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 FIFA 월드컵 서독 | ||
조별 라운드 | 1조, 2조 | 3조, 4조 |
결승 라운드 | 8강 이후 |
1. 8강 A조
1.1. 1경기
네덜란드 4 vs 0
아르헨티나1.2. 2경기
브라질 1 vs 0
동독1.3. 3경기
아르헨티나 1 vs 2
브라질1.4. 4경기
동독 0 vs 2
네덜란드1.5. 5경기
아르헨티나 1 vs 1
동독1.6. 6경기
네덜란드 2 vs 0
브라질1.7. A조 총평
2. 8강 B조2.1. 1경기
유고슬라비아 0 vs 2
서독2.2. 2경기
스웨덴 0 vs 1
폴란드2.3. 3경기
폴란드 2 vs 1
유고슬라비아2.4. 4경기
서독 4 vs 2
스웨덴2.5. 5경기
폴란드 0 vs 1
서독2.6. 6경기
스웨덴 2 vs 1
유고슬라비아2.7. B조 총평
3. 3·4위전
브라질 0 vs 1
폴란드4. 결승전
네덜란드 1 vs 2
서독[clearfix]
1. 8강 A조
순위 | 국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1 | 네덜란드 | 3 | 3 | 0 | 0 | 8 | 0 | +8 | 6 | |
2 | 브라질 | 3 | 2 | 0 | 1 | 3 | 3 | 0 | 4 | |
3 | 동독 | 3 | 0 | 1 | 2 | 1 | 4 | -3 | 1 | |
4 | 아르헨티나 | 3 | 0 | 1 | 2 | 2 | 7 | -5 | 1 |
1.1. 1경기 네덜란드 4 vs 0 아르헨티나
경기장 |
파르크슈타디온 겔젠키르헨 - 서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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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A] |
1974년 6월 26일 19:30 (1974년 6월 27일 03:30) |
|
국 가 | 네덜란드 | 아르헨티나 |
득 점 | 4 | 0 |
득점자 |
크루이프(11'),(90') 크롤(25') 렙(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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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경기 브라질 1 vs 0 동독
경기장 |
니더작센 슈타디온 하노버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6월 26일 19:30 (1974년 6월 27일 03:30) |
|
국 가 | 브라질 | 동독 |
득 점 | 1 | 0 |
득점자 | 히벨리누(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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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서 자이르지뉴가 동독 선수들의 수비벽 사이에서 자세를 낮추면서 생긴 틈을 정확히 노린 히벨리누의 왼발 프리킥 골이 나왔다.
1.3. 3경기 아르헨티나 1 vs 2 브라질
경기장 |
니더작센 슈타디온 하노버 - 서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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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A] |
1974년 6월 30일 16:00 (1974년 7월 1일 00:00) |
|
국 가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득 점 | 1 | 2 |
득점자 | 브린디시(35') |
히벨리누(32') 자이르지뉴(49') |
1.4. 4경기 동독 0 vs 2 네덜란드
경기장 |
파르크슈타디온 겔젠키르헨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6월 30일 16:00 (1974년 7월 1일 00:00) |
|
국 가 | 동독 | 네덜란드 |
득 점 | 0 | 2 |
득점자 |
네스켄스(7') 렌센브링크(59') |
1.5. 5경기 아르헨티나 1 vs 1 동독
경기장 |
니더작센 슈타디온 하노버 - 서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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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A] |
1974년 7월 3일 19:30 (1974년 7월 4일 03:30) |
|
국 가 | 아르헨티나 | 동독 |
득 점 | 1 | 1 |
득점자 | 하우스만(20') | 슈트라이히(14') |
1.6. 6경기 네덜란드 2 vs 0 브라질
경기장 |
베스트팔렌슈타디온 도르트문트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7월 3일 19:30 (1974년 7월 4일 03:30) |
|
국 가 | 네덜란드 | 브라질 |
득 점 | 2 | 0 |
득점자 |
네스켄스(50') 크루이프(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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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A조 총평
