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의 난 莊蹻之亂 Rebellion of ZhuangQiao |
||
시기 | 기원전 287년 | |
장소 | 초나라령 강동일대 | |
원인 |
초나라의 지속적인 강동지역 공출[1]로 인한 인민들의 불만 폭발 |
|
교전세력 | 봉기군 | 초楚 |
지휘관 | 봉기군 수장 장교 |
초 토벌군 사령관 소어 초 원릉군수 굴위 초 연릉군수† |
병력 |
봉기군 본대 7천 강북봉기군 2천6백 총합 9천6백 |
초 토벌군 1만5천 초 원릉주둔군 2천8백 초 연릉주둔군 1천5백 총합 약 1만9천3백 |
피해[2] | 봉기군 약 2천7백 | 초군 약 4천2백 |
결과 | 토벌군 반란 진압 실패 | |
영향 |
초조정과 장교와 협상하여 장교를 강동후로 봉작하고 구 월나라 일대[3]를 봉지로 줌 강동후령 형성 |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반란. 이전 광릉군수였던 장교가 웅괴에게 파직당한 이후 강동에 암약하고 있던 미스트도적단[4] 잔당과 합류하여 힘을 키우고 종횡대전으로 초의 세력이 약화되고 초의 기둥 경취가 죽자 이를 천시로 보고 기원전 287년에 봉기를 일으킨다.2. 배경
종횡대전의 결전을 위하여 초나라 조정이 동초의 모든 여력을 동원하였고, 이후로도 종횡대전의 패전 여파 수습을 위하여 동초의 부흥을 후순위로 두게되어 해당지역은 피폐해져 갔고, 빈민과 도적떼를 더욱 창궐시키게 되었다.
이윽고 동초의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굴위가 조정에 상주하여 동초지역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정내에서도 동초를 이대로 두면 안된다는 여론이[5] 커서 한중지역에 배정했을 자원을 동초에 몰아주었다. 그러나 지원의 양[6]도 모자란감이 있었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탓에 중앙의 관리감독이 소홀하여 중간관리들이 빼먹기까지 하니 막상 동초지역에 도착한 자원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중앙의 소홀한 지원과 푸대접에 동초의 민심은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이윽고 동초의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굴위가 조정에 상주하여 동초지역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정내에서도 동초를 이대로 두면 안된다는 여론이[5] 커서 한중지역에 배정했을 자원을 동초에 몰아주었다. 그러나 지원의 양[6]도 모자란감이 있었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탓에 중앙의 관리감독이 소홀하여 중간관리들이 빼먹기까지 하니 막상 동초지역에 도착한 자원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중앙의 소홀한 지원과 푸대접에 동초의 민심은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3. 전투의 전개
3.1. 장교의 봉기
초조정이 남양지역의 내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진나라에 부흥물자를 보내고 그 대가로 조그마한 지역 하나를 받아냈다는 소식을 들은 장교는 초조정의 시선이 진나라에 고정되어 있음을 깨닫고 지금이 봉기하에는 적격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암약하고 있던 도적단에게 통문을 돌려 일제히 봉기하니 연릉과 원릉을 제외한 지역 모두가 일제히 봉기를 지지하며 봉기의 불길이 치솟게 되었다.한편 동초지역을 관장하는 굴위는 반란소식에 급히 장강의 물길을 장악하고 원릉으로 물러나 소관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하였다.[7]
3.2. 봉기군의 연릉포위
장교는 봉기에 응하지 않은 연릉을 포위하고 예전 광릉군수 있었던 경험과 치밀하게 준비해온 정보망을 가동시켜 이들을 바깥으로 유인해보지만 연릉군수는 넘어가지 않고 묵묵히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버텼다.[8] 연릉을 포위하는 한편 봉기군은 성공적으로 집결하였고, 그 수가 7천에 달했다. 그러나 이 7천의 무장상태와 련도는 좋지 않았고 장교는 정면으로 싸우면 필패하니 지속적으로 정보망을 통하여 기만과 역정보를 흘렸고, 자신들 만으로 정규군과 싸우기 어렵다는것을 인지하였기에 북의 송나라와 남의 민월에도 사자를 보내어 봉기의 지지 및 지원을 요청하기로 하였다.먼저 송은 봉기군의 사자에게 연종[9]을 언급하며 지원을 할수 없다고 거절하였지만 적극적으로 초나라를 돕지도 않겠다고 답하였고, 민월은 봉기가 성공할것이라 여기지 않아서 먼저 초나라 토벌군을 격멸하면 지원하겠다고 답변하였다.
