 이 기회에 태자 기도를 잠시 조선상에 앉혀 국정을 교육할 의중을 보였고,[78] 삼공 중 차기 조선상이 된 자는 없었다.
한편 태자 기도가 조선상에 봉해지며 원래도 막중했던 승상의 업무에 더해 기도의 교육까지 맡게 된 승상 가현은 조선상이 사실상 일시 부재함을 이유로 그에 준하는 전권을 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되는 정도의 소동도 있었다.

4.11. 위, 후계자를 논하다.

위나라의 상황과 위왕 위래의 심정은 참담했다.

위래가 서하와 삼천을 정복하고 합횡을 결성할 때만 해도 위는 합횡에서 초와 합횡장을 두고 다투는 위치였다. 그런데 위래의 어두운 과거에 근간을 둔 감정으로 준비된 계획을 뒤엎고 진나라를 기만해 합횡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고, 동시에 한나라의 국보 화씨벽을 평가절하 하고 종묘사직만은 보존하겠다는 투로 말해서 한나라를 격노시켰다. 결국 양쪽 모두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끝에 조선에게 뒤를 내주어 기존 강역의 절반을 빼앗긴 채 강제로 연종의 창설 구성원이 된 것이다.
따라서 위는 연종의 구성원으로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닌 합횡의 구성원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참패했다고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위나라의 2번에 이르는 왕위계승 분쟁의 역사를 통해 태자이자 장자인 위의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고자 그 밑의 자식들을 최대한 배제시켰지만, 전쟁에서의 패배로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보존하며 국정을 장악한 망묘와 귀국한 둘째 위리의 파벌이 대두하여 공공연히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심지어는 10대에 불과한 막내 위포가 조선의 조카사위가 되고, 두 언니들은 뒷배가 천하의 제일국 조선인 위포를 끌어들이고자 여념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연종 회맹을 계기로 일선에서 물러난 소진의 자문을 구한 위왕 위래는 마음이 둘째에게 갔으나 목숨은 건드릴 생각이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하기 위해 보좌에 상방 망묘를 데려갔고, 이는 위의가 이를 기회를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위리에게는 망묘와는 완전히 독립된 자신의 만의 입지를 갖출 기회를 뺏는 꼴을 불렀다.[79] 또한 왕의 부재와 서로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틈은 왕과 상방이 부재한 사이에 조선을 뒷배로 두고 있는 위포를 누가 끌어들이는가의 승부로 이어졌다.








[1] 개전 당시까지만 해도 합횡측이었지만 그간 축적된 불만으로 인해 교전에 돌입하기도 전부터 이반할 계획이었다 [2] 훗날 조국 촉의 안위를 위하여 진나라에 임관한다. [3] 돌궐식 관직은 모름 중원의 상경급에 해당하는 인물 [4] 진남군 포함 [5] 위는 여력이 없어서 조선 관중방면군 보급에 전념했다. [6] 초원세력으로 돌궐이 참전 [7] 물론 각자의 의도가 모두 달랐다 [8] 여기에 더해 실상 단 한번도 패전한 적 없던 경취 최초의 패전이라는 충격이 가미되었다. [9] 이때 소가와 굴가의 대표가 각각 소서와 굴서로 변경되었다. 이들은 경취를 위시해 경가가 군권을 완전히 틀어쥔 상황에 불만이 있었던 각 가문의 신진파들로, 등장 당시 소가와 굴가 또한 군문에 발을 들일 것을 천명하였다. [10] 중신들 대부분 싸울시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면 전쟁을 꺼렸다. [11] 구 월국령 일대. 당연히 초의 동쪽이라서 이런 말이 붙었다. [12] 이때문에 강동재건 사업이 사실상 완전히 중단되었다. [13] 의도치 않은 선견대로써 조선군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문자 그대로의 격멸을 당하고 지휘관이었던 당앙은 종전 후에서야 사망이 확인되는 대패였다. [14] 초측에서 합횡끼리 내분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여겨 한발 물러섰다. [15] 상구를 점유해 위에게 양도하려는 조선의 의도를 최대한 저지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철저한 청야전술을 시도했으나 결국 빼앗기면서 당시 국면상에서 요충지를 잃었다. [16] 비록 총사령관은 전문이었지만, 전지는 전문에게 군재가 없음을 알고 사실상의 실권은 전단에게 맡기고 전문에게도 전단의 의견대로 군을 움직이도록 신신당부했다. [17] 영통은 조선에 10만대군을 빌려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18] 조선측은 한이 초에게 상실한 거양까지도 줄 수 있었지만, 한이 그 이상을 지키기 어려워 평여만 요구하였다. [19] 메타적으로 해당 병력의 숙련도는 31로 오합지졸을 보내었고 악의는 일반 농민들에게 창만 쥐어주었다고 평하였다. 2차 중원대전 당시 병력의 동원은 최소한도로 자제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형편에 