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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38

곽자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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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안사의 난 이전까지1.2. 안사의 난 시기
1.2.1. 안록산의 난 진압의 최고 공로자1.2.2. 고난을 겪던 사사명의 난 시기
1.3. 토번의 침략을 막아내다1.4. 복고회은의 난을 진압하다
1.4.1. 복고회은의 봉기1.4.2. 복고회은, 외세를 끌어들이다.1.4.3. 위구르와 화친하고, 토번을 물리치다.
1.5. 당의 수호자
1.5.1. 일시적인 휴식과 전장으로의 복귀1.5.2. 토번의 거듭된 침략을 방어해내다.
1.6. 은퇴와 사망

1. 생애

1.1. 안사의 난 이전까지

곽자의의 유명세에 비해, 환갑 바로 전 해인 59살 당시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행보는 매우 평범했다. 그의 아버지인 곽경지는 5개 주의 지사를 지낸 것이 최고위직 경력으로, 그의 집안은 무가라기보단 문관 집안에 가까웠다. 곽자의 이전엔 그저 그런 가문이다 보니 관직생활을 언제부터 했는지도 뚜렷하지 않다. 이름있는 무인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음서나 군공이 아니라 측천무후가 만든 무거라는 시험에 합격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곽자의는, 화주 정현 사람이다. 아버지 곽경지는, 수, 위, 계, 수, 사 5주 자사를 역임했고, 아들 곽자의로써 귀하게 되어, 태보를 추증받았으며, 기국공에 추봉되었다. 곽자의는 6척여 정도의 키였고, 체모가 빼어나고 헌걸찼는데, 무거로 고등을 받아 좌위장사에 보임된 것으로 관력을 시작해, 여러 군사(軍使)로 누천되었다.

천보 8재(749), 목라산에 횡새군 및 안북도호부를 설치하고, 곽자의에게 그 군사를 영하도록 명했으며, 좌위대장군에 배임되었다. 천보 13재, 횡새군 및 안북도호부를 영청책 북쪽으로 옮겨 성을 쌓고, 이어 횡새군을 천덕군으로 고쳤으며, 곽자의를 군사로 하였고, 구원태수, 삭방절도우병마사를 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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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곽자의는 자가 자의이고, 화주 정현 사람이다. 키가 7척 2촌이었다. 무거로 2등에 등제하여 좌위장사에 보임되었고, 누천되어 선우부도호, 진원군사가 되었다. 천보 8재, 목라산에 처음으로 횡새군 및 안북도호부를 구축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곧 군사로 하였다. 기울고 좋지 않은 땅이 외지고 경작할 수 없어, 옮겨서 영청에 수축하고, 천덕군으로 이름지었으며, 또 군사로써 구원태수를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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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그나마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일화라면 아직 관직이 미천할 당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그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뻔한 걸 지나가던 이태백이 곽자의를 변호해 무죄방면으로 풀려났단 것[1]과 천보 9재(750년)에 삭방절도사 장제구가 군량을 자기 멋대로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바람에 분노한 병사들에게 맞아죽을 뻔한 걸 당시 병마사였던 곽자의가 몸으로 막아서 구해줬다는 것이다.

이윽고 천보 14재(755년), 그의 나이 59세 때, 당제국의 역사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안사의 난이 일어난다.

1.2. 안사의 난 시기

1.2.1. 안록산의 난 진압의 최고 공로자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던 해에 곽자의의 직속상관인 삭방절도사는 안록산의 일족인 안사순이었다. 때문에 중요한 위치인 삭방진의 지휘권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2][3] 호부상서로 삼아 불러들이고[4], 곽자의를 삭방절도사로 임명한다.(11월 21일) 하나의 군진과 휘하 병력을 독립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절도사가 된 것이다. 이때에 삭방절도사직은 돌궐을 맡아 방어하는 서북변 방위의 중핵 중 하나로써 치소는 영주에 있었으며 휘하 총병력은 64,000여 명이었고 천보 연간의 10절도사 중에서도 지휘병력 규모가 4번째로 큰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곽자의는 곧바로 군사활동을 시작한다. 안록산 측 장수인 대동군사 고수암이 삭방진의 영내인 진무군으로 진격해오자 하곡에서 반격, 격파한 후 하동 지역까지 전진, 정변군을 함락해 버린 것. 대동병마사 설충의가 이 정변군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좌병마사 이광필, 우병마사 고준, 좌무봉사[5] 복고회은, 우무봉사 혼석지를 지휘하여 박살내 버리고 기병 7,000여 명을 파묻어 버린다. 직후 계속 진격해 운중을 포위하고, 별장 공손경암에게 2,000여 기병을 맡겨 마읍을 공략했으며 태행 8형 중 하나인 동형관을 장악한다. 이 공적으로 곽자의는 어사대부직을 겸하게 된다.

756년, 당현종은 곽자의에게 '삭방으로 귀환해 병력을 추가 징발, 안록산에게 함락된 낙양을 공략하고, 여기에 더해 추가로 장수 1명을 정형을 통해 하북으로 나아가게 해 하북 지역을 탈환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곽자의는 이광필을 추천한 후[6] 그에게 10,000여 명의 병력을 나누어주고 삭방진으로 귀환해 병력을 모은다. 충분한 병력을 모은 곽자의가 다시 출격한 것은 3월이었으며, 상산에서 격전을 벌이던 이광필과 합류한 것은 4월 9일이었다.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갔을 수 있으나, 통감에 따르면 두 장수가 합류하자 총병력이 10만에 달했다고 한다.[7]

곽자의와 이광필은 이 병력을 이끌고 구문성에서 사사명을 대파했다. 이후 박릉(博陵, 하북성 정주시)으로 철수하는 사사명을 따라붙는다. 그러나 10일에 걸친 공격에도 박릉이 함락되지 않자 일단 상산으로 철수하면서 하북성 조현을 공략, 하루만에 함락하였다. 그리고 사사명이 병력을 모아 곽자의와 이광필의 군대를 추격해오자 행당에서 날랜 기병 500기를 번갈아 내보내 작은 교전을 거듭하여 지치게 한 후, 3일만에 철수하는 사사명군을 역공, 사하(沙河, 호타하의 지류)에서 다시 한번 때려눕힌다. 이에 안록산이 다수의 이민족 기병을 포함한 지원 병력을 사사명에게 보내 합류시켰고, 10,000명에 달하는 튀르크계 동라와 예락하 병사를 포함한 50,000여명의 군대로 재편한 사사명이 항양에서 다시 도전해왔다. 강력한 군대를 편성한 사사명군에 의해 당군 내에서 약간의 동요가 있었던 듯 하나 곽자의는 이를 장교 1명을 처형하는 것으로 다잡고 교전, 사사명군에 2,000명의 전사자와 500명의 포로라는 피해를 입혔다.

이후 야전 축성을 통해 적의 공세를 방어한 곽자의는 낮에는 군사 시위, 밤에는 야습을 거듭하여 사사명군을 지치게 한 후 가산(嘉山 하북성 곡양현 동북)에서 이광필과 함께 공격, 박살을 내 버린다. 사사명군은 40,000명의 전사자, 10,000명의 포로를 내는 등 거의 전멸했고, 사사명 자신도 말에서 떨어져 상투를 드러낸 채로 맨발로 도주했다가 밤중에야 간신히 귀환에 성공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사사명은 박릉으로 도주했고, 하북의 10여 군이 다시 당나라에 귀부했으며, 곽자의와 이광필은 박릉을 포위했고, 범양과 낙양 사이의 도로가 끊어져 안록산은 낙양에 고립되어 버린다. 이대로만 갔으면 소모전으로든 공성전으로든 안록산을 죽이고 난을 끝낼 수 있었겠지만, 양국충의 삽질로 동관이 돌파당하고 장안이 함락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전황이 뒤집힌다. 곽자의, 이광필은 삭방군의 처소인 영무에서 황제로 즉위한 당숙종을 호위하기 위해 부장들 몇 명과 약간의 병사만 남겨놓고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며 영무로 돌아가야 했던 것. 사사명은 이 기회를 틈타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영무로 50,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귀환한 곽자의, 이광필은 각각 무부(병부)상서, 영무장사(곽자의), 호부상서, 북도(태원)유수(이광필)직을 받았으며, 둘 다 동평장사직을 제수받는다.

이후 이광필은 다시 태원을 수비하기 위해 파견되고, 곽자의는 북쪽으로 파견된다. 안록산군을 이탈한 아사나종례가 북방 기미주(이민족들을 사민시켜 관리하는 지역)를 선동하면서 삭방, 북정진의 북변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 곽자의는 복고회은을 데리고 아사나종례를 제압하기 위해 천덕군으로 간다. 그곳에서 병력을 모은 곽자의는 아사나종례가 이끈 동라(同羅, 현재의 몽골 울란바토르 시 북부를 기반으로 하는 당나라의 부용 이민족)족 병사들을 복고회은의 분전에 힘입어 격파하고, 이후 재봉기한 동라족을 12월, 위구르의 지원군과 함께 유림하에서 대파, 참수 30,000여명, 포로 10,000여명에 달하는 전공을 세우며 평정한다.

757년, 곽자의는 하동 지역 또한 제압한다. 동관 함락 후 북진해 하동의 남쪽 절반을 장악했던 최건우가 지키던 하동성을 성 내의 당나라에 협조하는 세력들의 힘을 빌어 손쉽게 장악, 최건우군을 전사 4,000, 포로 5,000의 피해를 입히며 쫓아낸 곽자의는 곧바로 남하해 안읍까지 장악한다. 이로써 장안과 낙양 사이, 황하 이북의 하동 지역을 평정한 곽자의는 병력을 파견해 동관까지 장악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안경서는 그 기세를 몰아 3월 23일, 안수충으로 하여금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하동을 재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가하나 곽자의의 전술 앞에 전사자 8,000, 포로 5,000의 피해만 입고 격퇴당한다.[8] 그리고 4월, 당숙종은, 곽자의에게 사공직을 제수하고, 당군의 대반격을 실제 지휘할 천하병마부원수로 임명하여 봉상으로 부른다.[9] 이에 안경서의 장수인 이귀인이 중장기병 5,000으로 저지에 나섰으나 곽자의는 복고회은, 왕중승, 혼석진, 이약유와 함께 유운교로 끌어들여 이귀인을 가볍게 격파해 버린 다음 왕사례와 합류한다.

