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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08:12:24

히메라 전투


시기 기원전 480년 9월?[1]
장소 시칠리아 히메라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파일:external/92d427a920cd1e7d61ba5978617b8514c354d8e7eba84637d62fea6d5b1ff9d4.png 시라쿠사
히메라[2]
지휘관 하밀카르 겔론 1세
테론
결과 카르타고군 대패
병력 5만[3] 보병 5만, 기병 5000
피해 전사자 1만, 포로 1만 이상[4] 불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1. 개요

페르시아 전쟁 시기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카르타고 시라쿠사 사이의 전투. 제1차 시칠리아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이며, 이후 2세기 가까이 이어지는 시칠리아 전쟁의 시작점이다.

2. 배경

전통적으로 시칠리아 섬은 서부 해안을 카르타고가, 동부 해안을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점유한 상태로 대치하고 있었다.[5] 본디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본토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도시를 각각의 정부가 다스리는 형태로 통치되고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 말~5세기 초에 들어서 한 사람의 지배자가 여러 도시들의 참주를 겸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겔라의 참주였던 클레안드로스와 히포크라테스가 대표적인 형제로 이들은 기원전 490년까지 겔라, 레온티니, 메시나 등의 도시를 점령하고 영토를 편입했으며, 히포크라테스의 기병대장 겔론은 히포크라테스의 아들을 폐위한 후 시칠리아 동부 일대의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6]

기원전 480년 양 세력권의 균형이 무너지는 조짐이 하나는 시칠리아 내부에서, 하나는 외부에서 터져나왔다.

3. 전개

카르타고의 왕 하밀카르[12]는 테론을 축출하고 폐위된 테릴루스를 복위시킬 목적으로 시칠리아 출병을 결정했다. 디오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삼단노선 200척, 수송선 3000척을 동원했다고 하며, 전차와 기병도 다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는 파노르무스[13]에 상륙하던 가운데 폭풍의 내습으로 많은 함선과 전차를 잃어버려서 며칠 간 정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밀카르는 그 사이 동맹국인 셀리누스와 레기움 등에 참전을 독려하는 사절을 파견했다.

정비를 마친 카르타고군은 히메라를 포위했다. 폭풍으로 잃었던 때문인지 공성병기도 불충분했고 포위도 불완전해서 포위망은 히메라시를 절반도 감싸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카르타고군은 도전에 나선 히메라군을 격파했고, 하밀카르는 바알-하몬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건설하는 한편 사방으로 기병을 풀어 히메라 근교를 약탈했다. 히메라에는 기병이 부족했으므로 카르타고군 약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포위된 히메라의 참주 테론은 남은 기병을 긁어모아 약탈자들에 맞서는 한편 시라쿠사 참주 겔론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히메라 기병들의 활약이 효과적이었는지 패전으로 의기소침해있던 히메라의 사기가 진작되기 시작했고, 하밀카르는 셀리누스에 특별히 기병대의 파견을 요구하게 된다. 한편 테론의 요청을 받은 시라쿠사 참주 겔론은 보병 5만, 기병 5천을 이끌고 출병해 히메라로 진군했다.

여기서부터는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로스의 서술이 엇갈리기 때문에 어느 쪽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어느 쪽이든 카르타고군은 완전히 박살났으며, 전사자만 1만, 포로는 그 이상 발생했다고 한다.

4. 결과

카르타고는 배상금 2000탈렌트를 지불하고 겔론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조약 내용으로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세력권이 축소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 참주들은 시칠리아 북해안 즉 티레니아 방향으로 길이 열렸고 기원전 474년 카르타고의 동맹국 에트루리아마저 해전으로 격파하며 티레니아 제해권을 장악했다.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도시들은 침략자 카르타고와의 무역을 거부했고, 카르타고인들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추방했다. 이에 카르타고 선단은 서쪽으로 진출 방향을 잡아 한노의 아프리카 항해, 히밀코의 브리타니아 항해가 이 시기에 벌어진다. 또한 왕 하밀카르가 어이없이 전사하면서 왕권이 급격하게 축소되어 왕자 기스코가 추방되었고, 권력은 104인회로 알려진 최고재판소와 원로원으로 넘겨졌다.

테론은 473년까지 아크라가스-히메라를 다스리다 죽었고, 그 아들은 겔론의 동생 히에로 1세에게 패하여 영토가 시라쿠사에 합병되었다.

겔론은 카르타고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어 기원전 478년까지 시라쿠사를 통치하다 사망하고 동생 히에로 1세에게 권력을 넘겨준 후 사망했다. 그는 시라쿠사 시민들의 존경을 받아 훗날 티몰레온이 시라쿠사 참주들의 동상을 팔아 전비를 마련할 때도 그의 동상만은 유일하게 홀로 살아남았다.

[1] 헤로도토스 살라미스 해전과 같은 날 벌어졌다고 주장했고, 디오도로스 테르모필레 전투와 같은 날에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역사가 모두 지중해 동부와 서부와 동시에 그리스인이 승리한 날이라고 기록한 점을 미루어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높다. [2] 아크라가스 참주가 히메라 참주를 축출하고 히메라 참주가 된 상황이므로 아크라가스라고 봐도 무방하다. [3] 디오도로스는 30만으로 기록하나, 현대 사가들은 5만 정도로 추정한다. [4] 디오도로스는 전사자만 15만 이상으로 집계한다. [5] 둘 모두 해양 민족들이었으므로 식민도시들은 대개 해안선에 분포하고 있었고, 섬의 내륙 도시들은 원주민인 엘리모이인과 시카노이인 등이 세운 것들이었다. 원주민들은 대세에 따라 동맹 관계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생존을 도모했다. [6] 그는 시라쿠사를 점령한 이후 인근 도시의 귀족들을 시라쿠사로 이주시켜 시라쿠사를 사실상 수도로 만들었다. 따라서 겔라 출신임에도 시라쿠사 참주로 인식된다. [7] 사실 크세르크세스도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칠리아군이 참가하면 귀찮아지니 시칠리아 그리스군을 묶어줄 정도만 기대한 모양. [8] 그리스 연합군의 총 지휘권을 내놓을 것 [9] 겔론은 과거(기원전 510년) 시칠리아에서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사실상 뒷배에 자리한 카르타고)과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 벌어진 분쟁 당시 시칠리아 측의 원군 요청을 그리스 본토에서 무시한 것에 원한이 있었다고 한다. 해당 분쟁은 스파르타의 왕자인 도리에우스가 시칠리아 한복판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려다 실패하여 도리에우스가 살해당하고 도시가 파괴되는 결말로 끝났는데, 도리에우스가 어중이떠중이 모험가도 아니고 스파르타의 왕자 신분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심지어 그의 친동생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하는 레오니다스였다!! [10] 메시나와 히메나는 그리스계 식민도시였으나 이들은 이오니아 계통으로 도리아 계통인 시라쿠사와 경쟁관계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11] 오늘날의 아그리젠토. [12] 카르타고 마고 왕조의 3대 왕이기도 하다. [13] 오늘날의 팔레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