토탈 풋볼을 앞세운 네덜란드의 기세는 매서웠다. 첫 경기에서 크루이프의 두 골을 앞세워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4:0으로 관광보냈고, 두 번째 동독전마저 2:0으로 가볍게 눌러 일찌감치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똑같이 2승을 기록한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마저 2:0으로 승리, 3전 3승 무실점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브라질 또한 동독을 1:0, 아르헨티나를 2:1로 누르며 1라운드에서의 졸전을 씻는 듯 했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네덜란드에 0:2로 농락당하며 4강 진출에 만족해야했다.[7] Again1930을 외치며 선전을 바라던 아르헨티나는 첫 경기부터 네덜란드에 0:4로 처참히 깨지면서 다음 경기 브라질전마저 1:2로 패배, 8강에서 그대로 주저앉아야만 했다. 보다시피 당시 네덜란드는 남미 TOP3를 상대로 3전 전승에 단 한 골도 내주지 않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남미팀에 유독 강했던 이유는, 감독 미첼스가 아약스 시절부터 토탈풋볼로 크게 주목받고 있었는데, 유럽 선수들은 이미 이 전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어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남미 선수들은 전혀 보지 못한 생소한 전술과 플레이였기 때문에 대책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국제무대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를 한 대회에서 3전 전승을 했던 팀은 1974년 네덜란드가 유일하다.[8]
2. 8강 B조
순위 | 국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1 | 서독 | 3 | 3 | 0 | 0 | 7 | 2 | +5 | 6 | |
2 | 폴란드 | 3 | 2 | 0 | 1 | 3 | 2 | +1 | 4 | |
3 | 스웨덴 | 3 | 1 | 0 | 2 | 4 | 6 | -2 | 2 | |
4 | 유고슬라비아 | 3 | 0 | 0 | 3 | 2 | 6 | -4 | 0 |
2.1. 1경기 유고슬라비아 0 vs 2 서독
경기장 |
라인슈타디온 뒤셀도르프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6월 26일 16:00 (1974년 6월 27일 00:00) |
|
국 가 | 유고슬라비아 | 서독 |
득 점 | 0 | 2 |
득점자 |
브라이트너(39') 뮐러(82') |
2.2. 2경기 스웨덴 0 vs 1 폴란드
경기장 |
네카어 슈타디온 슈투트가르트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6월 26일 16:00 (1974년 6월 27일 00:00) |
|
국 가 | 스웨덴 | 폴란드 |
득 점 | 0 | 1 |
득점자 | 라토(43') |
2.3. 3경기 폴란드 2 vs 1 유고슬라비아
경기장 |
발트슈타디온 프랑크푸르트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6월 30일 16:00 (1974년 7월 1일 00:00) |
|
국 가 | 폴란드 | 유고슬라비아 |
득 점 | 2 | 1 |
득점자 |
데이나(24' PK) 라토(62') |
카라시(43') |
2.4. 4경기 서독 4 vs 2 스웨덴
경기장 |
라인슈타디온 뒤셀도르프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6월 30일 16:00 (1974년 7월 1일 00:00) |
|
국 가 | 서독 | 스웨덴 |
득 점 | 4 | 2 |
득점자 |
오베라트(51') 본호프(52') 그라보브스키(76') 회네스(89' PK) |
에드스트룀(24') 산드베리(53') |
2.5. 5경기 폴란드 0 vs 1 서독
경기장 |
발트슈타디온 프랑크푸르트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7월 3일 16:00 (1974년 7월 4일 00:00) |
|
국 가 | 폴란드 | 서독 |
득 점 | 0 | 1 |
득점자 | 뮐러(76') |
2.6. 6경기 스웨덴 2 vs 1 유고슬라비아
경기장 |
라인슈타디온 뒤셀도르프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7월 3일 19:30 (1974년 7월 4일 03:30) |
|
국 가 | 스웨덴 | 유고슬라비아 |
득 점 | 2 | 1 |
득점자 |
에드스트룀(29') 토르스텐손(85') |
쉬르야크(27') |
2.7. B조 총평
동독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서독은 8강 조별리그에서 전력을 다잡으며 화려한 골 퍼레이드를 펼친다.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만큼 주목받지는 못 했지만, 서독 역시
프란츠 베켄바워를 앞세워 보다 유기적이고 끈끈한 플레이를 펼침으로써 네덜란드에 맞설 유일한 상대라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유고전에서 2:0, 스웨덴전 4:2를 기록하며 일찍이 4강 진출을 확정짓고 결승 티켓을 놓고 싸웠던 폴란드전에서도 전 대회 득점왕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 16강 본선 조별리그에서의 네덜란드처럼 서독 역시 8강 조별리그에서 베켄바워의 골은 한 번도 터지지 않았지만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단연 No.1이었다. 라토와 데이나 콤비의 대활약으로 8강에 오른 폴란드는 이번에도 두 콤비를 앞세워 스웨덴전 1:0, 유고전 2:1로 승리하며 4강 진출을 일찍 확정했다. 네덜란드와 맞서 유일하게 승점을 챙긴 스웨덴은 마지막 경기에서 2:1으로 승리하며 실리를 챙겼고,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는 자이르전 9:0의 대활약에도 정작 8강 조별리그에서는 3전 전패를 당하며 8강 7위로 아쉽게 무대에서 내려왔다.