이후 장안 근교인 휼수까지 전진하나 안수충의 기병대에 의해 대란 발발 이후 최초로 참패를 맛보고, 막대한 군수물자를 상실한 채 무공까지 물러선다. 이때의 참패로 곽자의는 관직을 깎아달라 청원하여 좌복야로 내려앉았다. 이때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으기 위해 관직과 작위를 남발했다고 전한다. 757년 9월, 당나라는 봉상에 집결한 병력을 총동원해 장안과 낙양 탈환에 나선다. 곽자의는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천하병마부원수로써 당군 뿐만 아니라 회흘, 대식(아랍) 등 여러 국가의 병사들이 섞인 이 다국적 연합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자세한 설명이야 안사의 난 항목을 보도록 하자. 결과만 말하자면 이때의 반격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항적사 전투에서 장안 방위를 위해 뛰쳐나온 안경서군 10만을 격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동관에서 따라붙어 5,000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고, 신점 전투에서 위구르 병력을 우회기동시켜 다시 한번 안경서군 15만을 완파, 딱 1달만에 장안, 낙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성공은 곽자의를 당대 장군 중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당숙종이 곽자의에게 "나(당숙종)의 집안과 나라는 경을 통하여 다시 만들어졌소."라고 할 정도였다. 758년, 곽자의는 다른 8명의 절도사와 함께 업성에 틀어박혀 항전하는 안경서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움직인다. 이때의 작전에서도 곽자의는 요격나온 안경서를 대파하여 업성으로 밀어넣고, 맹공을 가해 함락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반란의 진압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귀부했다 다시 반란을 일으킨 사사명이 안경서를 구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2.2. 고난을 겪던 사사명의 난 시기

안록산의 난 시기에 곽자의가 영광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면, 사사명의 난 시기의 곽자의는 당숙종 주위의 환관 어조은과 정원진의 참소로 인해 고난을 겪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숙종 대부터 대종 초기는 당왕조 최악의 개노답 3간신 이보국-정원진-어조은 환관 트리오가 날뛰던 시절이었다. 이거 뭐 십상시도 아니고... 곽자의는 이때 이미 하동~하북 일대에서의 대전공으로 이미 군부 내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었고, 양경 탈환시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으로써 그 위상이 이미 대내외적으로 드높았었다. 특히 이때에 참전했던 이민족 병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후의 일이지만 복고회은의 난 회흘은 "...천가한이 이미 안가[10]하였다고 말하고 영공(곽자의) 역시 연관[11]하여 중국에는 주군이 없다고 말하니..."라고 말해 곽자의를 사실상 중국의 주군, 즉 황제와 거의 동격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런 드높은 위상과 공적이 결국 내외의 시기와 두려움을 낳은 셈이다.

시작은 상주 안양하 전투에서 안경서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사사명의 원군 5만이 8명의 절도사가 지휘하는 60만의 병력을 꺾고 안경서의 구원을 기어이 성공시킨 것. 당연히 이정도 패전에 대한 책임을 안질수가 없어서 누군가 져야하긴 했는데 이때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곽자의가 패전의 책임자로 거론될 이유는 거의 없었다. 곽자의는 절도사들의 연합군에서 후미를 맡았으며 전선에서 절도사들을 뚫고 진격한 사사명의 군을 상대로 후미를 지켜 퇴로를 엄호하며 하양을 지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오히려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된 공적을 세웠다. 이 당시 제일 문제였던 인물(들)은 총 3인이었는데 첫째는 절도사들이 서로 개별적으로 행동할거라 여겨 그들을 통제할 최고지휘관을 선정하지 않은 당숙종과 그나마 중재라도 하기위해 보냈던 환관 어조은, 그리고 패장 장본인들인 8명의 절도사들이었다.

당숙종도 이를 알기 때문에 곽자의에게 무언가 따지긴 커녕 패전 바로 다음날 3월 30일 곽자의를 동기(동부 경기지방), 산동, 하남제도원수로 임명하고 동시에 권지동경유수로 삼아 하동, 하남, 하북 일대의 군권을 총괄하는 직함을 내려 이 일대의 절도사들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임명, 실수를 만회하려 했다.

다만 패전의 최고 책임자중 하나인 관군용사(觀軍容使)[12]였던 어조은이 오히려 곽자의를 모함하였고, 어조은에 대한 숙종의 신임이 너무나 두터워서 결국 곽자의는 삭방절도사직을 이광필에게 위임하며 장안으로 상경하게 된다.[13]

이렇게 곽자의는 대부분의 실권을 잃은채로 장안에 4개월간 머무르게 되나 이런 인재를 썩혀 둘정도로 그 당시 당나라의 상황이 절대 좋은편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토번의 예속민족중 하나인 당항족( 탕구트라고도 부르며 후의 서하를 세운 민족)들이 당의 혼란을 틈타 서북변을 노략질하며 관중 근처까지 그 피해가 미치기 시작해 당의 중앙정부도 이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 곽자의가 장안에 상경하고 4개월동안 당나라는 서북변에 설치했던 빈·녕등주를 둘로 쪼개 부방·단연절도를 창설하고 이를 위북절도로 명명, 남은 지역을 빈녕절도로 명명하여 2개의 번진을 창설, 당항족 제압에 나섰고, 이들 두 번진에 위엄과 명성을 실어주기 위해 곽자의로 하여금 장안에 머무르게 한 상태에서 '양도(빈녕, 부방) 절도사'직을 창설해 그 자리에 앉힌다. 사실 절도사면서 장안에서만 활동한단 점에서 실질적 권한은 적은 명예직이긴 하지만 그래도 4개월만에 복권하게 된 것. 다만 단지 명예를 등에 업은것만으론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이후 8달동안 계속 당항족이 침입하자 '나라가 이리 뒤숭숭한데 곽자의같은 명장없이 해결할수 있겠나'라는 여론이 점점더 확산되었고 결국 그해 9월 8일 당숙종은 곽자의에게 빈주로 나가 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라 명하여 실권을 주었으며 곽자의가 빈주에 도착해서 군 지휘권을 인수하자마자 당항족은 곧장 물러났다고 한다.

이후 21일, 당숙종은 곽자의로 하여금 사생영무군(금군 제 7군과 8군)과 삭방·부방·빈녕·경원 등 여러 군 처소의 병력 및 번·한족 70,000명을 징집해 범양을 평정하고 돌아오면서 하북을 평정할 것을 명령한다. 이광필이 하남에서 사사명과 치고받으며 전선이 지지부진하자 곽자의에게 난의 평정을 명한 것. 그러나 어조은이 또다시 10일에 걸처 당숙종에게 곽자의를 열심히 참소하고 또 행정처리를 방해해서 취소시키고 이 때문에 곽자의는 또다시 장안으로 상경해 1년을 날백수로 보내게 되었다(...)[14]

그런 그가 다시 전면에 나선 것은 762년 2월. 하동 일대 번진의 병졸들이 기나긴 전란과 그 과정에서의 자신들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절도사들을 죽이는 일이 빈발하게 되었을 때였다. 이때 하동 일대 번진(하동, 삭방, 진서, 북정)의 사졸들은 긴 전란으로 인해 당 조정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대우가 갈수록 약화되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곽자의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일부 야심가들이 이런 사졸들의 마음을 이용해 그들을 선동하여 폭동을일으키게 한 것. 당 조정은 하동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동및 반란군이 낙양의 사조의의 본대[15]와 연계하여 세력의 팽창 및 단일화되는 것을 두려워해 다시금 곽자의를 기용하고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분양왕 작위를 내려 곽자의를 천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지삭방·하중·북정·노택절도행영겸·정국등군 부원수[16]로 삼아 장안의 비단 4만필, 포 5만 단, 쌀 6만 석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을 진압하고 위무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때 이미 당숙종은 중병이 들어서 신하들이 알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곽자의가 "이 늙은 신하가 명령을 받았으니(이때 곽자의 연세가 66세) 곧 밖에서 죽게 될 것인데, 폐하를 뵙지 아니하면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청하자 당숙종은 곽자의를 침실로 들어오게 하여 "하동의 일은 모두 경에게 맡기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곽자의는 하동으로 가는 길에 사조의가 이포옥(정진절도사)을 택주에서 포위하고 있던 것을 군대를 움직여 구출하고 갔으며, 임지에 도착한 것은 4월 말이었다. 일단 가져온 물자를 나누어 준 곽자의는 봉기 주동자들을 불러들였고, 내심 공을 치하할 거라 여기며 부름에 응한 주동자들을 군율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이 소식이 퍼지자 아직 곽자의가 도착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주동자들이 끌려나와 처형되었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여겨졌던 하동의 안정화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뒷처리가 끝나고, 곽자의는 8월 23일, 장안으로 돌아와 조현한다. 이미 이때에 당숙종은 사망했고, 당대종이 즉위해 있었다. 그런데, 당대종 즉위에 공을 세웠던 환관 정원진이 곽자의의 공로와 권세가 크고 강한 것을 보고 참소하였고, 곽자의는 결국 스스로 당대종에게 부원수·절도사직을 다 내려놓겠다 청했으며 당대종은 이를 받아들인다. 또한 곽자의는 지속되는 참소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내려온 조서 1,000여 편을 모두 모아뒀다가 반납하였다.
"폐하께서 신에게 내리신 조서 1,000여 편은 영무, 하북, 하남에서 신이 가는 곳까지 보내 주신 친필 칙서로 모두 20권이온데, 어리석어 죽을 죄를 범하여 이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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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당대종은 이에 곽자의에게 실호 700여 호를 더해주고 숙종산릉사직을 제수하여 곽자의를 안심시켰다. 이후 곽자의는 간간히 상소를 올리는 것을 제하고는 다시 1년여 가까이 조용히 지낸다. 762년 10월에 복고회은이 위구르를 회유하자 당대종은 천하병마원수로 임명된 옹왕 이괄의 보좌를 맡은 부원수로 곽자의를 삼고 싶어했으나 또다시 정원진과 어조은이 반대해서 이 또한 중지된다.이 둘 중 하나 특히 어조은만 아니었어도 반란은 진작에 종결되었다.