맞지 않은 과한 동원을 한 셈이다. [20] 당장 2차 중원대전 당시 조선의 참전제안을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사실상 거절한 뒤 위측에 이 정보를 팔아넘기려는 시도를 하다 대부 초사를 위시한 위나라의 선입견이자 오해에 좌절되었다. [21] 조선과 진이 전쟁준비에 들어간 상황에 의거를 도울 여력이 없을테고 진나라 조정도 영직에 줄을 선 의거를 탐탁지 않게 여길것이라 생각하였다. [22] 백기 특유의 보신주의적 행동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23] 해임된 백기에게는 포야도 방면 척후임무를 맡겼다. [24] 진창에 주둔중인 병력의 수는 2만3천이다. [25] 돌궐에서의 관직은 알 수 없지만 중원의 상경급에 해당하는 고위직 인물이다. [26] 이때 항연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이런 흉포한 종족을 우군으로 삼다니, 제정신인가?" 라며 진나라를 힐난하였다. [27] 옹현이 진나라의 옛수도이니 대접이나 거나하게 받자는 속물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28] 사실 항연이 왕흘의 군사를 맞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돌궐군이 측면을 노릴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 단념하고 후퇴에 집중하였다. [29] 실제는 상경급이지만 하대부가 "국내 서열 6위"라 생각하여 나온 실수였다. [30] 자신보다 높으면 진의 왕족인데 왕흘이 입고있는 옷이나 태도에서 왕족다움을 느끼지 못하여 이상함을 느꼈다. [31] 사실상 의거공격시 진나라는 개입하지 말라는 우회적 표현이다. [32] 훗날의 오장원 [33] 한군제압작전에 동원된 변경출신 조선군 일부가 한나라 병사들을 죽기직전까지 구타하여 한군의 전의를 꺾어버렸다, [34] 경사출신 군관은 변경출신 병사들의 과격행위에 혀를 차고 악의는 과연 이것이 변경출신만의 문제인지에 의문을 가지면서 조선군 내부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35] 악의의 예상대로 진창의 초군은 돌궐의 견제와 기동력에 밀려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36] 전공문제로 조선군 특히 변경출신은 수급을 얻는데 목숨을 걸었다. [37] 퇴각하면서 진창의 항연에게 전령을 보내 진창과 산관의 처분을 맡기며, 단 한사람의 초군이라도 살려서 남정으로 퇴각하라고 전한다. [38] 이미 전장에서의 행동으로 사실상 연종으로 전향한 것과 마찬가지의 형국이었고, 따라서 현장에서의 판단만으로도 잠재적인 아군을 챙길 필요성은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었다. 더군다나 당장 서로 말부터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 총대장인 악의는 촉 측의 의사를 직접 물을 수가 없었다. [39] 조선측이 태산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합횡측은 굳이 이를 힘들여 토벌할 필요는없었고 그저 산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견제만 하면 그만이었다. [40] 전문은 명목상 제군 총사령관이다. [41] 내사에서 증원한 군사 5만에 하간군 3만2천을 합하여 무려 8만2천의 대군이 모였다. [42] 총대장 경리가 돌격해오는 조선군을 피해 도망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칠 정도였다. [43] 메타적으로 중앙전선 다이스에서 0 크리로 함락당한걸 리롤하였는데 다시 0크리가 떠서 참치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44] 염파는 이전 하남대전의 패전으로 강등당하고도 기설의 총애로 임치군수를 맡게 되었으며, 2차 중원대전 당시 순우와 극현을 빼앗겼음에도 자리를 보전하였다. 염파에게 있어서 임치를 내준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기설에게 받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였고 의와 협을 중시하는 그에게 이는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였다. [45] 진개는 진남장군으로서 휘하 병력부터 진남장군부라는 별도의 관할이라 사실 염파의 부탁에 진개가 응하지 않아도 뭐라 할 수 없었지만, 조건부로나마 염파의 각오에 응해준 것이었다 [46] 제나라측에서 강하게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건의하였다. [47] 전문: 눈앞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향, 우리가 갈망하던 곳, 선조의 혼이 깃든 곳! 여기 있는 자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임치 탈환의 영광을 맛볼 자들이다! 전원 전투준비!! [48] 임치는 이전 제나라의 수도인 만큼 임치 탈환은 제나라의 숙원이었다. 자신들의 옛 수도를 자신의 손으로 탈환하는 전투인만큼 제군의 사기는 끊임없이 올라갔다. [49] 염파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람답게 죽도록 하자. 모두의 목숨을 나에게 주게.”