3.3. 소관의 반란 인지 및 대응
굴위가 보낸 전령이 소관의 소어에 동처의 반란 소식을 전달하자 소어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예전에 당했던 치욕을 씻을 기회라 여기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 나서기로 하였다. 먼저 첩보원들을 풀어 사태파악에 나섰는데 광릉에 반란군 수뇌부가[10]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전 강동 봉기를 상기하며 당연히 수뇌부도 광릉에 있을것이라 여긴 소어는 먼저 광릉을 평정하고 남하하기로 결정 소관 주둔군 1만5천을 동원하여 그중 1만은 광릉으로 향하고 남은 5천으로 금릉을 점거하여 운양을 확보하게 하였다.3.4. 1차 금릉전투
병력을 집결시키고 물자준비도 완료된 봉기군은 소관에서 병력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이에 대한 대응을 고심하게되었다. 장교는 금릉으로 다가오는 5천의 초군이 주력병력이라 하기에는 적다고 여겨 금릉에 약3천의 병력을 보내 방어하게 하고 남은 4천으로 본대를 요격하기로 마음먹었다.곧 토벌군 5천과 봉기군 4천이 금릉성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반 기세는 토벌군이 가져가여 금방이라도 금릉성이 낙성할것이라 보여졌지만, 이미 악에 바칠대로 바친 봉기군이 구석에 몰리게 되자 반격에 나서게 되고 동시에 본대의 장교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금릉이 예상보다 빨리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장교는 크게 갈등하게 되었는데 머리로는 이대로 광릉으로 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의 마음이 금릉에서 분투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향해야 한다고 외쳤다. 결국 금릉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장교는 군사를 돌려 금릉을 향해 전속력으로 진군하였다.
금릉에서 양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 금릉에 도착한 장교는 이왕 이렇게된거 확실하게 초군을 격멸하기로 마음먹고 초군의 후방으로 우회하였다. 그러나 초군이 장교의 군을 인지하며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마찬가지로 원군이 온것을 알게된 금릉 봉기군이 성문을 박차고 나와 초군이 대응못하게 방해하였고 그사이 장교는 우회에 성공 초군은 장교와 금릉 양측에 공격을 받고 3할의 피해를 내며 원릉으로 퇴각하였다.[11]
금릉 방위에 성공한 봉기군은 그대로 군을 합쳐 적 본대를 요격하기로 하였다.[12]
3.5. 광릉전투
광릉에 도착한 소어의 토벌군은 빠르게 광릉성을 포위하였다. 광릉성을 살펴본 소어는 의외로 방비 시설이 잘 준비되어 있는것에 이곳에 수뇌부가 있다고 확신하였고, 여기만 제압하면 반란군은 무너질것이라 여겼다. 초의 숙장 소어가 지휘하는 토벌군의 공세는 대단하여 광릉성은 초전에 큰피해를 보고 이내 낙성하게되었다. 광릉성을 점령한 소어는 강북의 잔존 반군세력을 정비하면서 별동대의 소식을 기다렸다.한편 동초의 반란에 초조정은 즉시 대책회의에 들어갔으나 이미 소관의 소어가 토벌군을 조성하여 출진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일단 소어에게 토벌을 맡기고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3.6. 연릉의 반격시도
연릉군수는 봉기군의 대부분이 빠져나가고 포위병력이 느슨해진 것을 보고 싸울수 있는 병력 1천5백을 동원하여 외부 포위망을 부수고 물자를 획득할 계책을 세우게 된다. 동시에 금릉에서 초군을 물리친 장교의 봉기군은 운양에서 재정비후 후방의 위험이 되는 연릉을 먼저 점거하기로 하고 연릉을 포위하는 군사수가 적은 것을 우려하여 선발대로 2천 먼저 보내고 본대도 뒤따라 연릉을 향해 진격하였다.3.7. 장교의 기만책
광릉을 점거하고 강북정리를 하던 소어에게 금릉에서 물러난 별동대의 전령이 도착하여 반란군의 수가 2만4천이라는 보고를 듣게된다.[13] 소어는 그제서야 광릉이 수뇌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첩자를 남안으로 파견하여 정확한 적군의 규모를 파악하게 하였다.