이 시기 곽자의는 자기가 조정에서 끝없이 참소와 음해를 당하는걸 알았으며사실 모르는게 이상하지만 이런 정치적 분쟁으로 자신이 어이없이 해를 입을까 몹시 두려워했던걸로 보인다. 이는 곽자의만이 아니라 외부로도 알려져 있어서 복고회은 또한 난을 일으킬때 삭방군과 위구르의 군대를 자신에게 끌어들일 당시 '곽자의가 어조은에게 살해당했으니 그의 원수를 갚자'라는 식으로 선동하기도 했다.

1.3. 토번의 침략을 막아내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곽자의가 다시 복귀한 것은 763년, 대대적인 토번의 침략으로 인해서였다.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전해지는 토번의 장안 점령사건이 바로 그것. 토번의 장안 침략에 대한 대체적인 정세는 사사명의 난을 참조하도록 하자. 토번의 장군 다짜뤼공(達扎路恭)이 이끄는 토번군은 첸포 치쏭데쩬의 명령을 받고 20만 병력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구체적인 곽자의의 행보만을 보자면 당대종은 곽자의를 토번이 무공을 장악한 소식이 들어온 10월 2일에 불러들어 재기용한다. 옹왕 이괄[17]을 관내(關內)원수로, 곽자의를 부원수로 삼아 함양에 진주시킨 것. 동시에 곽자의는 중서령으로도 복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이 시기 이후 곽자의를 다른 사람들이 '영공(令公)' 내지는 '곽영공'으로 부르기 때문.

이때 곽자의는 오랫동안 폐출된 상태여서 부곡들이 흩어진 상태였는데, 명령이 내려지자 그나마 근처에 있었던 20명의 기병을 이끌고 함양으로 가서 지휘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18] 그러나 함양에서 모은 병사는 수백명에 불과했다. 이에 곽자의는 판관인 중서사인 왕연창을 장안에 보내 그나마 남은 금군만이라도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정원진이 아예 황제와 알현도 못하게 왕연창을 막았다. 거기다 이광필을 비롯한 당나라에 충성심을 가진 절도사들은 정원진의 횡포에 분노,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나마 10월 4일, 위북절도사의 수하인 위북행영병마사 여월장이 2,000여 명을 이끌고 주질(섬서성 주질현)에서 토번을 막아섰지만 토번이 다시 공격하자 결국 현격한 병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격파당하기도 했다.

10월 7일, 다짜뤼공이 이끄는 토번군은 장안으로 접근한다. 토번이 편교(便橋, 서위교, 섬서성 함양시 서남쪽)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곽자의가 급히 장안으로 귀환했으나 당대종은 이미 섬주(陝州)로 파천을 결정하고 장안을 떠난 상태였다. 거기다 이렇게 황제가 피신하자 황제를 호위하던 금군이 뿔뿔히 흩어졌으며, 사생장 왕헌충이 이끄는 400여 기병이 황제를 버리고 다시 장안으로 들어와 풍왕 이공 등 10여명의 왕들과 함께 토번으로 귀부하려 들기도 했다. 심지어 이 왕헌충은 "지금 주상께서는 동쪽으로 옮기셨고 사직에는 주인이 없는데 영공께서는 자신이 원수이시니 폐위시키고 세우는 일은 한 마디 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여 곽자의에게 당대종을 폐위시키고, 같이 있던 황실 출신 왕들 중 1명을 황제로 세우자고 설득을 시도하기도 했다.[19]

물론 곽자의는 그를 나무라고 왕헌충의 병력을 인수, 당대종이 거하는 행재소로 이동해 호송하게 하고, 자신은 기병 30기로 후방에서 이를 엄호한다. 때마침 하북에 있던, 어조은이 지휘하는 신책군까지 섬주에서 당대종과 합류하면서 간신히 당황실은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10월 9일, 토번은 장안을 장악한다. 장안에 입성한 토번은 오던 와중에 억류한 광무왕 이승굉[20]을 황제로 임명하고, 백관을 두면서 한림학사였던 우가봉을 재상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후 토번은 장안을 심하게 약탈했다고 전한다.

10월 12일, 당대종은 섬주에 도착했고, 흩어졌던 백관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 기병 30기로 어가를 엄호하던 곽자의는 어숙천(御宿川, 장안의 서남쪽을 흐르는 강)에서 산을 끼고 돌아 동쪽으로 이동, 남전(藍田, 섬서성 남전현)을 지나다가 원수도우후 장희양 및 봉상절도사 고승과 합류했고, 지휘병력은 1,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곽자의는 왕연창을 상주(商州, 섬서성 상주시)로 보내 장안에서 파천하면서 흩어진 6군(금군)의 이탈병들을 긁어모으고, 무관(武關)의 방어병력까지 끌어모아 간신히 4,000여 명으로 군을 증강시켰다. 이 병력을 가지고 곽자의는 혹시라도 토번이 섬주로 나아가 황제를 위협할까봐 남전 근처인 칠반에서 4일 동안 머물며 토번군을 감시하다가 그제서야 이탈한다.

겨우겨우 병력을 4,000이나 모은 곽자의였으나, 20만에 달하는 토번군을 장안에서 쫓아내기는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곽자의는 이 정도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장안 탈환에 나선다.(...) 당대종은 토번이 동관을 넘어 동진할 것을 두려워해 곽자의를 행재소로 불렀으나, 곽자의는 이에 대해 "신은 경성(장안)을 수복하지 않으면 폐하를 알현할 수 없으며, 만약에 남전으로 군사를 내보내면 오랑캐는 반드시 감히 동쪽으로 향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표문을 답신으로 보내고 남전으로 가서 토번을 견제한다. 때마침 부연절도판관 단수실이 부연절도사 백효덕을 설득하는 데 성공, 관서(동관 서쪽) 절도사 중 유일하게 병사들을 이끌고 섬주로 가서 행재소로 합류, 병사들을 모아 서진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어려움이 약간씩 풀려가기 시작한 것이 다행일 것이다.

때마침 토번군이 장안에서의 약탈품을 본국으로 보내면서 전력이 어느 정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에 곽자의는 좌우림대장군 장손전서[21]로 하여금 200여 기의 기병을 이끌게 하고 한공퇴로 파견, 토번군의 정황을 염탐하게 했으며, 제오기에게 경조윤의 직책을 맡겨 이 병력의 물자 공급을 전담하게 하고, 보응군사 장지절로 하여금 후발대로써 장손전서를 지원하게끔 한다. 여기에 과거 광록경이었던 은중경이 의병을 1,000여 명 모아 남전에 와서 곽자의와 합류했고, 곽자의는 그 또한 장손전서의 지원군으로 파견한다. 이러한 당군의 기동은 토번군의 측면을 교란하는 행위였으며, 장손전서가 허장성세를 벌이자 토번군은 이를 퇴로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위협으로 여기고 군대를 슬슬 뒤로 빼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곽자의가 상주에서 규모를 알 수 없는 대군을 이끌고 도착한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장안내부에서 토번군에게 전염병이 옮게 되었다. 20만대군을 지탱할 보급품도 토번 본토에서 중국까지 오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결국, 토번군은 장안에서 철수한다.(10월 21일.) 단 수천명의 병력만으로 그 자신의 명성에 힘입어 20만 토번군을 퇴각시킨 것이다.[22]

토번의 대병력이 철수하자 왕보라는 자가 무리 2,000여 명을 모아 장안을 점거하고 횡포를 부렸고, 지금 전력으로 장안 입성은 무리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곽자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기병 30기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무리2000여명이 곽자의가 온다는 소리에 항복해버렸고 왕보를 불러낸 후 참수해 버리기도 했다. 이후 당대종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물어 정원진을 삭탈 관직하고 시골로 쫓아보낸다. 이 소식을 듣고 부연절도사 백효덕과 빈녕절도사 장온기가 기현까지 전진하자 곽자의는 그들을 불러 장안으로 들어오게 해 장안 내를 안정화시킨다. 그리고 당대종은 곽자의를 경성유수로 삼았다.

토번의 침공은 비록 저지되었으나,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토번측은 스스로 말하기를 양주, 감주, 숙주를 점령했고, 공격한 10곳 중 8곳을 함락했다면서 기세를 올리고는 본국에 전승비까지 세워 이를 자랑했다.[23] 돈황이 버텨냈고, 봉상 또한 봉상절도사 손지직이 수비하고 있는 것을 진서절도사 마린이 기병 1,000여 명으로 구원하여 간신히 지켜낸 게 그나마 큰 전과였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토번의 대대적인 침공을 수천의 병력만으로 되돌린 곽자의의 공적은 실로 다대한 것이었으며 그 명성도 더욱 올라갔다. 이때 이후 곽자의는 어조은이나 정원진 등의 참소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 위신이 올라가게 된다. 이후 이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된 정원진에 대한 탄핵이 이루어졌고, 정원진은 이를 두려워하여 토번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낙양 천도를 계획했다. 이에 당대종 역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곽자의는 토번을 막아내지 못한 건 인재를 잘못써서지 이 땅의 지리적 위치가 나빠서가 아니다고 강하게 반발했고, 누구보다도 강한 위상을 지닌 곽자의가 이렇게 강한 반대를 한 것으로 인해 결국 천도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당대종은 곽자의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그려놓기까지 할 정도였다.