3. 3·4위전 브라질 0 vs 1 폴란드
경기장 |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7월 6일 16:00 (1974년 7월 7일 00:00) |
|
국 가 | 브라질 | 폴란드 |
득 점 | 0 | 1 |
득점자 | 라토(76') |
1938년 대회에서 명승부를 펼친 이후 다시 맞붙은 두 팀간의 대결은 폴란드의 복수로 끝이 났다. 브라질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여, 8강 조 2위로 3·4위전으로 가서 결과만 보면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7경기 6득점 4실점의 골득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 경기 당 한 골도 넣지 못한 유일한 대회였다. 심지어 처참하게 16개국 본선 조별리그에서 11등으로 탈락한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이렇게 저조한 득점력을 보여주진 않았다. 펠레, 토스탕, 제르송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은퇴하면서 전력에 큰 공백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철저한 수비축구로 승부수를 띄워야만 했기 때문이다.[16]
결국 성적과는 별개로 지루하게 늘어지는 경기력을 대회 내내 보여주었고, 화려한 개인기를 앞세운 '무조건 공격'에 익숙한 브라질 축구팬들의 크나큰 분노를 사고 말았다. 단점을 파악하고 이를 잘 극복했다는 점에서 자갈루 감독은 충분히 명장이었지만, 자택이 습격받을 정도로 이후 상당 기간 동안 평가가 박하게 깎이며 신변에 위협받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는 3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인연이 없었지만, 1972년 뮌헨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라토-레이나 투톱의 화끈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모처럼 세계 대회에서 확실히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후 네 대회 연속 출전하며 3위-8강 5위-3위-16강 14위라는 성적을 냄으로써 유럽의 강호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4. 결승전 네덜란드 1 vs 2 서독
경기장 |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 - 서독 |
|
경기일[A] |
1974년 7월 7일 16:00 (1974년 7월 8일 00:00) |
|
국 가 | 네덜란드 | 서독 |
득 점 | 1 | 2 |
득점자 | 네스켄스(2' PK) |
브라이트너(25' PK) 뮐러(43') |
|
|
- 결승전을 앞두고 대다수 전문가들은 네덜란드의 우승을 예측했다. 워낙 토탈 풋볼의 임팩트가 컸고, 포지션을 정확히 지키지 않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상대선수들을 공격 진영부터 압박하는 플레이는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독에는 '리베로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었다. 현재 3-5-2 시스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전술로 프란츠 베켄바워를 리베로로 앞세워 역시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프리롤 역할을 맡아 선수들을 그라운드에서 지휘하는 방식으로 역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지금의 '전차 군단'이라는 별명을 갖게 해준 전술로서, 어쩌면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과도 비슷한 점이 많은 전술이었다. 기존의 화려한 개인기 vs 카테나치오로 흘러갔던 축구의 흐름을 완전히 깨부순 두 혁신간의 대결은 전세계의 관심을 낳았고, 유럽의 두 전설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의 맞대결 승자가 누가 될지도 희대의 관심사였다.
결승전은 7월 7일 오후 4시에 시작했고, 휘슬이 울리자마자 네덜란드가 PK를 얻어내 1: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네덜란드가 이기나 싶었지만 그 전까지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준 네덜란드는 온데간데없었고 크루이프도 제대로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사실 요한 크루이프가 활약을 하지 못한 이유에는 서독판 진공청소기 베르티 포크츠[18]역할도 컸다. 당시 공격 연계 플레이나 볼키핑, 패싱 능력은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상대 키플레이어를 완벽하게 지우는 재주가 있었던 포크츠는 요한 크루이프가 토탈 풋볼의 엔진임을 간파한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에 의해 요한 크루이프 전담마크 할 것을 지시받았고, 이 부분이 일정 부분 효과를 발휘해 네덜란드의 조직력을 다소 무디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포크츠의 집중된 마크에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이며 페이스를 잃었고, 포크츠는 결승전에서 두번의 볼 터치만 기록했을 정도로 오직 요한 크루이프 지우기에 집중했다. 결국 크루이프와 포크츠가 사라진 10 vs 10 시합이 되자 프란츠 베켄바워의 전두지휘 아래 서독이 경기의 흐름을 쥐었고, 결국 전반 25분 다시 PK로 동점을 만들고 43분 게르트 뮐러의 역전골이 터지면서 전반전은 2:1로 종료되었다.
