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대전 南陽大戰 Great War of Nany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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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346년 | |
장소 | 초나라 남양 완에 설치된 장성 | |
원인 | 초국이 한나라령 노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이에 패자 전인제가 칙서를 받아 대초연합을 결성 | |
교전국 |
제齊 조선朝鮮 위魏 한韓 월越 송宋 |
초楚 |
지휘관 |
제 대부 추기 제 장군 광장 조선 진남장군 악월 조선 별부사마 고정 위 공자 위신 위 공자 기람 한후 한무 송 공자 대언 |
초왕 웅상 초 영윤 소해휼 초 대부 소양 초 좌도 경사 초 대부 굴의구† |
병력 |
합종군 제군 8만 6천 조선군 6만 8천 위군 5만 한군 2만 월군 2만 송군 1만 7천 총합 26만 1천 |
초군 14만 2천 |
피해[1] | 합종군 약 5천 2백여명 | 초군 약 5만 3천여명 |
결과 |
초군 패배, 초나라 대부 굴의구 전사, 초 항복 후 패자체제 복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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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제나라의 패권공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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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초가 한나라령 노양을 침공하여 점령하자, 패자 전인제가 주천자의 칙서를 명분으로 합종군을 일으켜 남양의 초장성을 공격한다. 합종군 참여국이 제, 한, 위, 송, 월, 조선 6개국으로 사실상 진을 제외한 중원 모든 국가[2]가 참전한 대전이다.2. 배경
2.1. 초의 사정
한나라의 공작으로 성양에서 반란[3]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된 초는 보복을 위하여 사돈관계인 진과 협력하여, 하북의 국가들 이목이 진에 쏠려있는 사이 영윤 소해휼에게 강병 2만 5천을 맡겨 한나라령 노양을 침공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제를 비롯한 한, 송의 위기감을 불러오고 제나라가 주천자의 칙서를 받아 초나라에게 노양을 반환하라고 강박한다. 이에 참지못한 초왕 웅상이 반발하며 사신으로온 순우곤을 쫗아내고 합종군이 쳐들어오자 남양에서 요격하기 위해 나선다.2.2. 합종측의 사정
진과 위의 분쟁으로 이목이 하동에 쏠린 사이 초가 한나라령 노양을 점령하자, 전인제는 즉시 송을 지원하여 초를 견제하고 주천자에게 초의 무도함을 성토하고 초가 다시금 북상하려 한다며 초 토벌에 대한 칙서를 내려줄것을 요청하였다. 주천자가 이를 승낙하자, 전인제는 순우곤을 초에 사신으로 보내어 노양을 반환하지 않으면 전쟁이라는 겁박을 한다. 초가 이에 반발하자 합종군을 일으키니 진을 제외한 모든 열국이 이에 응하여 26만이라는 대군이 초나라령 남양으로 진격하였다.3. 전쟁의 전개
3.1. 초장성 전투
전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양군이 초장성에서 마주하여 공격측인 합종군이 공격하며 방어측 초군이 이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장성을 방패막이 삼더라도 합종군측의 병력 훨씬더 많았고 각국의 내로라하는 명장들[4]이 참전하니 초군이 버티지 못하고 곳곳에서 합종군이 성벽을 올라 초군을 도륙하였다. 이 과정에 분투하던 대부 굴의구가 송의 공자 대언에게 전사하니 결국 버티지 못한 초군이 사기가 떨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에 초왕 웅상 역시 좌절하여 항복하니 전쟁은 합종측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4. 결말
4.1. 초의 항복
항복한 초에게 내려진 처분은 가혹했다. 우선 이전에 점령한 노양의 반환은 물로이요. 완 이북도 한에게 넘기고 이번 전쟁의 주무대인 장성을 스스로 해체하라는 것이다. 이로인하여 초와 한의 경계는 한수의 지류인 비수를 경계로 사실상 남양 대부분을 넘겨줘야했다. 거기에 패전으로 초의 위신이 내려가 중부와 동부가 흔들리니 측히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북부지대는 전사한 굴의구가 담당하던 곳이라 굴의구가 사라지자 크게 불안해 하였다.4.2. 불공정한 전공배분