1.4. 복고회은의 난을 진압하다

1.4.1. 복고회은의 봉기

안록산, 사사명의 대란에 뒤이은 토번의 장안 점령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아직 당나라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뒤이어 복고회은의 난이 일어난 것. 764년 1월 말, 사사명의 난 진압의 최고공로자이자 당대에 그 위세가 비길 데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복고회은이 결국 토사구팽의 위기감 속에 반란을 일으킨다. 자신과 그 아들, 복고창이 이끄는 삭방군을 움직여 태원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당 조정은 삭방진에서 몸을 빼내 당 조정에 돌어온 이포진의 조언대로 1월 20일, 곽자의에게 관내·하동 부원수·하중절도사직을 내려 전면에 내세운다.

삭방진의 여러 사졸들이 곽자의를 마치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반란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이 소식을 듣자 복고회은을 따르던 삭방군의 병사들이 "무슨 면목으로 분양왕(곽자의)을 볼 것인가."고 말하며 사기가 추락하고 대규모 이탈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곽자의가 하중에 도착하자 그에게 추가로 삭방절도대사[24]직을 내린다. 복고회은은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태원을 공략하나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서 유차를 공격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거기다 그의 아들이었던 삭방행영절도사 복고창이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300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탈, 영무에 위치한 삭방진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혼석지를 살해한 후 영무를 장악한다. 그리고 뒤에 남겨진 삭방진의 병사들은 곽자의가 오자 전부 귀부하고, 곽자의가 온 것을 기뻐했다. 복고회은의 당시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가볍게 끝나버린 셈이다.

그러나, 영무를 점거한 복고회은은 재기를 시도한다.

1.4.2. 복고회은, 외세를 끌어들이다.

복고회은의 반란은 생각보다 간단히 끝났으나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삭방진의 처소가 있는 영무를 점거한 복고회은은 아직 곽자의가 장악하지 못한 삭방군의 남은 병력들을 끌어모아 상당한 병력을 다시 확보한다. 당대종은 그런 그에게 본디 반란 의도가 없던 것을 알고 있으니, 반란을 그만두고 귀부한다면 그동안의 공적에 따라 그를 용서하고 하북부원수 및 삭방절도등사직은 해체하지만 태보 겸 중서령, 대녕군왕직은 그대로 유지시켜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를 회유해 보지만 복고회은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복고회은도 삭방군의 병사들만으로는 어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 결국 그는 토번과 위구르라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길을 택하고 만다.[25]

복고회은의 요청에 따라 토번, 위구르가 움직인 것은 764년 8월이었다. 두 세력을 합처 12만이라는, 강력한 전력이 복고회은의 요청에 따라 당나라의 영내로 진입한다. 토번, 위구르는 중앙아시아 및 북방 초원지대를 주름잡는 강대한 세력이었으므로 당항족 등 자잘한 중소 규모 이민족들은 당과 토번, 위구르의 충돌에 휘말리거나 또는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분위기를 살피게 된다.

이러한 복고회은의 역습에 대한 당의 대응은, 당연하게도 곽자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 이미 764년 7월에 곽자의에 필적하던 이광필이 사망하면서 사실상 곽자의 외에는 복고회은, 토번, 위구르의 연합군을 막아낼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곽자의는 관내부원수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봉천으로 나아가 각지의 제장들을 지휘하면서 복고회은과 이민족 연합군의 방어를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어떻게 복고회은을 막아낼 건지 묻자 곽자의는 "복고회은은 본래 신의 편장과 비장이어서 그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의 부곡이었으니 반드시 차마 서로 칼끝을 겨누지 못할 것이며 이로써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압니다."라고 답하여 상당히 자신감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당대종은 곽자의를 믿고 그에게 북도빈녕·경원·하서이래통화토번사[26]직에 충임한다. 직후, 곽자의는 토번군이 빈주까지 내려와 압박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아들인 삭방병마사 곽희의 지휘 하에 10,000여 명을 증원군으로 파견했고, 곽희는 빈녕절도사 백효덕과 함께 10월, 복고회은이 위구르와 토번군을 이끌고 공격해온 것을 방어해낸다. 이후 복고회은이 빈주를 우회, 곽자의의 본영이 있는 봉천까지 압박해 들어오나 곽자의는 이 또한 어렵잖게 방어한다.

이후 반격을 생각한 곽자의는 10월 7일 밤에 건릉( 당고종의 능묘) 남쪽으로 군을 이동시켜 포진한 후 다음날 아침 복고회은·토번·위구르 연합군이 방심한 상태로 진격해 오는 것을 한번의 기습으로 격퇴한 후, 재차 수비태세를 취했고 이에 복고회은의 요청으로 왔던 토번, 위구르군은 크게 피해를 입어가면서까지 싸워줄 이유는 없다고 여겼는지 흩어져 자기 세력권으로 되돌아갔다. 저 두 세력이 없이는 이길 자신이 없던 복고회은도 영무의 자기 근거지로 후퇴한다. 이후 곽자의가 귀환하자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상서령 직을 내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곽자의는 상서령 직이 당태종이 맡았던 관직이라 이후 관례적으로 비워놓는 직책이고, 또한 옹왕 이괄이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고 황태자가 된 뒤에야 맡았던 직책임을 언급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복고회은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복고회은은 반란의 기치를 아직 접지 않았고, 다시 한번 당나라를 들어엎으려 시도한다. 이를 위해 복고회은은 위구르와 토번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일대의 이민족 대부분을 봉기시키기 위해 사자를 보내 유세를 펼친다. 그리고, 1년여에 걸친 공작 끝에, 이 일에 성공한다. 765년 9월, 회흘 · 토번 · 토욕혼 · 당항족 · 노랄 등으로 이루어진, 수십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이민족 군대가 당나라의 영토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특히 토번은 이 일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2년 전의 장안 공격 당시 토번군을 지휘했던 장수들에다 1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단독으로 투입했다.

이 시기 토번의 인구가 150만~200만 사이고, 자국 내의 전 병력을 동원해도 40만 정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투자인셈. 물론 그에 못지 않은 세력인 위구르도 충분한(최소한, 후에 토번과 지휘권분쟁을 대놓고 벌일 수 있는 수준까지) 전력을 투입했다. 이런 양대 세력이 대규모 병력을 움직인 것이 여타 이민족들의 행동을 결정하게 한 요인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동안 당은 뭘하고 있었냐...면, 간단히 말해서 제몸 추스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764년의 침공이 저지되었다고는 하나 지속적으로 위협이 상존해 있었기 때문에 관중~서북변은 계속 계엄 상태나 마찬가지였으며, 하북 일대의 절도사들은 사실상 통제불능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을 강제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해도 서북변에서의 위협이 너무 커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기껏해야 검남절도사(사천성 일대가 관할구역) 엄무가 성도 근처까지 장악해가던 토번을 다시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오히려 토번이 복고회은에게 보내는 병력의 규모만 늘릴 뿐이었다. 결국 남은 길은 그나마 통제하에 있는 절도사들을 불러모으고 여타 지역의 절도사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길 뿐이었으며, 실제로 여러 절도사[27]들과 그들의 병력을 불러모으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으니 대비를 안한건 아니지만, 복고회은이 불러 모은 병력과 비교하면 열세가 현저했다.

1.4.3. 위구르와 화친하고, 토번을 물리치다.

이들 이민족 지원군들이 도착하자 복고회은은 다시 남하한다. 이에 곽자의는 저들 이민족들이 모두 기병이니 쉽게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각지의 제도 절도사들(위의 거론된 6명)들로 하여금 요충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당대종에게 건의하고, 이는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복고회은이 남하하던 중에 병사했다.(...) 이에 복고회은이 직접 지휘하던 군대는 지휘권 분쟁이 일어나면서 완전히 행동을 멈춘다. 그러나, 이미 이 전쟁은 복고회은이 죽었다고 해서 끝날 지경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토번과 위구르를 비롯한 이민족들은 복고회은이 죽었다고 해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특히 당군의 방어선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던 토번과 위구르는 아예 장안까지 재차 공격을 가할 의도를 명백히 드러내 보였다.

9월 15일, 토번군은 봉천까지 전진한다. 봉천에는 곽자의의 분영이 있었으나 때마침 곽자의는 하중에 가 있어 삭방병마사 혼감과 토격사 백원광이 이를 맞아 방어한다. 이 소식에 장안에는 계엄령이 떨어졌고 ,모든 절도사들을 장안 주변의 요충지에 배치, 당대종 스스로도 금군인 6군을 거느리고 금원까지 나아간다. 9월 21일에는 제서를 내려 친정을 공표하고, 22일에는 장안 내의 모든 남자들을 단결(민병대)병으로 편성하며 장안성의 성문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금군의 주력인 신책군을 지휘하던 어조은은 아예 황제를 하중으로 옮기려고까지 시도하나 대신들의 반발로[28] 이 또한 실패한다.

