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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리수 '황성옛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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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황성옛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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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1928년, 전수린이 작곡하고 왕평이 작사하여, 이애리수(1910~2009)가 부른 가요. 당시 이들이 있던 순회극단[1]이 개성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작곡된 노래로, 옛날에는 찬란했으나 현재엔 그 흔적조차 없어지고 폐허가 된 고려의 만월대를 보고 얻은 감명을 소재로 하였다. 따라서 곡명의 황성도 황실의 궁궐인 皇城이 아닌 황량해진 성이라는 荒城이다.[2]세월의 흐름 앞에서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한 필멸자로서의 자신을 깨닫고, 주체할 수 없는 쓸쓸함과 설움을 담은 노래이다. 어쩐지 노래 정서가 조선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될 수 있는데, 이는 황성옛터가 황성의 달의 오마주라고 해도 될 정도로 주요 소재와 정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침 이 노래를 유명하게 부른 이도 남인수라, 황성옛터의 왜색에 대해 한동안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정작 해당 곡을 부른 이애리수는 음독자살 소동까지 일으킨 후 배동필의 부모한테서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주변인들에게 연예인인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결혼을 허락 받고 나서는 가정주부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 별세했다. 1960년 이후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낸다는 소식만 전해진 채로 잊혔다. 연예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간간히 TV와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언론사 인터뷰에 응하는 식으로 근황을 전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학자들과 만나서 당대의 연예계 생활이나 음악 관련 풍문을 증언하는 식으로 근황을 전할 수도 있었지만 어떠한 외부 활동도 하지 않은 탓에 학자들조차도 이애리수가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러다 2008년에서야 근황이 알려졌으며, 2009년 향년 99세로 작고했다. 자식들도 나중에 어머니가 말하기 전까지는 가수 생활을 한 줄 몰랐다고 한다. #
영천 출신인 작사가 왕평은 평안북도 강계 공연장에서 세상을 떴다. #
1932년 빅타레코드에서 발매한 이애리수의 독집 음반의 곡명은 <황성의적>이고 1941년 남인수가 왕평 추모 앨범에 <황성옛터>라는 제목으로 취입하면서 이후 제목이 <황성옛터>로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남인수 사후 1절과 2절의 후렴구 가사가 맞바뀌어 불려지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다.
2. 가사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이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이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3. 야인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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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성옛터 부르갓서. 황성옛터... 어이 밴드, 반주하라... 거 반주하라!!!!
작중에서
시라소니가 불렀다.
끔찍할 정도로 못 불러서 화를 내는
문영철과
신영균의 모습이 인상적.[3] 사실 이 역시 김두한과 싸움을 붙고자 하는 의도적인 도발행위였다. 실제로 시라소니의 노래 실력은 나쁜 편은 아닌데 극 후반에서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 뒤 그의 경호를 그만두고 야인으로 돌아갈 때 희망가를 부르는데, 이 때는 나쁘지 않게 불렀다.[4] 다만 희망가 장면은
야인시대/합성물에선 보기가 힘들고 그냥 시라소니가 음치처럼 불렀던 황성옛터 첫구절만 주구장창 나온다.[5]4. 기타
- 박정희 前 대통령이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로 유명하다. 심수봉이 안가에서 황성옛터를 부르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 조영남은 대통령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아 크게 사고를 친 적이 있다. 군 입대 후 계룡대에서 군생활을 하던 중, 박 대통령 앞에서 황성옛터를 부르기로 한 조영남은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자 부르라는 황성옛터는 안 부르고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네~."를 열창하였고, 옆에 배석했던 장군 한명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황성옛터를 불렀지만 조영남은 황성옛터 가사를 까먹은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흥이 깨진 박대통령은 행사를 중단시키고 행사장을 떠나버렸고, 조영남은 헌병대로 끌려가서 "뭐 작년에 왔던 각설이? 매년 오시는 대통령이 각설이냐?"라며 추궁당했다.
-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정희를 모티브로 한 박통이 이 노래를 부른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부하들을 토사구팽하기를 반복하는 고독한 독재자의 심경을 잘 담아냈다.[6] 박통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보니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등장하며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궁정동 대행사 장면에서는 박통은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초대된 여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데 이 자리에서 박통은 김 부장과 마시던 막사 대신 양주를 따라 마시는 등 초심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 전개상 인트로에서 이 노래가 잔잔하게 깔리다가 총성이 울리고 유신 정권을 결사 옹호하며 절대 권력을 누리던 남산 중앙정보부와 그 위상에 대한 소개가 잠시 나오는데 이 노랫말과 이 영화의 결말을 비교해보면 이 노래가 더 허망하게 들린다.[7]
[1]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극을 공연하는 극단.
[2]
이에 대해 또다른 의견이 있는데 皇成으로 하였다가 총독부에서 대한제국시기를 그리워하는 곡이라며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가수와 작곡가를 잡아들이자 皇成이 아닌 荒城이라고 이야기하며 고려의 옛 터를 보며 생각했다고 하여 풀려났다는 이야기다.
[3]
당시 상황은 신영균이 폭발 직전 문영철이 말렸고, 문영철 역시 참다 참다 폭발하기 직전에 김영태가 말렸지만 김무옥이 참치 못하고 시라소니에게 싸움을 신청했다.
[4]
이와 별개로 유독 술 먹고 흥이 올랐을 때만 끔찍한 노래 실력을 보인다는 설도 있다.
[5]
이 음치처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 합성물에서 황성옛터 장면이 나올 땐 시전 난이도가 최악이라고 나오거나 주변인들 반응이 영 좋지 않게 나온다.
[6]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잠시 뒤에
누군가로 부터 전화를 받으며 토사구팽을 암시하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7]
한 때 황제국을 칭하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중심에 있었던 고려왕조가 몰락한 후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가사의 내용인데 유신정권 역시 10.26 사태 이후 박 대통령과 비롯한 핵심인물들이 모조리 죽거나 권력에서 밀려났고 헌법까지 씹어먹던 중앙정보부 역시 김 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모조리 숙청되고 이름 또한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