장교는 여기서 또다시 화려한 기만책을 펼치는데 자신들의 세를 크게 보이기 위하여 가지고 있는 깃발이란 깃발을 모두 세우고 횃불도 여기저기 배치하여 군세를 크세 보이게 하니 첩자들이 이를 보고 소어에게 반란군의 수가 무려 3만에 달하다고 과장보고를 하게 되었다.[14] 소어는 광릉 쪽이 미끼이고 자신이 강북에 시선이 가 있는 사이 반란군이 강동 전역의 병력을 집결시키는데 성공하고 동시에 강동 전역이 반란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고 판단하였다. 이로써 연릉의 구원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소어는 오합지졸이지만 3만이라는 큰덩어리를 이루는데 성공한 반란군을 부담스럽게 보고 강북의 질서유지용 병사 7천을 남긴 후 남은 3천을 이끌고 금릉 인근에서 원릉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와 합류해 금릉부터 수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장교는 여기서 또다시 화려한 기만책을 펼치는데 자신들의 세를 크게 보이기 위하여 가지고 있는 깃발이란 깃발을 모두 세우고 횃불도 여기저기 배치하여 군세를 크세 보이게 하니 첩자들이 이를 보고 소어에게 반란군의 수가 무려 3만에 달하다고 과장보고를 하게 되었다.[14] 소어는 광릉 쪽이 미끼이고 자신이 강북에 시선이 가 있는 사이 반란군이 강동 전역의 병력을 집결시키는데 성공하고 동시에 강동 전역이 반란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고 판단하였다. 이로써 연릉의 구원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소어는 오합지졸이지만 3만이라는 큰덩어리를 이루는데 성공한 반란군을 부담스럽게 보고 강북의 질서유지용 병사 7천을 남긴 후 남은 3천을 이끌고 금릉 인근에서 원릉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와 합류해 금릉부터 수복하기로 마음먹었다.
3.8. 연릉전투
연릉군수는 동원할 수 있는 병력 1천5백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포위하고 있는 봉기군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이미 장교가 보낸 선발대 2천이 포위군과 합류한 상태였기에 숫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군수는 미끼용 병력 몇백을 내주며 본대를 이끌고 자신들을 쫓아오는 봉기군에게 연노를 쏴 주춤하게 만들어 성에 무사히 복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당초 목표였던 물자 획득에 실패하였고 장교의 봉기군 본대가 성을 겹겹히 포위하니 더이상 희망이 없다 여기고 봉기군에게 항복하였다.
장교는 항복한 군수를 비롯한 수뇌부를 참수하고 연릉에서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여 다음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곧 봉기군은 첩자들을 통하여 강북이 토벌군에게 평정되고 물리친 별동대가 다시 북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별동대를 요격하여 도하지점을 장악해 초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하여 장교는 다시금 군사를 이끌고 금릉으로 진군하였다.
곧 봉기군은 첩자들을 통하여 강북이 토벌군에게 평정되고 물리친 별동대가 다시 북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별동대를 요격하여 도하지점을 장악해 초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하여 장교는 다시금 군사를 이끌고 금릉으로 진군하였다.