다행히도 17일부터 25일까지 큰 비가 내려 기병이 주력인 토번군은 전진하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후방으로 물러났는데 돌아가면서 지나는 지역을 철저히 약탈해 수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10월 1일이 되자 토번군의 퇴각은 확실해 보였고, 다시 경연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안도감이 퍼진다. 그러나 빈주에서 위구르군과 합류한 토번군이 다시 서진하면서 위기감이 더더욱 고조된다. 10월 3일, 토번·위구르 연합군이 봉천을 지났고, 10월 8일에는 곽자의의 본영이 있는 경양을 포위한다. 이들 지역은 장안에서 2~3일 거리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운 지역이었다. 거기다 기병이 주력인 이민족 연합군에 비해 당군은 보병이 중심이었고, 때문에 각지의 방어 요충지에 병력을 나누어 배치해야만 해서 이때 경양에 있는 곽자의 자신은 수천여 명만을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위구르는 복고회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토번과 지휘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때문에 경양을 포위할 때 토번군과 군영을 공유하지 않고 서로 반대편으로 가서 주둔한다. 곽자의는 이 사실을 파악하고 위구르를 설득해 보려고 하나 위구르측의 반응은 '곽자의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냐' 였다. 그러면서 만약 곽자의가 진짜 이곳에 있는게 맞다면, 직접 와서 자신들에게 그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시켜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곽자의는 결단을 내린다. 위구르의 요구대로, 직접 위구르의 진영에 가서 저들을 설득하기로.
곽자의가 말하였다.

"지금은 중과부적이니 힘으로써 이기기는 어렵다. 옛날에 위구르와 약속을 맺은 것이 아주 후하였는데, 몸을 빼내어 가서 그들에게 유세하여 싸우지 않고 떨어뜨리는 것만 못하다."

제장들이 철기 500을 선발하여 호위하며 따르게 하라고 청하였더니, 곽자의가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충분히 해가 될 만하다."

곽희(곽자의의 아들)가 말고삐를 잡고 간하였다.

"저들은 호랑이나 승냥이입니다. 대인께서는 나라의 원수이신데 어찌하여 몸소 오랑캐의 밥이 되십니까?"

곽자의가 말하였다.

"지금은 싸운다면 부자가 함께 죽고 국가는 위태로워진다. 가서 지극한 정성으로 그들과 더불어 말하여 혹 다행스럽게 좇는 일을 나타나게 된다면 사해의 복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몸을 죽여서 집안을 온전하게 하겠다."

채찍으로 그 손을 치고 말하였다.

"가라."

드디어 몇 명의 기병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가면서 사람을 시켜서 큰 소리로 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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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성을 나간 곽자의는 사실상 홀로, 위구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위구르측은 안사의 난 시기부터 곽자의에게 상당한 호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곽자의는 이러한 호감을 바탕으로 협상을 성공시킨다.
"영공(곽자의)께서 옵니다."

위구르가 크게 놀랐다. 그들의 대수(최고지휘관)인 합호록도독 약갈라는 가한의 동생인데, 활을 잡고 화살을 매겨가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곽자의는 투구를 벗고 갑옷을 벗었으며 창을 던지고 나아가니, 위구르의 추장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서 늘어서서 절하였다. 곽자의 역시 말에서 내려서 앞으로 나가서 약갈라의 손을 잡고 그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너희 위구르는 우리 당에 큰 공로를 세웠고 당에서 너희에게 보답한 것이 역시 야박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약속을 등지고 깊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경기에 있는 현을 침입하고 압박하여 전에 세운 공로를 버리고 원수를 맺고 은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돕고 있으니, 얼마나 그것이 어리석은가? 또 복고회은이 임금을 배반하고 어머니를 버렸는데[29] 너희 나라에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지금 몸을 빼내어 왔는데 너희가 나를 잡아서 죽이면 나의 장사들이 반드시 죽기로 하여 너희들과 싸울 것이다."

약갈라가 말하였다.

"복고회은이 나를 속이고 천가한이 이미 안가(晏駕, 황제나 제왕이 맨 마지막에 타는 수레, 사망을 나타내는 단어)하였다고 말하고 영공(곽자의) 역시 연관(捐館, 사는 집을 버린다, 사망을 나타내는 단어)하여 중국에는 주군이 없다고 말하니, 내가 이리하여서 감히 그와 더불어 온 것입니다. 지금 천가한께서 상도(장안)에 계시고 영공께서도 다시 여기에서 군사를 총괄하시며 복고회은도 역시 하늘이 죽인 바 되었으니 우리들이 어찌 영공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곽자의는 이어서 그에게 유세하였다.

"토번은 무도하여 우리나라에 혼란이 일어난 틈을 이용하여 구생(장인과 사위 관계) 사이의 가까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리 변방을 물어뜯고서 우리의 기전(도읍 주변)에 불을 놓고 분탕질하니, 그들이 약탈해 간 재물은 다 실을 수도 없고 말과 소 그리고 여러가지 가축은 길이가 수백리에 이어져 있고 들에 잔뜩 퍼져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너에게 내려준 것이다. 군사를 온전히 하고 우호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적을 깨뜨려서 부유함을 가져가는 것은 네가 계산해 보면 여기에서 어느 것이 편할 것인가? 잃어서는 안될 것이오."

약갈라가 말하였다.

"나는 복고회은에게 오도되어서 공에게 잘못한 것이 정말로 깊은데, 지금 청컨대 공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토번을 치는 것으로 사죄하겠습니다. 그러나 복고회은의 아들은 가돈(위구르의 황후)의 형제이니, 바라건대 그를 내버려 두어 죽이지 마시오."

곽자의가 이를 허락하였다.(중략)

곽자의가 땅에 술을 붓고 말하였다.

"대당 천자 만세하소서. 위구르 가한 역시 만세하소서. 두 나라 장상 역시 만세. 약속을 어기는 사람의 몸은 진지 앞에서 운명할 것이고 가족은 멸절하리라."

술잔이 약갈라에게 이르자 역시 땅에다 술을 붓고 말하였다.

"영공이 맹세한 것과 같소."

이에 여러 추장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전에 두 명의 무사[30]가 이번 행차는 안온하여 당과 싸우지 않을 것이며, 한 명의 대인을 만나고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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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일을 다룬 것이 '학봉일고'에 나오는 '단기견로도'라는 시이다. 일이 이렇게 굴러가자 토번은 충격을 받고 군을 이끌어 야반도주. 위구르는 바로 그 뒤를 쫓았고 곽자의도 기병대를 동행시켰다. 결국 10월 15일, 영대의 서쪽 벌판에서 따라잡힌 토번군은 당-위구르 연합군에 의해 대파당했고, 전사자 50,000, 포로 10,000의 피해와 함께 그동안 약탈해온 재물과 사람들을 다 토해놓고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고도 모자라서 국경선 근방인 경주의 동쪽에서 추가로 공격받아 참패를 맛봤다. 티베트 역사상 가장 최대의 피해가 바로 이때의 패배이다.[31] 이후 위구르군 지휘부는 조정에 들어가 당대종을 알현했고, 당대종은 창고를 탈탈 털어서 비단 10만필을 모아 선물로 건내주는 것으로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의 약속을 보답했다. 위구르가 동맹을 맺고 토번이 기록에 남을 참패를 맛보았다는 소식에 여타 이민족들은 일제히 철수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복고회은이 이끌던 구 반란군 세력. 곽자의는 이들이 이민족들에게로 도주하지 않게끔 설득 공작을 폈고, 때마침 당대종이 적절하게 예전에 세운 공로에 따라 죄를 사면한다고 약속하자 모두 당나라에 항복, 그 군대는 당군에 흡수되었다. 이것으로 복고회은의 난은 위구르와의 동맹과 토번의 참패라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종결되었다.[32]

1.5. 당의 수호자

복고회은의 난이 종결되었을때(765년)의 곽자의의 나이는 70세. 이후 781년 사망할 때까지 16여년 동안 그는 당 조정 내에서 언터처블의 위치에 올라선다. 더이상 그에 대한 의심은 무의미했고, 설령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게 손댈 수는 없었다. 심지어 황제인 당대종마저도 곽자의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또한 동시에 그의 권한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곽자의는 쉴 때가 아니었다. 아니, 당대종의 남은 치세(~779년 5월 21일까지) 동안 당은 사실상 곽자의가 지켜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곽자의가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하게 된 것은 당덕종이 즉위한 후부터이다.

1.5.1. 일시적인 휴식과 전장으로의 복귀

765년 윤10월 17일, 곽자의는 복고회은의 난 진압을 완료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황제를 조현하였다. 이후 전란 기간 중 절도사 양지열이 사망하면서 흐트러진 하서 번진의 남은 지역을 어루만지고, 숙주, 과주, 사주 등에 장사를 설치하며 삭방 번진 내에 존재하는 기마민족인 융족들 내에서 도는 불안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삭방 번진의 군사력을 일부 나누어 배치할 것을 요청했고,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이 때에 각지의 절도사들은 반독립적인 세력들을 형성하여 서로 겸병하기 위해 싸웠고, 그 아래 장교들은 절도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사천 지방만 하더라도 검남절도사 직을 얻기 위해 섬서절도사 곽영예가 신임 검남절도사 왕승준을 무고해 죽였고, 이에 이주자사 최간이 곽영예와 충돌하여 결국 곽영예를 죽였으며, 다시 이 최간에 반대하여 공주의 아장 백무림, 여주의 아장 양자람, 검주의 아장 이창노 등 검남 번진의 아병(牙兵) 소속 장교들이 최간을 공격했다.

