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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1:35:37

다짜뤼공


1. 개요2. 생애3. 다짜뤼공 기공비

1. 개요

達扎路恭
(? ~ ?)

토번 왕국의 무장. 안사지란으로 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 장안을 점령했다.

2. 생애

팽위의 귀족 가문인 은란 가문에서 태어났다.

치데축찬 시기 장군 직을 맡았지만 754년 치데축찬이 왕권강화를 시도하자 랑매색, 말동칙포에게 암살당했다. 그 뒤 랑매색과 말동칙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짜뤼공은 반란을 진압하고, 755년 치쏭데쩬을 첸뽀의 자리에 앉힌다.

이로 인해 다짜뤼공은 토번 왕조에서 중요한 신하가 되었다.

763년 당이 토번으로 보내는 공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에 대해서 토번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당시 첸뽀 치쏭데쩬은 다짜뤼공을 동정원수로 삼아 즉각적으로 20만 대군[1]을 편성해 장안 서쪽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였다. 조공을 재개하겠다는 당나라의 요청에도 토번은 무시로 일관하였다.

마침내 토번은 12만 군사로 장안에 입성하여 금성공주의 친척 이승굉을 제위에 앉혔다. 그러나 페허가 된 장안에서의 식량 보급 문제와 전염병, 당의 명장인 곽자의의 위병지계로 인해서 15일만에 철군하였다.

그러나 다짜뤼공의 장안 점령은 당을 정상으로 위한 위상이 완전히 파괴됨과 동시에 당과 토번과의 관계가 토번의 우위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765년, 토번이 회흘, 토곡혼, 당항, 노랄 등의 부족들과 당나라의 반역자 복고회은과 함께 당나라를 침공하자 다짜뤼공은 상야식, 상결식찬마, 상식동찬 등과 함께 토번군을 이끌고 봉천으로 진군하였으나, 당 장수 혼감에게 격퇴당하고 곽자의가 회흘 군대를 회유하는 등 실패한다.

769년 찬포 치쏭데쩬이 전국에 벤젠교 신앙을 폐지하고 불교로 개종하고, 모든 신하들이 토번에 절을 세우는 데 공헌하게 하며, 벤젠교의 제사를 폐지하고, 벤젠교의 경서를 강에 버리라고 명하자 절을 짓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교에 저항했으나 얼마 후 숭불로 전향하고 상야사에 흑탑을 세워 여러 부처의 유골을 봉안한다.

이후 치쏭데쩬은 다짜뤼공 기공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표창한다.

사후 큰 비인이 되어 계보다열이라 불리다가 진포의 호법신으로 위촉되었다고 전해진다.

3. 다짜뤼공 기공비

파일:다짜뤼공 장안 진공비.jpg
라싸에 있는 다짜뤼공 전승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군의 공격에 당(唐)의 군신(軍臣)이 모두 도주했기에 장안성에 들어와 옹왕의 손자이며 금성공주의 조카 되는 광무왕(廣武王) 이승굉(李承宏)을 제위에 오르게 하고 문무백관도 새로 정했습니다. 아울러 창고를 열어 많은 보물들과 각종 기술자들을 폐하에게 헌납하고자 본국으로 실어나르게 했습니다...(중략)... 그리고 현재는 적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의 일부를 남겨 놓고 장안성에서 철수하였며 본대는 양주.감주.숙주를 점령하고 사주로 향하는 중입니다.
다짜뤼공 기공비
이는 토번이 안사지란 이후 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당은 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수도 장안이 함락되고 낙양으로 도주한 데다가 가짜 황제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당 정권에 있어 수치였기 때문이다.

1950년 중공 정권이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로는 잘 보존되고 있지 않은데, 중공 정권에서는 비석 주위에 허름한 담만 세워 두었다.
[1] 신당서에는 약탈 수준이 아닌 대대적인 침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