3.9. 조선 관망하다
송나라의 객경으로 가 있는 고나를 통하여 강동의 반란을 인지한 조선 조정은 이를 어떻게 할 지 논의에 들어갔다. 기설은 태자에게 어찌했으면 좋겠냐고 시험하듯 묻자 태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반군을 지원하여 초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진언하였다.기설은 조선이 반란군을 지원할시 연종의 규칙의 위배되고 사람들이 태왕인 자신들을 욕할것이라 하였지만 기도는 정치를 잘하지 못한 초를 욕할 것이라며 반군 지원을 재촉하였다. 이에 기설은 어사대부 조하에게 태자대부를 소환해서 매우 치라고 명령을 내리고, 기도에게 조선의 입장에서 초의 부적절한 통치를 비판할수 있지만 그것이 반란군을 지원하는 명분을 될수없다며 나무랐다.
그리고 조선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이유가 없다며 관망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설이 관망을 결정하자 태자 기도가 강동의 사람들도 천하의 백성인데 천하의 관리자인 태왕이 어찌 버릴수 있냐며 반문하자 기설은 일순 멈칫하였지만 이내 태왕은 마을의 정장에 해당하고 정장은 마을의 질서를 책임지지 가정 내부사까지 억지로 개입할수는 없는 위치라고 정정해준다. 그러나 방금 전과 같이 나무라는 것이 아닌 대견하다는 듯한 어조로 바뀌어 있었고 시의가 적절치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해주면서 마무리지었다.
3.10. 소어야 또 속았구나!
3천의 병력을 이끌고 금릉 인근까지 도달한 소어였지만 합류하기로 한 원릉군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병력이 늘어난 만큼 필요한 보급품을 준비하느라 출발이 늦어진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후속병력을 기다리며 금릉성을 정찰하였는데, 금릉성 안쪽에 무수히 많은 밥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성벽마다 깃발이 올라가 있어 언뜻 보아도 대군이 주둔한 것처럼 보여졌다.물론 이것은 장교가 준비한 두 번째 기만책으로 연릉을 제압중인 본대가 돌아올 때 까지 조금이라도 적의 발을 묶어두기 위한 속임수였다. 소어는 자신의 병력 3천이 보이는데도 금릉성 병력이 가만히 있는 것에 적들도 야전으로 자신들을 제압할 자신이 없는 것이라 여기고 후속병력만 규합하면 문제 없이 성을 점령할 것이라 여겨 여유있게 기다리기로 하였다.
3.11. 2차 금릉전투
이윽고 소어가 기다리던 병력이 도착하여 총합 9천2백의 병력이 금릉성 앞에 집결하고 소어가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저 멀리서 흙먼지와 함성소리가 울려퍼지고 장교가 이끄는 봉기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어는 반란군의 금릉성 구원군이 왔다고 여겨 혀를 차며 야전과 공성 동시에 진행할 만큼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우선 적 구원군을 물리치기로 하고 야전 포진으로 전환하였다. 그렇게 금릉성 앞에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광릉에서 대승을 거두어 적의 전력을 얕보던 소어가 방심하는 사이 장교는 몸소 창을 쥐고 말을 몰아 선두에 서서 아군을 독려하며 전투에 나섰다. 이 때문에 초전의 기세가 장교측으로 기울어졌지만 소어는 이때까지만 해도 적군이 그저 꽤 하는구나 정도로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초전의 기세가 기울어지자 원릉군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합을 전혀 맞춰보지 못한 두 군대에 균열이 생기면서 틈을 보이자 장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굴위가 지휘하는 원릉군에 맹공을 가하였다.