그러나 최간은 이를 격파하고, 산남서도절도사 장헌성까지 격파하면서 766년 성도윤·서천절도행군사마직을 확보, 767년에는 아예 서천절도사직까지 오른다. 서천 지역에서만 1년 사이에 이런 식으로 몇번에 걸친 병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복고회은의 난 당시 관중으로 들어와 공세의 저지에 일정한 공을 세운 일곱 절도사 중 한 명인 동화절도사 주지광은 그 공적을 내세우며 조운하러 올라가는 쌀 2만 곡과 여타 번진에서 올리는 공물을 억류하고, 조정의 사신을 살해하는 등의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당대종은 그런 그를 달래기 위해 주지광에게 검교좌복야직을 덧붙여주겠다 했지만 주지광은 "나 주지광은 천하와 국가에 큰 공을 세웠는데 평장사를 주지 아니하고 복야 직함을 주는가! 게다가 동주와 화주의 땅은 좁아 재능을 펼치기는 부족하니 섬주 · 괵주 · 상주 · 부주 · 방주 다섯 주를 더해 준다면 거의 받아들일 만하다.", "이곳은 장안에서 180리 떨어져 있어서 나 주지광은 밤에 잠을 자면서 감히 다리를 펴지 못하는데, 아마도 장안성까지 밟아 깨뜨려버릴까 두려워서이며,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데 이르러서는 오로지 주지광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응답을 하고 과거응시자들의 가는 길을 가로막아 대거 죽이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자기 실력을 모르고 나대는 태도를 보였다. 하중에서 군을 진수하면서 스스로 100무를 농사짓는 등 솔선수범하여 둔전에 힘쓰던 곽자의는 이런 절도사들의 횡포를 토벌할 것을 누차 청했고, 767년 1월 6일, 실력도 없으면서 가장 횡포를 부리던 주지광에 대한 토벌 조서를 받아낸 후 휘하 제장들인 혼감과 이회광을 움직여 주지광에 대한 토벌에 나선다. 당연히 주지광이 곽자의의 상대가 되지 않음은 자명했으며 딱 7일 후인 1월 13일 회주 아장 요회와 이연준은 주지광의 수급을 바치며 항복, 동화 번진은 조정에 그대로 편입되었다.

2월 6일, 곽자의는 주지광 진압과 뒷처리를 마무리짓고 장안으로 돌아와 조현하였다. 이에 당대종은 당대의 권신인 원재, 왕진, 환관 어조은 등에게 명하여 돌아가면서 집에서 술자리를 열었는데 한번 모일때마다 소모된 비용이 10만 민(당시 통화 단위)에 달했다고 한다.[33]

이 시기 장안에 있을 때에 곽자의의 집안에는 유명한 에피소드이자 사자성어인 장롱작아타금지의 유래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대종은 딸 승평공주(昇平公主)를 곽자의의 아들 곽애(郭曖)와 결혼시켰는데, 곽애와 승평공주가 부부싸움을 하다 화가 난 곽애가 승평공주에게 "네가 의지하는 건 네 아버지가 천자이기 때문이냐? 나의 아버지는 천자를 가볍게 보고 안하는 것이다고 소리쳤다. 심지어 곽애는 승평공주에게 따귀까지 때렸다고 하는데 곽씨 가문의 위세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역모성이 다분한 언행에 승평공주는 아버지인 대종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해 바쳤으나 대종은 "네 남편의 말이 맞다, 저들이 천자가 되고자 한다면 천하는 저들의 것이다" 라면서 딸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나중에 곽자의가 이 일을 전해 듣고 대종에게 가서 사죄하니, 대종은 "항간에 '바보가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鄙諺有之, 不癡不聾, 不作家翁). 아녀자들이 규방에서 하는 말에 신경 쓸 것 있겠소!"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기서 장록작아라는 말이 유래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뜻이 된다. 그리고 곽애는 곽자의에게 직접 곤장 수십대를 맞았다. 이때 금지같은 자식을 때린다는 의미의 타금지 역시 유래된 것. 이후 곽애 부부는 깨달은 것이 있었는지 언행을 바로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곽애 부부에게서 태어난 큰딸인 곽비가 헌종에게서 목종을 낳았기에, 목종 및 훗날 황제가 된 목종의 세 아들 모두 곽자의의 후손이기도 하다.

1.5.2. 토번의 거듭된 침략을 방어해내다.

이렇게 조정에서 부귀를 누리며 평화롭게 지냈으나, 9월에 토번이 다시 수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삭방 번진의 처소인 영주를 포위하면서 곽자의는 다시 일선에 나가게 된다. 그동안 어느 정도 당나라의 중앙군은 회복되었고, 곽자의는 간만에 13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토번은 곧 물러났지만 다시 대대적인 공세가 있을 것이라 예측한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군권을 맡겨 계속 서쪽을 맡아줄 것을 명했으며, 9월 17일, 곽자의는 봉천에 본영을 두고 금군과 자신이 맡은 여러 지역의 군대, 그리고 당에 복종하는 번진들의 군대를 지휘하며 서쪽에서의 침탈을 막는 방파제로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봉천은 장안에 가까웠고, 곽자의는 자주 장안으로 돌아가 조현하면서 서쪽의 상황을 보고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했다. 767년 12월 4일, 곽자의의 아버지 묘가 도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어조은과 곽자의 사이에 좋지 않은 관계를 기억하던 여러 조정 대신들은 어조은의 짓이라 의심하면서 곽자의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지만 곽자의는 눈물을 흘리며 "신이 오랜 동안 병사를 이끌면서 사납게 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어서 군사들이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많이 파헤쳤습니다. 오늘 여기에 이른 것은 역시 하늘이 꾸짖는 것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대인배적 태도를 보여 조정을 편안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렇게 서쪽에서 당나라를 수호하는 역할은 당대종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관련 에피소드도 이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768년 2월에는 곽자의가 군법으로 군대 내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금지했고, 그걸 어긴 남양부인[34]의 유모의 아들이 도우후에게 곤장에 맞아 죽은 일이 있었다. 곽자의의 아들들이 곽자의에게 도우후를 벌해 달라고 요청하자 곽자의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자신을 보좌하는 참모들에게 "나 곽자의의 여러 아들들은 모두 노복이 될 재목이다. 아버지의 도우후를 상주지 않고 어머니 유모의 자식을 가엾다고 하니 노복[35]이 될 재목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고 탄식했던 일이 통감에 수록되어 있다. 768년 8월, 토번은 이전의 패배의 피해를 회복하고 다시 10만명의 전력을 동원해 영무를 노략질했으며, 26일에는 별동대 20,000명을 동원해 빈주를 공격했다. 이는 3년만에 다시 시작된 토번의 대대적인 침략이었다. 이에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50,000여 병력을 충원해 봉천에서 진수하면서 토번을 대비하도록 명했다.

이때의 토번의 침공은 영주를 포위함과 동시에 군을 나누어 여러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형태를 띄었으나, 764년, 765년과는 달리 당나라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복구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삭방 번진의 휘하 장수였던 백운광, 빈녕절도사 마린, 봉상절도사 이포옥이 보낸 원군의 지휘관이었던 이성이 맹활약하여 토번을 연파했고 노략품마저 다시 빼앗자 토번은 영주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 소식을 듣고 경사에서는 경계를 풀었다.(9월 27일) 또한 곽자의도 이런 비상사태가 해제되자 10월 27일, 조정에 들어와 조현한 후 11월에 자신의 처소인 하중으로 돌아간다. 이후 재상이자 권신이었던 원재는 곽자의와 협의해 안서 4진 및 북정 번진에서 온 병사들을 절도사 마린의 지휘하에 경주에 주둔하게 하고(빈녕절도사였던 마린은 경원절도사로 지위 이동), 곽자의가 지휘하는 삭방 번진의 병사들을 빈주에 주둔시켰다.(빈녕 번진을 해체해 삭방 번진에 흡수.) 이에 장기간에 걸처 이리저리 돌아다닌 데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길마저 끊겼던 안서 4진 및 북정 번진의 병사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뻔 했으나 도우후였던 단수실에 의해 사전에 저지당하기도 했다.

769년 1월 7일, 곽자의는 언제나처럼 조정에 돌아와 조현했고, 환관 어조은이 그를 맞이해 장경사에 초대, 잔치를 벌였다. 이때 원재는 혹시나 어조은과 곽자의가 서로 손을 잡을 것을 경계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어조은이 곽자의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군 내에 퍼뜨렸다. 어조은은 과거 곽자의를 몇번이나 참소한 적이 있기에 이런 소문은 쉽게 퍼져나갔고 곽자의의 제장들은 호위병력을 대규모로 갖추게 해 달라고 곽자의에게 청한다. 그러나 곽자의는 "나는 나라의 대신인데 저들이 천자의 명이 없이 어찌 감히 나를 해치겠는가! 만약 명을 받아 온다면 너희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겠는가!" 하며 일갈한 후 일부러 수행원의 숫자도 줄이고 찾아가서 어조은이 놀랐다고 한다.

8월 25일, 군 주둔지 변경과 관련된 사무처리가 완료되면서 곽자의는 하중에서 빈주로 본영을 옮겼다. 또한 9월에 토번이 다시 한번 영주를 공격했지만 반격에 패배해 물러났다. 그러나 토번은 10월에 또다시 대규모 군을 파견[36]해 명사 지방을 침범했는데, 곽자의는 병마사 혼감에게 5,000여 명을 맡겨 선봉에 내세우고 스스로 뒤를 받처 경주까지 전진해 대응했고, 토번은 또다시 물러난다.

