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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10:44:04

P6M

마틴 P6M 시매스터(Martin P6M Seamaster)

1. 제원2. 개발 목적
2.1. 계획
3. 기체의 구조4. 시제기의 연이은 추락5. 다른 문제가 생긴 양산형6. 채용 중지, 계획 취소

1. 제원

형식: 수상 폭격기
개발: Glenn L. Martin Company
초도 비행: 1955년 7월 14일
승무원: 4명
전장 / 전폭 / 전고: 40.94 m / 31.27 m / 10.31 m
익면적: 180 m2
중량: 44,198 kg / 83,588 kg / 86,183 kg
동력: 프랫&휘트니 J75-P-2 터보제트 엔진 (17,500 lbf) 4기
최대속도: 1,104 km/h
순항속도: 861 km/h
실속속도: 245 km/h
항속거리: 3,352 km
전투행동반경: 1,210 km (무장 14톤 탑재시)
상승고도: 15,000 m
상승률: 37.5 m/s
화기관제장비: ASQ-29
방어무장: 20mm 기관포 2문 (Aero X-23B AGL 테일건 1,000발)
대잠 임무시: MK50 Mod 0 기뢰 (228 kg) 36발 / MK36 Mod 1 기뢰 (454 kg) 28발 / MK25 Mod 2 기뢰 (921 kg) 15발
정찰임무시: 고고도 항공 카메라 / M120(T9E8) 조명폭탄 27발
폭격임무시: MK91 / MK28 핵폭탄 (1,588 kg)
생산수: 12대

2. 개발 목적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육상 비행기의 성능이 눈부시게 향상되고 오지에 가까운 곳까지 구석구석 비행장이 건설되어 비행정의 전성기가 끝나버리자 대부분의 항공기는 육상기로 만들어지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여전히 수상기는 길이에 제한이 따르는 지상의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발진하는 육상기에 비해서 활주거리에 제한이 없어 이륙 중량을 키우기 용이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인기의 경우는 비행정이 오히려 육상기의 성능을 웃도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탓에, 특수한 용도에 한정하면 비행정은 아직 그 가치가 바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PBM 마리너의 개량형인 P5M 말린 비행정을 계속 사용 중이었고, 비록 실패했지만 동축반전 프로펠러 터보프롭 Tu-95처럼 둘 다 장착한 콘베이어 사의 R3Y 트레이드윈드라는 신형 비행정을 도입하고 공중급유기로 개조하고 전투기 4기를 동시에 급유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차 대전이 B-29가 떨어뜨린 원폭으로 종지부를 찍고 난 후, 미 해군은 공군만 갖게 된 핵무기 운용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사활을 걸게 되지만, 이 무거운 폭탄을 운반할 함재기 같은 마땅한 운반 수단을 찾기가 어려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49년에는 미 해군이 바라마지 않던 초대형 항공모함인 U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SS United States CVA-58)[1]의 건조가 취소되자 더욱 구석에 몰리게 된다. 이에 해군항공국(Bureau of Aeronautics: BuAer)은 화물 탑재능력이 높은 비행정으로 핵폭탄을 실어날라 목표에 투하하고 돌아오는 아이디어를 세웠다.

2.1. 계획

1952년에 미 해군은 대형 비행정에 관한 소요 제기와 함께 미국의 각 항공기 생산업체에 초안을 제시해 줄것을 희망했다. 비행정이라곤 해도 과거의 덩치만 크고 레시프로 엔진으로 느릿느릿 날던 것이 아니라, 최신의 강력한 제트 엔진을 장착하여 핵폭탄 같은 무거운 무장도 탑재하여 육상기 못지 않은 빠른 속도로 날 수 있는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 폭격기의 작전요구사항에는 13.6톤 이상의 폭탄을 싣고 거의 음속에 가까운 1,100 km/h의 스피드로 최소한 2,400 km 이상의 항속거리를 가져야만 했는데, 이 조건은 페이로드와 항속거리는 쉽게 달성할 수 있더라도 속도 성능은 실현시키기가 아주 어려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거기에 더해, 기본 미션인 핵 공격 외에도 기뢰 부설이나 장거리 정찰 임무도 한 가지 기종으로 해낼 수 있어야만 했다.