장교의 무위와 봉기군의 돌격에 원릉군이 무너져 내렸고 아군이 무너지자 초군 전체가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장교와 아직 아군의 병력이 더 많다고 여긴 소어 양측 모두 장기전에 돌입하였고[15] 격돌한 두 군세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병력의 2할8푼을 상한 소어는 이 이상 싸울 수 없다 판단하고 봉기군 측에 금릉공략을 포기할 테니 퇴로를 열어달라고 협상을 요청하였다. 장교 역시 이 이상 싸우기에는 아군도 지쳐있고 물자도 없었기에 수락하여 전투는 무승부로 종료되었다.[16]
장교의 무위와 봉기군의 돌격에 원릉군이 무너져 내렸고 아군이 무너지자 초군 전체가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장교와 아직 아군의 병력이 더 많다고 여긴 소어 양측 모두 장기전에 돌입하였고[15] 격돌한 두 군세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병력의 2할8푼을 상한 소어는 이 이상 싸울 수 없다 판단하고 봉기군 측에 금릉공략을 포기할 테니 퇴로를 열어달라고 협상을 요청하였다. 장교 역시 이 이상 싸우기에는 아군도 지쳐있고 물자도 없었기에 수락하여 전투는 무승부로 종료되었다.[16]
4. 결과
4.1. 장교 부용국을 목표로
힘겨운 싸움을 끝낸 장교의 봉기군이었지만 또 하나의 어려움이 닥쳐왔다. 바로 봉기에 가담한 인민들이 점차 싸우기를 꺼리는 것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초인들로 이들은 못된 관리들 쫒아내고 왕에게 항의하는 수준을 생각했지 아예 초에 반기를 들고 독립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인민들 내부에서 이번 싸움의 목표가 무엇이냐며 아우성을 쳤고 몇몇은 아예 목표도 뚜렷하지 않은 봉기군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이탈하기도 하였다.
장교와 봉기 수뇌측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논의하였는데 결론적으로 이 이상 초를 상대로 싸워 독립하는 것은 무리수였고, 장교 자신이 방계 왕족임을[17] 내세워 부용국을 세우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고 영도에 사신을 보내었다.
이들 대부분이 초인들로 이들은 못된 관리들 쫒아내고 왕에게 항의하는 수준을 생각했지 아예 초에 반기를 들고 독립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인민들 내부에서 이번 싸움의 목표가 무엇이냐며 아우성을 쳤고 몇몇은 아예 목표도 뚜렷하지 않은 봉기군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이탈하기도 하였다.
장교와 봉기 수뇌측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논의하였는데 결론적으로 이 이상 초를 상대로 싸워 독립하는 것은 무리수였고, 장교 자신이 방계 왕족임을[17] 내세워 부용국을 세우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고 영도에 사신을 보내었다.
4.2. 초나라의 대책
반란군 토벌에 실패한 소어는 반란군이 상상이상으로 잘 조련된 정예군이라 여기고 자신과 강동의 질긴 인연에 씁쓸한 감정을 내비치며 영도에 진압 실패와 추가 병력증원을 요청하였다.
소어의 서신에 초조정은 역시 대책회의에 들어갔는데, 마침 공적을 세워 예전의 위신을 되찾고 싶던 경양이 자신에게 2만의 군사를 내어주면 즉시 반란을 제압하겠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소서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며 그만큼 복구에 비용이 들어간다며 난색을 보였다.[18]
결국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자 왕제 황헐이 나서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어째서 강동이 3번이나 반역을 일으킨 지역이 되었는지 짚어가면서[19] 지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일단 반란군측과 대화를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마침 장교가 보낸 서신[20]도 있었기에 결국 초왕 웅횡은 장교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굴서에게 장교를 강동후로 봉한다는 서신을 들려서 강동으로 파견하였다.[21]
소어의 서신에 초조정은 역시 대책회의에 들어갔는데, 마침 공적을 세워 예전의 위신을 되찾고 싶던 경양이 자신에게 2만의 군사를 내어주면 즉시 반란을 제압하겠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소서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며 그만큼 복구에 비용이 들어간다며 난색을 보였다.[18]
결국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자 왕제 황헐이 나서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어째서 강동이 3번이나 반역을 일으킨 지역이 되었는지 짚어가면서[19] 지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일단 반란군측과 대화를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마침 장교가 보낸 서신[20]도 있었기에 결국 초왕 웅횡은 장교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굴서에게 장교를 강동후로 봉한다는 서신을 들려서 강동으로 파견하였다.[21]
4.3. 장교 강동후에 봉해지다
한편 초조정에서 장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답변을 듣자 장교는 서둘러서 부대를 정비하고 노획한 장비중 깨끗하거나 외관상 멀쩡것들을 골라 체격이 좋은 병사들에게 입히고 마치 정예병인마냥 꾸몄다.