승리한 합종측도 전공문제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남양대전에서 가장많은 제가 1등을 차지하였지만, 그 아래 전공배분에서 불공정이 발생하는데, 사령관이 공족으로 참여한 위와 한이 각기 2등과 3등을 차지하고, 적장의 목을 베었지만 참전한 군이 적은 송과 사령관의 신분이 낮은 조선[5][6]은 실질적인 활약에 비해 모자른 대접을 받게된것이다. 이를 조정해야할 합종군의 총사령관 추기 역시 높은 신분이 아니었기에 사실상 문제를 방관하였다.4.3. 영토배분
초나라가 전후협상으로 내놓은 영토중 원래 한나라령이었던 노양과 무양과 가까운 엽은 한나라가, 그외 완일대 지역은 위에 귀속되었다. 제는 한뼘의 영토도 가지지 않았는데 제가 원하는 영토는 일족의 고향 진(陳)이었기 때문에 전인제는 과감하게 포기하였다. 그러나 위 입장에서는 사실상 관리하기 까다로운 월경지인 완일대 보다는 한나라고 영유하고 있는 하남지역이 더 필요하였기에 한후와 협상하여 지역 교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후는 한나라가 완을 영유할 경우 진나라와 무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것이 꺼려져 이를 거절하였다.[7]4.4. 전인제의 사태수습
위와 한이 영토문제로 씨름하는 사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였지만, 아무것도 얻은것이 없었던 조선측은 불만이 팽배한 상황이었다.[8] 전인제는 추기를 통하여 상황을 파악하였고 이대로 조선군을 보내면 이후 조선과 위,한의 사이가 크게 나빠질것이라 여겨 추기를 통해 조선군의 철군로를 제나라 방면으로 돌리고 몸소 악월을 맞이하여 조선군 전군에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악월과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악월은 전인제의 이러한 대접의 뒤에 자신들은 겪은 일에 대하여 나쁜말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는것을 간파하고, "무례한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제후께서도 상당히 고생하시는 분이시군요"[9] 라고 답하였다. 악월의 대답에 전인제는 그것이 수락의 뜻임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부디, 다 먹어주게" 라 말하였다.5. 영향
5.1. 열국들 휴식기간을 가지다
전쟁 당사자이자 패전국인 초는 물론이요 참전국의 대부분이 이번 전쟁으로 크게 무리하여 당분간 군사행동은 접어두고 휴식기를 가져야했다.[10] 대표적으로 조선 같은 경우는 당시 진행중이었던 안문관 공사가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5.2. 제나라 진나라를 주시하다.
지난 중원대전으로 이전 패권국인 위를 꺽고 중원의 군사강국 조선을 외교적으로 옥죈 제나라에게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존재는 남방의 초와 서방의 진이었다. 그 중 하나를 크게 꺽어놓는데 성공한 제의 패권은 더욱 탄탄해졌고, 전인제는 이제 마지막 남은 패권 도전국 진나라를 예의주시하게 되었다.5.3. 초나라 무너진 위신, 단단해진 결속
생애 최초의 대패를 겪은 웅상이었지만, 신하들의 도움으로 다시금 재기에 성공하였다. 비록 패전의 여파로 초의 위신이 내려가고 다시금 지방이 흔들렸지만 이에 반비례로 왕과 삼대세경가의 결속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 결속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금 힘을 모은 초는 훗날 월을 도모하고 강남의 패자로 우뚝서게 된다.
[1]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
[2]
진나라는 초나라와 사돈관계이고 몰래 초와 협력관계를 맻고 있었지만 이 대전에 어느측에도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3]
인근 서양에 거주중이던 대부 굴의구가 나서서 초기진압에 성공하였다.
[4]
제의 광장, 조선의 악월과 고정, 송의 대언
[5]
궂은 일은 모두 도맡아서 하고, 병력지원을 핑계로 악월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가져갔다.
[6]
거기에 위군과의 악감정이 풀리지 않아서 공자 기람이 중간에 조정하지 않았으면 도중 우군끼리 싸우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었다.
[7]
이미 진나라 관문 함곡관과 마주하는 입장인데 무관까지 마주하여 부담을 짊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8]
특히 전공을 기대하며 참전하였던 악월의 악감정이 매우 컸다.
[9]
각국간의 조정에 고생한다는 의미
[10]
메타적으로 기원전 345년 턴에서 참전국들 모두 행동이 스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