후반전 역시 마찬가지로 서독의 우세 속에 경기가 진행되었고 네덜란드는 동점골을 넣지 못한 채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서독의 두 번째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서독 선수들과 뮌헨 관중들은 미친 듯이 환호했고 안타까운 패배에 네덜란드 선수들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19][20]
비록 우승은 서독이 가져갔지만, 전술의 혁신성에 있어서는 네덜란드가 앞섰고 월드컵 무대에서 이들이 보여준 단 한 번의 충격은 순식간에 축구 역사를 뒤바꾸었다. 특히 토탈 풋볼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개인기의 남미 팀들을 제대로 뭉개버려 이후 남미 팀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개인기에 팀웍과 유기성을 강화시킨 방향으로 완전히 흐름이 넘어갔다. 분명히 서독이 우승을 했지만 대회 최고의 화제 팀은 네덜란드였으며[21], 크루이프는 월드컵을 통해 전세계적인 대선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실제로 크루이프는 1974년에 월드컵 우승을 한 베켄바워를 누르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떡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대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거두고도 우승팀 이상의 위상을 지닌 팀은 1954 헝가리와 더불어 1974 네덜란드 둘 뿐이다. 안타깝게도 크루이프가 다음 대회에서 가족 납치 협박사건으로 월드컵에 불참해 크루이프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무대이기도 했던 대회였다. 크루이프가 빠지고 아르헨티나의 각종 조작과 편파에도 준우승을 차지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네덜란드의 임팩트가 얼마나 컸고 충격적인 전력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음이다. 물론, 이번 자국 월드컵에서 도핑을 하며 떳떳하지 못하게 두 번째 월드컵을 손에 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상기한 헝가리와 네덜란드를 모두 준우승에 머무르게 한 팀이 바로 서독이다.[22][23]결국 서독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당당히 우승한다.
참고로 베켄바워는 결승전 직후 네덜란드가 우승했어야 했다는 의견에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명언으로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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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네덜란드에 0 : 2로 패배하여 결승전 진출에 실패하자 브라질 현지에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마리우 자갈루의 집을 괴한들이 습격하여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때려부수며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모두 기물파손 혐의로 브라질 현지경찰에 연행되었으며, 당시 브라질에서 유행하던
독감의 이름을 무려 자갈로 독감이라고 명명했다! 즉,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독감
바이러스와 동급으로 취급해버린 것이다.
[8]
그리고
44년 후 열린 대회에서 프랑스가 남미
3
개
국을 3전 전승으로 이긴 2번째 팀이 되었다. 다만 페루가 브라질 자리를 대신한 것만이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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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특히 이 중에서 펠레의 뒤를 이어 브라질의 10번이 될 재목이었던 토스탕의
망막박리로 인한 이른 은퇴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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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베르티 포크츠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디펜딩의 챔피언 독일을 이끌고 출전하였지만,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불의의 역습을 당해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다. 당연히 대한민국이 독일과 2:3으로 분전하며 명승부를 이끌었던 그 당시 감독이기도 하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독일 대표팀을 이끌었으나 8강에서 크로아티아한테 0:3으로 대패해 준결승 진출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
요한 크루이프를 포함하여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2차 대전 서독 점령기의 경험으로 인해 서독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요한 크루이프는 결승전에서 (서독을 상징하는) 아디다스가 제작한 네덜란드 유니폼의 삼선 중 가운데 선을 지우고 출전했을 정도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20]
크루이프가 독일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줄을 하나 지웠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이다. 일반적으로는 크루이프의 개인 스폰서가 태생부터 아디다스의 경쟁사인 푸마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지고 보면 푸마도 독일 기업이니 크루이프가 그 정도로 독일을 미워했다면 푸마의 간판 스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21]
두번째는 바로 개최국이자 우승국인 서독팀.
[22]
다만
1954년 월드컵 우승 당시 결승전 하프타임때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했다.
[23]
1974년 월드컵, 그리고 1972년 올림픽에서도 서독은 도핑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