주위에서 화친이 결정되었는데 왜 이러냐고 묻자 장교는 저들이 기만술에 속아 자신들을 3만의 대병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분명 화친을 하지 않고 진압할 것이라고 말하며 주변을 재촉하였다.[22] 장교의 이런 준비는 빛을 발해 회담장에 도착한 굴서의 눈에 오합지졸 6천이 굉장히 잘 조련된 정예병으로 보여졌다. 굴서는 웅횡의 조서를 읽으며 장교를 강동후로 봉하고 장강 인근 지역인 금릉, 운양, 연릉을 제외한 회계군 전체를 영지를 삼는다고 하였다. 이에 장교가 받아들이니 기원전 287년 강동지역에서 일어난 장교의 난은 마무리되었다.
주위에서 화친이 결정되었는데 왜 이러냐고 묻자 장교는 저들이 기만술에 속아 자신들을 3만의 대병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분명 화친을 하지 않고 진압할 것이라고 말하며 주변을 재촉하였다.[22] 장교의 이런 준비는 빛을 발해 회담장에 도착한 굴서의 눈에 오합지졸 6천이 굉장히 잘 조련된 정예병으로 보여졌다. 굴서는 웅횡의 조서를 읽으며 장교를 강동후로 봉하고 장강 인근 지역인 금릉, 운양, 연릉을 제외한 회계군 전체를 영지를 삼는다고 하였다. 이에 장교가 받아들이니 기원전 287년 강동지역에서 일어난 장교의 난은 마무리되었다.
5. 영향
5.1. 민월과 장신의 축하사절
이전 봉기때 장교가 지지를 요청하였지만 사실상 거절하였던 민월측은 장교가 강동후에 봉해지고 봉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즉시 축하사절을 보내어 친선을 요청하였다. 장교는 민월의 낮두꺼움에 부아가 올랐지만 여기서 민월과의 관계를 파탄 낼수는 없었기에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또한 한중군수 장신이 소경굴 삼대세가 체제을 무너뜨릴 호기로 보고 장교에게 강동후에 봉해지는것을 축하하면서 같은 장왕의 후예인 장씨인점을 들어 친선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었다.
장교 역시 장신을 이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고 별다른 은원도 없었기에 시원스럽게 이를 수락하였다. 초나라 동쪽끝과 서쪽끝의 두 장씨가 손을 잡게 된 것이다.
또한 한중군수 장신이 소경굴 삼대세가 체제을 무너뜨릴 호기로 보고 장교에게 강동후에 봉해지는것을 축하하면서 같은 장왕의 후예인 장씨인점을 들어 친선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었다.
장교 역시 장신을 이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고 별다른 은원도 없었기에 시원스럽게 이를 수락하였다. 초나라 동쪽끝과 서쪽끝의 두 장씨가 손을 잡게 된 것이다.
5.2. 중원의 반응
워낙 멀리 떨어진 강동에서의 사건이었기에 대부분이 봉기가 종료된 이후에 알게 되었으나 예외적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비교적 강동과 가까운 송과 그 송을 통하여 사실을 들은 조선만이 내막을 알고 있었다. 송과 조선은 봉기 자체를 관망하기로 하였기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고, 촉과 파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한은 초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더이상 이전의 힘을 보일 수 없다는 사실만을 인지하여 마찬가지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23] 제는 자국에 귀의한 월국 출신 상인들을 앞세워 장사 판로를 뚫었는데만 신경쓰고 제조정에서는 별다른 논평을 내지 않았다.