라고 말했고 조선군은 하나라도 더 죽여서 남은 가족들에게 뭐라도 주고자 했다. [50] 메타적으로 이 때 고생한 것 때문인지 AA가 도몬에서 동방불패로 변경되었다. [51] 경리: 이 트롤러 놈은 그따위 재주로 잘도 나도 못 받은 군호를 받았네! [52] 이때 만일 진개의 말대로 하였다면, 중상을 입어 초기 치료가 필요한 염파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나중에 사실을 들은 원군지휘관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3] 이때 중상을 입은 상태로 운신 가능 다이스를 돌렸는데 높은 다이스가 떠서 무력수치에 마이너스 없이 본래능력대로 싸울 수 있었다. [54] 막판에 경리는 부상당해서 쓰러진 전문에게 부정 타니 전장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고 경고하였다. [55] 이때 퇴각하던 송유는 이 패전 모두 다 경리탓이라며 울부짖었다. [56] 장점은 위치 덕분에 직접적인 비호가 가능하고 국혼을 통해서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깊어졌다는 점. 단점은 요즘 들어서 좀 많이 부실해 보여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비호를 당분간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점. [57] 장점은 그 막강한 힘과 소속 세력에게 보장해 주는 자치권. 단점은 습속이 상당히 다른 데다가 돌궐이 의거를 받아들일 이유가 딱히 없다는 것. [58] 장점은 확실한 국체보존과 안전보장. 단점은 자치권이 가장 크게 제약될 가능성이 높다. [59] 더불어서 의거의 몇안되는 네임드 아탈란테도 그대로 진나라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60] 산동대전 이래 이어진 여러 경험은 전교사를 제나라 제일의 대 조선 강경파/반조선파로 만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 상황 자체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61] 조선의 세뇌방지 겸 내부정보수집을 겸하게 하였다. [62] 본인들은 송유에게는 없는 봉지를 반납하는 것으로 넘길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63] 천추만재 일통강호. [64] 겉보기에는 굉장한 부담을 자처하는 것처럼 포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연종 각국으로 초의 주의와 여력이 분산될 것이 자명했고, 이를 역으로 찔린 이상 송유에게도 뾰족한 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65] 한나라측에서 의심하지 못하게 악의와 사마착이 철저하게 합을 맞추어 조작하였다. [66] 이후 과오를 사할 기회를 받는 격으로 최초의 연종회맹 장소로 선정되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준비하면서, 그 답례로 이전까지의 기여를 더해 회맹 의전서열 4위라는 국력 대비 높은 지위를 하사받게 되었다. [67] 진상은 거의 함락 직전인 것을 경양에게 구원받은 것이었고, 이미 한나라에서도 확인을 끝마친 뒤였다. [68] 후술하겠지만 이 공으로 결국 좌장군이 되었다. [69] 중원이 10년간 전쟁에 열을 올리기도 전부터 초원 또한 초원대로 계속해서 분쟁이 반복되었고, 이는 기원전 300년대에 이르러 동초원대전이라는 이름의 절정에 달했다. [70]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않은 진나라 상대로 사치품을 판매하여 재정상황을 악화시키면 양국의 외교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혔다. [71] 개중에서도 속도나 지구력보다 힘이 좋은 품종 [72] 당시에는 촉의 모브에 해당하는 AA를 썼으며, 후일 면면이 정해지며 이에 맞게 이름이 밝혀졌다. [73] 이전까지 사돈이었던 초나라지만 웅괴의 요구가 화근이 되어 결국 철천지원수가 된 과정을 거친 끝에 합횡 국면 한참 전부터 훗날 합횡국이 되는 나라들에게 집중적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초나라, 위나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나라에게까지! [74] 맹주인 조선 외에 기본적인 국익을 우선시한 것을 제하면 합종군의 공세를 온전히 받아내고 특히 위나라를 함께 몰락시킴으로써 연종의 서막을 함께 열었다. 이는 후일의 회맹에서 조선 다음의 의전 서열을 받음에 부족함이 없는 공임을 인정받았다. [75] 당시의 지형에 근거한 강남 특유의 비교적 느슨한 중앙집권과 행정력은 특유의 회복력이라는 반대급부를 주곤 했다. [76] 구 월국령으로 이 때는 이미 초나라에 의해 멸국된 뒤 부흥운동도 실패한 채 월인이 거의 유출되어 굴위의 관리 하에 지속적으로 사민 중에 있었다. [77] 제가 고개를 숙임을 알리고자 사신으로 향한 전문의 발언을 인용한 것으로, 실제로 조선은 작중 단 한번도 제대로 된 무장이 부재한 시기가 없었다. [78] 후일의 이야기지만 기설은 이미 조선상을 명예직화할 계획이 있었다. [79] 그래도 위리는 굴하지 않고 이미 한때 시댁이었던 송나라에 뻔뻔할 정도의 관개 개선 요청을 몸소 하러 가 성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