770년 3월, 무인둘에 대한 선황제 숙종의 불신을 이용해 군권을 장악하고 12년간 국정농단과 부정부패를 일삼던 희대의 권력형 간신 어조은이 드디어 벼르고 있던 당대종에게 제거되었다. 당대종은 어조은이 독대 중에 최후의 경고를 듣고도 계속 오만함을 확인하고는 즉시 미리 포섭해둔 경호관 주호를 시켜 목매달아 죽였다. 그리고 어조은이 스스로 목을 맸다고 공표한 뒤 금군의 직접적인 지휘권을 장악하여 불안요소를 없앤다. 경쟁자가 사라지자 원재는 견제세력 없는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댔으며, 뇌물을 받아챙기는 등 심하게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원재도 곽자의는 손댈 수 없었고, 곽자의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7월, 토번이 영수를 노략질한 후 물러났고, 곽자의는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조현하였다. 곽자의는 771년 1월에 다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다. 772년 3월 곽자의는 언제나처럼 조정에 들어와 조현했다 돌아갔다. 절도사가 난립하던 이때에 곽자의처럼 매년 정기적으로 조정에 조현한 장수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773년 8월, 토번은 다시 한번 대규모로 당을 공격해 들어왔다. 60,000에 달하는 기병을 동원해 영무를 약탈했고, 9월에는 여기에 추가로 1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경주와 빈주로 밀어넣어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곽자의는 삭방병마사 혼감에게 보병과 기병 각각 5,000명씩을 맡겨 1차 저지에 들어갔지만, 나이가 어린 혼감의 명령을 듣기 싫었던 군 내의 장성들의 반발로 거의 전 병력을 상실하는 대패를 맛본다.(8월 18일) 여기에 경원절도사인 마린 또한 토번군에게 패배하면서(8월 22일)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손에 꼽을 만한 대규모 침공인데다 이전까지 몇번씩 성공적으로 막아내던 장수들이 패배했기 때문.

이에 곽자의는 직접 작전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모색한다.
곽자의가 제장들을 불러 모의하였다.

"군대가 패하게 된 죄는 나에게 있고 제장들에게 있지 않다. 그러나 삭방의 병사가 날쌘 것은 천하에 소문이 나 있는데, 지금 오랑캐에게 패하였으니, 어떤 대책으로 치욕을 씻을 수 있겠는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혼감이 말하였다.

"패배한 군대의 장수가 다시 모의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건대 오늘의 일을 한마디 하게 하여 주신다면, 오로지 혼감의 죄로 다스리시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일을 맡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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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곽자의는 혼감을 믿고 군을 맡겼으며, 염주자사 이국진, 경원절도사 마린과 같이 토번의 배후를 가격하여 약탈품을 거의 모두 회복하고, 군수품들까지 태워버리자 토번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도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계속 토번의 침략이 거듭되자 오히려 공세를 취해 토번의 요충지를 점거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이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774년 2월 24일, 곽자의는 조정에 올라와 조현하면서 토번의 거듭된 침공을 막기 위한 병력 충원을 요청했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여러 번진에 지원 병력을 보낼 것을 요청했고, 이런 병력이 어느 정도 모인 9월에 이를 파견하여 부족하게나마 군을 증강시켜 주었다.

775년 1월, 곽자의는 조정에 들어와 조현했고, 3월 20일에 돌아갔다. 이때 곽자의는 주문을 올려 주현에 관원 한 사람씩 벼슬을 내려달라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보좌하던 장교들이 "영공의 공훈과 품덕으로 한 명의 속리를 천거하는 주문을 올렸는데 따라주지 않으니 얼마나 재상이 체모를 모르는 것인가!" 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곽자의는 "병란이 일어난 이래로 방진의 무신들이 대부분 발호하니, 무릇 요구하는 바가 있으면 조정에서는 항상 굽히며 이를 따랐는데, 이는 다른 것이 아니고 마침내 의심하는 것이다. 지금 나 곽자의가 주문으로 올린 일은 황제께서 행할 수 없으셔서 내버려둔 것이고, 이는 무신으로 대접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친하고 사이가 두터운 것으로 대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축하를 해야지, 또한 어찌 괴이하게 생각하는가!" 하면서 오히려 기뻐했다.

9월에 토번이 다시 침략해 임경을 노략질하고, 이어서 농주와 보윤을 약탈했는데 봉상절도사 이포옥에 의해 패배했으며, 경주를 노략질하다가 경원절도사 마린에게 패배했다. 이에 당 조정은 조현하러 들어온 노룡절도사 주차에게 데리고 온 군을 이끌고 봉천으로 가서 토번을 막는 일에 협조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12월에는 위구르의 1,000여 기병이 하주를 노략질하자 곽자의는 3,000여 명의 병사들을 동원해 이를 구원한다. 776년 1월, 토번의 침략이 계속되고 위구르의 준동도 심상치 않자 당대종은 곽자의로 하여금 삭방의 주요 군사주둔지 5개 성의 병사를 늘려 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9월, 토번이 석문을 노략질했고, 12월에는 곽자의의 오랜 전우이자 활약이 많았던 경원절도사 마린이 병사했다.

777년 3월, 당대종은 권신 원재와 그에 붙었던 왕진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검소하고 청렴한 관리였던 태상경 양관을 중서시랑에, 예부시랑 상곤을 문하시랑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들은 곽자의는 잔치 음식을 대폭 줄였다고 한다. 9월, 토번은 다시 80,000명을 동원해 장택감[37]에 진을 치고 방거를 함락시킨 후 발곡으로 진격했는데 곽자의가 이회광을 내세워 구원하자 방주를 노략질하면서 철수했고, 10월에 염주, 하주, 장무를 노략질하자 이 또한 부대를 파견해 저지한다. 778년에는 토번 뿐만 아니라 위구르도 당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선다. 이전부터 당이 위구르와의 교역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불만을 품던 위구르는 가끔씩 일부 병력을 보내 노략질하긴 했으나 이 이전엔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778년 들어서부터는 위구르 또한 대규모 병력을 통해 원거리 원정에 나서게 된다. 1월, 위구르는 태원까지 침입해 방어에 나선 하동 번진의 병력을 격파하고 대대적으로 노략질했으며, 3월에는 삭방 번진을 노략질했다. 토번도 이에 뒤지지 않아, 1월 22일 40,000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영주를 노략질하면서 둔전 지역을 점령했고, 4월에 다시 영주를 공격했다. 이에 곽자의는 773년 패배 이후 빈주 자사로 내려가 있었던 혼감을 다시 채용해 줄 것을 요청했고, 혼감은 기대에 부응하여 위구르를 완전히 돌려보냈으며, 7월에 토번이 20,000여 병력으로 염주, 경주를 공격하자 여기에는 이회광을 파견해 물리첬다. 12월, 곽자의가 조정에 들어가 조현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공을 세워서 야심이 생긴 이회광은 곽자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군대 지휘권을 쟁취할 생각으로 음모를 꾸몄으나 저지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자신의 부하였던 삭방절도부사 장담이 문관출신이여서 자신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고 무고해서 죽였다가 후회한 일이 있었다. 이는 곽자의가 흠없는 영웅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지만, 동시에 당나라에도 문관과 무관 사이에 서로 질시하는 풍조가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779년 5월 3일, 당대종은 병이 들었고 21일 사망한다. 이때 당대종은 곽자의를 섭총재[38]로 삼아 당덕종을 보좌해 줄 것을 명한다. 이는 섭정이나 마찬가지로, 거의 황제와 맞먹는 최고의 위치였다.

1.6. 은퇴와 사망

당대종이 사망했을 때 곽자의는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곽자의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 그의 기나긴 관직명이라 하겠다. 당덕종 즉위시 곽자의의 관직명은 다음과 같다.

사도·중서령·영하중윤·영주대도독·선우·진북대도호·관내·하동부원수·삭방절도·관내지탁·염지·육성수운대사·압변부병영전급하양도관찰등사.(총 58자에 달하는 직위 명) 위의 관직을 해석하자면 서북변 및 관중의 군권, 운하 통제권, 소금 전매권, 감찰 및 둔전 관리를 포함한 행정권, 외국인 관리권 등을 가지고 사도이자 중서령으로 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이거 모두 실질적인 관직들이다.

저렇게나 다양한 직위를 보유할 수 있었던 만큼 권력도 막강했으며, 너무 많은 관직과 업무를 맡았기에 업무에 혼선이 있었다고 한다. 곽자의의 이러한 크고 방대한 권력과 권한은 황권 자체에까지 위협할 수 있는 요소였고, 당대종 또한 이를 조정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황제에 올라 패기넘치는 당덕종은 과감히 관직을 나누고 곽자의를 은퇴시키는 결단을 내린다.[39] 즉위 후 그는 조서를 내려 곽자의를 상보로 높여 부르고, 태위 겸 중서령직을 덧붙여주면서 실봉을 2,000호까지 늘려 주어 지금까지 수여받은 식읍을 다 합쳐 3000호에 달했다. 그리고 매월 1,500명이 먹을 양식과 200필의 말의 식량을 지급했으며 그의 자식과 사위들 10여명의 관직을 승진시켜 주는 대신 부원수 및 기타 관직들은 모두 그만두게 하였다. 여기서 곽자의 측에서 반발이 안나왔다는걸 보면 알듯이 이렇게 물 흐르듯 진행된건 곽자의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늙었음에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해 분쟁을 일으켰던 사례가 수두룩한걸 고려하면 엄청난 고령임을 고려해도 아무렇지 않게 황실을 믿고 권한을 전부 내려놓은 곽자의는 은퇴까지도 그답게 충신스럽게 마친 것. 당장 멀리가지도 않고 똑같은 안사의 난의 영웅인 복고회은이 정부를 못믿어 토사구팽당한것의 정반대.