다만 위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는데 조선왕의 조카사위[24]라는 연줄이 있어 빠르게 사태파악을 할 수 있었던 위왕 위리는 위포에게 어찌 대응할지를 묻고 위포는 상부상조를 명분으로 초를 지원하자고 진언하였다. 이에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초왕에게 선물을 보내며 중원평화를 위하여 분골쇄신한다며 칭송하였다.[25]
다만 위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는데 조선왕의 조카사위[24]라는 연줄이 있어 빠르게 사태파악을 할 수 있었던 위왕 위리는 위포에게 어찌 대응할지를 묻고 위포는 상부상조를 명분으로 초를 지원하자고 진언하였다. 이에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초왕에게 선물을 보내며 중원평화를 위하여 분골쇄신한다며 칭송하였다.[25]
5.3. 초 장교를 경계하다
운양에서 복귀한 굴서를 통하여 장교가 상당한 양의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웅횡은 강동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지만 여러 관리의 눈을 피하여 정예병을 육성해온 장교의 능력과 야심에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26]
[1]
지속적인 반란지역인 강동에 대한 견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2]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
[3]
물길과 가까운 지역과 강북은 제외
[4]
장교 본인이 토벌하였다. 그러나 장교가 파직당한 직후 잔당들이 장교와 접촉하여 포섭. 이후 장교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5]
같은 굴씨인 굴서가 여론을 주도하였다.
[6]
애초에 한중지역 지원을 위한 자원이었다. 한중과 동초의 규모는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으로 크다.
[7]
그러나 이때 아직 봉기를 지지하지 않는 연릉은 버려지게 되었다.
[8]
연릉군수는 장교의 거짓정보는 파악하였지만, 이를 반란군이 아직 동초지역을 전부 확보하지 못했다고 착각하여 곧 지원군이 올것이라 여겼다.
[9]
송나라는 초나라를 도와 반란군을 무찔러야 하는 입장이다.
[10]
당연히 봉기 수뇌부는 광릉에 없었고 이는 장교의 거짓정보였다.
[11]
장교가 이끄는 군대가 정규군이었다면 초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겠지만 미숙련의 반란군이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초기에 굴위가 장강을 장악하지 못하였다면 3할 이상의 피해가 나왔을 것이다.
[12]
앞선 전투의 피해로 7천에서 6천3백으로 줄어들었다.
[13]
물론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숫자로 금릉에서 포위될 뻔하여 급하게 도망치는 와중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동초 지역 전체 동원가능 인력의 오차범위 내이기도 했기 때문에 속임당하는 입장에서도 신빙성이 굉장히 높았다.
[14]
이 또한 역시 동초 지역의 예상 동원가능 인력 상정내였다.
[15]
봉기군은 연릉을 제압하면서 장기전을 대비할 물자를 확보하였다.
[16]
그러나 명백히 병력과 숙련도가 모두 앞서있던 초군이 목표인 금릉 점령에 실패하고 먼저 물러난 만큼 금릉 사수에 성공한 봉기군의 승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17]
장교는 초장왕의 후예로 본인 스스로도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18]
강동뿐만 아니라 한중 남양에도 지원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19]
지난 1차 반란때 자칫 초가 망할 위기까지 몰렸었기 때문에 초조정에서 알게모르게 강동을 두려워하고 그지역이 완전히 회복되는것을 꺼렸다.
[20]
대충 용서해주면 부용국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
[21]
이때 강동을 담당하던 굴씨에게 쏟아질 비난들을 웅횡 스스로에게 돌리며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고 굴씨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함으로서 굴서와 굴씨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22]
또한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자들을 설득하고 만약 안될시 제거하여 후환을 없앴다.
[23]
한왕은 경취 죽었을때 잔치 안 벌인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기라며 악담을 퍼부었다.
[24]
위포가 조선에 여러 연줄을 만들어두어 빠른 정보획득에 성공하였고, 이러한 행보에 어장주로 부터 신릉군 같다는 평을 받게되었다.
[25]
초왕을 칭송함으로 초가 연종질서에 더욱 얽메이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26]
장교는 이전에 광릉군수로 있었고 그가 억울하게 파직되었다는 사실을 주변에선 알고 있었기에 봉기때 실제로 장교에 포섭되어 활동한 이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