이 난해한 요청에 여러 제작사들이 달라붙었지만, 최종 서류 심사까지 통과한 것은 폭격기 메이커로 정평이 난 컨베어 사와 비행정의 명가로 불리던 마틴 사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마틴 사의 사내 명칭 모델 275가 속도에 치중한 컨베어의 초안에 비해 실현하기가 쉬울 것으로 판단되어 손을 들어주게 된다. 1952년 1 월에 최종 계약자로 발표된 마틴 사는 프로토타입을 XP6M-1이란 명칭으로 설계와 기체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마틴 사의 수석 엔지니어 조지 트림블(George S.Trimble)이 개발을 책임지고 짐 피어슨(J. D. Pierson)이 보좌하며 유체역학 전문가인 존 데커(J. L. Decker)는 거의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으면서도 지상과 바다에서 모두 뜨고 내릴 수 있는 수륙양용 폭격기라는 여지껏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어려운 과제를 풀어나가게 된다.

3. 기체의 구조

동체의 세장비는 15:1이라는 비행정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슬림하면서도 매끈한 실루엣을 그리고 있으며, 꼬리에는 원격조종으로 작동하는 테일건이 거치되어 있는데 이 총좌에는 20mm 기관포 2문과 함께 조준용 레이더도 설치되었다. 수면으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해 높이 고익으로 배치된 주날개는 아래로 처지고 뒤로 40도 젖혀진 하반각의 후퇴날개로 디자인되었다. 주익 양 끝에 달린 포드는 양력 균형추를 겸하는 연료탱크와 플로트를 겸하며 이착수할 때는 아래로 처진 날개에 의해 수면에 닿게끔 고안된 것이다. 꼬리 날개 역시 후퇴각이 주어진 T자형 미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산형에서 와서야 장착된 P&W J75 엔진은 이착수하는 동안 바닷물의 흡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익근부에 가깝게 좌우 2기씩 합계 4기가 설치되었다. 원래 P6M은 커티스-라이트(Curtis-Wright) 사에서 개발하고 있던 신형 XRJ47 터보 램제트 엔진을 설치하는 설계안도 있었으나, 결국 기체가 완성되기 전에 엔진을 수령할 수가 없어 원형기에는 앨리슨 J71 터보제트 엔진으로 대신하게 된다.

선체 형상으로 만들어진 동체 하부에는 폭탄창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착수할 때 수면과의 충격을 견디면서도 충분한 밀폐성을 유지해야만 해서 실제로 제작하기가 몹시 까다로왔다고 한다. 다행히, 마틴 개발진들은 그간 여러 비행정을 만들어오면서 선체 하부의 폭탄창 구조를 실현하기에 충분한 경험을 쌓고 있었다. 로터리 방식으로 회전하는 폭탄창에는 일반 범용 폭탄 외에도 기뢰나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고, 정찰 임무에 필요한 카메라와 센서 같은 장비도 장착할 수 있었다.

4. 시제기의 연이은 추락

XP6M-1은 1955년에 완성되어 같은 해 7월 14일에 시험 비행을 개시했고, 시험 및 평가를 위해서 2대가 더 만들어졌다. 초기 시험 비행에서 발견된 주된 문제점은 기체 보다는 엔진 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애프터버너를 켜면 과도한 진동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조지 트림블과 마틴 개발진들은 동체에서 가까운 노즐이 발생시키는 고온 고압의 개스가 진동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시제기들의 노즐을 전부 5도 바깥쪽으로 향하게 개조를 했다. 증상은 개선되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1955년 12월 17일에 1호기가 진동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체사피크 만에 추락해 4명의 승무원이 모두 사망했고, 이듬해인 1956년 11월 9일에는 원형 2호기가 수평미익의 승강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추락해 대파되고 말았다. 다행히 두 번째 사고에서는 2호기에 새로 설치된 사출좌석을 이용해 승무원이 모두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런 참사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시매스터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만큼 해군 수뇌부가 이 수륙양용 폭격기에 대해 걸고 있는 기대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행 테스트는 선행양산형인 YP6M-1을 이용해 1958년 1월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5대가 제작된 YP6M-1은 비행 영역을 테스트하는 작업 외에 무장 투하와 발사 같은 좀 더 다양한 테스트를 받았다. 다행히 기능 시험은 무난하게 통과한 YP6M-1이었으나, 중량이 원래 예정보다 초과되어 비행 성능에 문제가 있었고 이착수를 할 때마다 상하로 튀며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포퍼싱(porpoising) 증상이 흔하게 일어나는 문제가 있었다. 중량 문제는 스탭들 모두 예상했던 문제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착수하는 충격은 활주로 착지에서 받는 충격 보다 훨씬 커서, 응력이 걸리는 부분에는 특별히 보강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시매스터의 날개 익근부의 윙 필렛은 두랄루민을 깎아 2.5 cm 두께로 만들어진 부품이었다.