그리고 그 중 군권은 다시 셋으로 나누어 하동·삭방 도우후 이회광을 하중윤·빈·녕·경·진·강·자·습의 8개 주를 관장하는 삭방·하동절도사로 삼고, 삭방유후 겸 영주장사 상겸광을 영주대도독·서수항성·정원·천덕·염·하·풍등군주 절도사로 삼았으며, 진무군사 혼감을 선우대도호·동·중이수항성·진무·진북·수은·인승등군주 절도사로 삼았다. 이를 통해 곽자의는 영화로운 은퇴의 길을 걸었다. 이후 곽자의는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물론 명예직을 받고 물러났다고 해도 곽자의의 영향력은 크고 강했으며, 곽자의의 공로나 부귀 영화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곽자의의 처세술은 변함이 없어, 후에 여러 장군들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간신이 되는 노기(盧杞)라는 인물이 찾아오자 부인들은 모두 방에서 나오지 않게 시키고[40] 그 스스로 노기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곽자의는 건중 2년(781년) 사망한다. 그의 위세와 명망은 이때에도 전혀 줄지 않아서, 당덕종은 곽자의를 기려 조회를 5일간 쉬었고, 조정 대신들에게 직접 황명으로 곽자의를 조문하러 다녀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태사직을 추증하고 장례비용은 모두 국비로 부담하도록 하였다. 장사를 치를 때 상여가 지나가자 당덕종은 안복문으로 나아가 곡을 하였다. 시호는 충무. 그리고 규정된 무덤의 크기를 특별히 크게 하여[41] 그의 공적을 기렸다. 또한 사후에도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명문가로써 대접받았다.[42]

[1] 곽자의는 이 은혜를 계속 기억하고 있다가 안사의 난 즈음 이태백이 억울하게 반란누명을 쓸 때 적극적으로 변호해 그를 살려주었다. [2] 그나마 연좌제에 포함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전부터 안사순 본인이 여러번 중앙에 안록산의 행태가 수상하단 식으로 반란의 낌새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일족이긴 해도 먼 친척관계로써 안녹산과의 접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안사순은 일찍이 현종 시기 설눌 밑에서 토번을 공격했을 때 이래로 당의 국경 방어에 힘써 오는 등 당의 충신이었다. [4] 이후 고선지 봉상청이 처형을 당하고 그 후임이었던 가서한이 동관에서 안경서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그 와중 가서한은 안사순을 체포한 뒤 그의 필체를 위조하여 안사순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무고해 그의 죄 7가지를 나열한 뒤 안사순은 안원정과 함께 죽게 되고 그 일족은 영외로 이주당한다. 그러나 곽자의가 삭방군을 이끌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직후 곽자의가 안사순의 누명을 벗길 것을 청하자 안사순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5] 무봉사는 '선봉에 선 돌격대장'을 의미하며, 좌무봉사와 우무봉사는 각각 좌우를 담당하는 지휘관이다. [6]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곽자의는 이광필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이광필 항목 참조. [7] 곽자의가 3곳의 절도사를 겸하며 보유하고 있던 병력이 18만을 조금 넘기 때문에 이 둘이 맡은 영지를 고려하면 진짜 지나가던 농민이라도 죄다 징발하지 않는 이상 10만은 마냥 비현실적인건 아니지만 현실적이라 보기에도 좀 애매한 수치였다. [8] 다만 곽자의의 아들 중 한명인 곽간이 여기서 전사했다. [9] 총사령관은 거의 대부분이 황족이 관례상 임명된다는 걸 감안해보면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다. [10] 晏駕, 황제나 제왕이 맨 마지막에 타는 수레, 사망을 나타내는 단어 [11] 捐館, 사는 집을 버린다, 사망을 나타내는 단어 [12] 최측근 환관에게 장수들을 감시하도록 부여하는 전군 감찰/감독관직으로 공산국가의 총정치국장에 해당한다. [13] 이때 그의 직속군이었던 삭방군의 사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신을 붙잡고 곽자의를 남아있게 해 달라고 해서 곽자의는 "나는 중사(사신)를 전송할 따름이지 가지는 않는다"고 속이고 군을 나와야 했다고 전한다. [14] 물론 이런저런 관직이 많다보니 전선에서의 활동외에 서류작업이나 아니면 고문으로서 이광필등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을순 있겠지만 눈에 띄는 활동은 없었는지 기록된건 없다. [15] 사사명이 죽어 사조의가 계승했다. [16] 해석하자면, 삭방군, 하중군, 북정군, 노택군의 절도행영(절도사의 군업무)를 처리하고, 겸하여 흥평군, 정국군의 업무를 맡는 부원수라는 뜻. [17] 후의 당덕종 [18] 중국측(통감), 티베트측은 공히 곽자의가 처음에 거느린 병력을 기병 20기로 적고 있으며, 신당서에서는 휘하가 그저 수십기라고만 적었다. [19] 이때도 이때지만 이 전이든 이 후든간에 곽자의가 한번만이라도 안나섰으면 당나라는 그걸로 망하거나 적어도 진짜 회복불가능한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20] 금성공주의 사촌. [21] 100여년전 고구려원정을 떠났던 맹장 장손무기의 후손이다. [22] 티베트측 기록에 따르면 토번자체가 이 당시 내적으로 상당히 곪아있었다고 한다. 자기들이 황제를 옹립시킬정도로 중국 본토에 정착할 욕심은 있었던 걸로 보이나 군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퍼지고 약탈할건 거의다 약탈한데다가 이런만큼 장안자체가 도시로 기능을 못하는 상태였다고, 그런와중에 곽자의가 대군을 데리고 몰려오고 있다고 하니 토번입장에선 얻을게 거의 없는 중국본토에 남아있기보단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곽자의 본인도 장안에서 토번과 정면승부를 하기엔 무리가있다고 판단하고 포위전으로 위장전술을 펼치며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23] 참고로 이 전승비가 티베트 역사상 가장 오래된 비문중 하나라 토번사 연구에 지대한 공로를 끼친다. [24] 친왕으로써 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그 임지에 가지 않고 업무를 볼 경우 '절도대사'직이 제수되기도 한다. [25] 특히 복고회은은 위구르와 친했기에 위구르군을 끌어들이고 통제하는 것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위구르에 비하면 토번은 장기간에 걸친 적대세력이었으나 위구르군과 연합한다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 보인다. [26] 통화토번사는 토번과 화해를 추진할 권한을 준다는 의미이며 그 앞의 이름은 모두 지명이다. 따라서 곽자의는 저 지역에 대한 군사권을 의미하는 기존의 관직(관내·하동부원수·하중절도사·삭방절도대사)에 더해 여차하면 자의에 따라 토번과 화친을 맺을 수 있는, 외교상의 권한까지 가지게 되었다. [27] 봉상절도사 이포옥, 활복절도사 이광진, 빈녕절도사 백효덕, 진서절도사 마린, 하남절도사 학정옥, 회서절도사 이충신. 이때 이들이 관중 내부에 있다 하여 제도절도사라고 칭했다. 뒤늦게 동화절도사 주지광, 부방절도사 두면도 도착한다. [28] 금군 10여명을 무장시켜 들어와 거가를 옮겨야겠다고 대신들을 협박했지만 유급사라는 벼슬아치가(이것이 본명인지, 아니면 성에 '급사'라는 관직명을 붙여 부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미x놈이 멀쩡히 금군이 있는데 뭘 옮겨? 너 반란꾸미냐?' 하고 해서 제풀에 넘어갔다. 그런데 신당서 어조은전에 따르면, 이것도 곽자의가 상소를 올려 어조은의 주장에 반대해 막은 것이라 적혀 있다. 어조은이 이후에도 큰 위세를 떨첬던 걸 생각하면 곽자의가 이를 반대했기 때문에 다른 관리들도 용기를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9] 복고회은이 반란을 일으키자 복고회은의 어머니는 '나라가 너한테 박대한 게 없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 면서 분노했고, 이에 복고회은이 의절을 표하자 칼을 들고 복고회은을 쫓아오기까지 했다. [30] 신당서 회흘전에는 두명의 '무당'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1] 토번은 주로 피지배국가나 노예를 전위대로 쓰고, 후군은 그들이 전멸해야 비로소 투입되었기 때문에 정예군의 피해는 전체 피해에 비하면야 적었다. [32] 이후 토번은 사천, 하서 지방을 갈구는데 주력한다. 문제는 그 두 지방이 모두 죽어라 버텨서 사천성의 중심인 성도는 끝까지 사수하는데 성공하고 하서 지방 역시 무려 20년동안이나 토번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돈황만 해도 토번의 군주가 친정해서야 겨우 함락시켰을 정도니 말 다한셈. [33] 청대의 고증사학자인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이를 두고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비판하고 있다. [34] 곽자의의 위상이 드높아짐에 따라 곽자의의 부인도 이런 칭호를 받았다. [35] 奴僕, 사내종을 의미한다. [36] 상겸광의 주문에 따르면 선두에서 후미까지 40리 [37] 당의 예전 목마장으로 추정 [38]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행정책임자. [39] 이는 정부로서도 곽자의로서도 좋은 결단이었다. 정부로서는 상술했듯 황제도 아닌 신하에 집중된 권력을 적당히 나눌수 있었으며 위에서 말했듯 일단 그만큼 하위관료들도 많았겠지만 혼자서 다양한 업무 전부를 책임지다 보니 너무 많고 다양해서 혼선이 빚어지기 일수라 이게 길게가면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 어쩔수 없는 판단이기도 했다. 곽자의 본인 또한 이당시 80세로 이 시대를 기점으로 하면 말그대로 눈 한번 감았다가 그대로 영면할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런만큼 곽자의에게 이런 직책은 보상보다는 부담이었고 정부측에서 적당히 은퇴시켜 주겠다 하니 곽자의로서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 이후에도 정부에서 이리저리 잘 대접해주었기에 곽자의는 과거의 명장 + 현재의 최상급 명예직이란 지위 + 물질적 재산 + 엄청난 명예를 등에 업고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편히 일생을 보낼수 있게 되었다. [40] 노기가 추남이어서 부인들이 노기를 보고 웃을까봐 격리시킨 것이다. [41] 본래 1품관은 무덤을 1장 8척의 높이로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곽자의만은 특별히 여기에 1장을 더하여 2장 8척의 높이로 하도록 했다. [42] 얼마나 이름높았는지 오대십국시대에 곽숭도라는 자는 사람들이 자신더러 곽자의의 후손이라고 아부하니까 껌쩍 죽어서 곽자의의 무덤을 찾아 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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