5. 다른 문제가 생긴 양산형

이런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양산형에 해당되는 P6M-2는 1959년에야 완성되었다. 엔진은 원형기에 달려있던 추력 14,000파운드급의 앨리슨 J71-A-6(Allison J71) 대신 훨씬 강력한 추력 17,500파운드급 프랫&휘트니 J75-P-2로 강화되고 캐노피도 개선되었다. 엔진의 배치와 노즐의 위치도 변경되어 진동 문제도 상당부분 해결되었고, 실제 임무에 필요한 스페리 항법 시스템과 폭격 조준기 같은 항전 장비들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해군기에 쓰이던 버디 시스템 방식의 공중급유도 가능하게끔 폭탄창에는 드로그(drogue)가 추가되었다.

이 시기, 미 공군과 해군은 저공으로 낮게 고속으로 날아서 침투하는 전술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항공국은 P6M의 개발 도중에 저고도 비행 성능을 높여달라는 주문을 해왔고, P6M은 해면 고도에서 마하 0.9의 스피드를 마크했다. 그렇지만 P6M-2는 엔진과 노즐의 개량에도 불구하고 고속 비행에서는 또다시 진동이 쉽게 일어나는 증상이 도졌다. 테스트 파일럿들의 분석과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이것을 막는 조종법이 만들어졌으나, 그 통제는 정교한 솜씨를 필요로 했다. 거기에 공기 밀도가 높은 저공에서 고속 비행을 자주 하게 되자 윙팁에 달린 플로트에서 항력이 급증해 속도를 유지하려면 엔진의 온도가 올라가는 새로운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P6M은 운용하는 요원들 사이에서 시매스터가 아니라 "시미스트리스(SeaMistress)"라는 미움섞인 별명으로 불렸다.

이와 같이, P6M은 기술적인 문제도 완전히 클리어된 상태가 아닌데다가, 잘 훈련된 조종사가 필수적이어서 운용도 쉽지 않을 것이 예상되었다. 결정적으로, 시매스터 비행정이 개발되는 동안 새롭게 등장한 A-3 스카이워리어(Douglas A-3 Skywarrior) 같은 대형 함상 공격기가 한발 앞서 실용화된데다, 완전히 새로운 핵투발 수단인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이 실용화가 코앞에 다가왔다. 즉, 시매스터 같은 핵공격 전용 대형 비행정의 필요성이 희미해진 것이다.

6. 채용 중지, 계획 취소

해군항공국은 1959년 8월에 마틴 사에게 계획의 중지를 통보했다. 그때까지 P6M-2는 24대가 주문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완성된 기체와 제작 중이던 기체까지 포함해 모두 12대가 생산 라인에 올려져 있었다. 그때까지 P6M에 해군이 쏟아부은 개발비는 거의 4억 달러에 달하고 있었는데, 이 금액은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25억 달러 이상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다.

1956년에는 P6M을 운용하기 위해 진행된 기존 수상기 모함인 커티스급 수상기 모함 앨버말(AV-5 Albemarle)의 개장이 완료되었지만, 역시 비행정의 양산이 취소되면서 더 이상 건조되지는 않았다. 해군은 앨버말 외에도 AV-7 커리툭(USS Currituck)과 호위항모인 CVE-105 커먼스먼트베이(USS Commencement), 잠수 유조선 AOSS-362 과비나(USS Guavina)도 P6M 편대에 정비와 보급 지원을 해주기 위해 개장해 수상기 타격함대(Seaplane Striking Force)라는 신종 함대를 새롭게 창설하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모두 중지시켜 더 이상의 예산 낭비를 막았다.

미 해군은 다른 용도로 P6M을 쓰고 싶어했지만, 문제는 그 동안 들어간 돈이 P6M을 전략 폭격기로 사용하지 않으면 도저히 정당화가 불가능할 금액이란게 문제였다. 결국 미 해군은 구형이 된 비행정인 P5M을 1967년까지, HU-16을 1976년까지 마르고 닳도록 써야 했다.


[1] 고속 여객선으로 건조된 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와는 다른 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