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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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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초기3. 김성립과의 혼인4. 불행한 결혼생활
4.1. 남편과의 불화
4.1.1. 희박해진 부부간의 정4.1.2. 김성립의 성품 관련 논란4.1.3. 허난설헌의 재주와 외모4.1.4. 김성립의 과거급제
4.2. 가족을 여의다
5. 최후
5.1. 허난설헌 자살설
6.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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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난설헌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생애 초기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ㅡ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 #
위 허균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허난설헌과 동복 형제 허균, 허봉은 강릉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는데 당시 유교적 사회에 비추어볼 때 여성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며 당대 여성들이 거의 갖지 못했던 [1]를 지어 불러 주었고 한문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허난설헌은 8살 때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은 뒤 선비들 사이에서 신동이라 불리고 유명했다.[2] 한국사의 여걸에 대한 책 한국사여걸열전을 쓴 역사연구가 황원갑은 “난설헌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시도 많이 지었다. 난설헌이 시를 지을 때에는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마치 이 세상 여인이 아닌 것 같았다’고 <허부인 난설헌집 부 경란집>이라는 책은 전한다. 또 일제강점기에 이능화가 쓴 <조선여속고>에는 ‘그녀는 늘 화관을 쓰고 향로나 향합을 놓는 상인 향안과 마주앉아 시를 지었다’”라고 말하면서 허난설헌은 어렸을 때부터 ”지상으로 귀양 온 여신선“과 같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복 오빠 허봉이 여동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여동생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좋은 시집이나 붓이 있으면 여동생에게 주며 응원했다.[출처2] 허봉은 서자 출신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달(1539~1612)에게 허난설헌과 남동생 허균이 시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583년 허봉이 함경남도 갑산군에 유배되었을 때 허난설헌은 <오라버니 하곡께>라는 시를 지어 "산과 물이 가로막혀 소식도 뜸하니 그지없는 이 시름을 풀 길이 없네요."라며 오빠를 그리워했다.[출처3]

다음은 임상원 (任相元, 1638~1697)의 저서 <교거쇄편>에서 묘사된 허난설헌과 남동생 허균이 어렸을 때 같이 시를 공부할 때 이야기이다.
허균은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일찍이 시를 써서 그 누님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라는 시구를 보고, 난설헌이 말하기를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 되었구나."하였다. 동생 균이 "어떤 어구가 잘못 되었는가?"라고 물으니, 난설헌이 곧 붓을 끌어 쓰며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채찍질 하면서 가버렸다."라고 고쳐주었다.
ㅡ 《교거쇄편》 제2권 [출처4]
이렇게 허난설헌은 오빠들이나 남동생과 매우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일가족은 뛰어난 문장에 비해 정치적 감각이나 실속이 없었으며,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3. 김성립과의 혼인

난설헌은 15세가 되던 해 구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하였다. 다음은 허미자 교수의 1984년 저서 <허난설헌연구>와 2007년 저서 <허난설헌>과 2006년 허경진 교수의 저서 <허난설헌의 생애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 인문학보 제31집>에 수록된 허난설헌과 김성립의 혼인과 관련된 민간 설화이다.
김성립과 약혼할 때에 난설헌은 부모님께 "소녀의 신랑은 소녀가 친히 보지 않고는 시집가지 못하겠습니다. 그 신랑을 우리 집으로 청해오면 소녀가 엿보아서 마음에 합당해야 시집가겠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그대로는 시집가지 않겠으니 소원을 이루어주십시오."라고 졸랐다 한다.

난설헌의 부친은 그 후에 삼십리쯤 떨어져있는 신랑의 집에 가서 간선을 하고 김성립의 부친과 한담을 하려는데 돌연 방문이 열리고 연죽을 든 상노 아이가 들어와서 섰는데 허엽이 눈을 들어보니 난설헌이 남장을 하고 부친 뒤를 쫓아서 몰래 신랑될 사람을 보고 부친보다 먼저 집에 당도하고 있었다 한다.
김성립과 허난설헌 민간 설화 [출처5]
다만 담배의 종류인 연죽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 시기 때 조선에 들어왔으므로 위 이야기는 허난설헌이 죽은 뒤에 만들어진 민간 설화이거나 허난설헌 생전 소문으로 퍼진 이야기에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4. 불행한 결혼생활

4.1. 남편과의 불화

4.1.1. 희박해진 부부간의 정

허균의 일방적인 서술을 감안해도,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남편 김성립과 금슬이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일단 조선의 후대 문인인 서유영(徐有英, 1801 ~ 1874)은 1873년 설화집 <금계필담>에서 김성립과 허난설헌의 부부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설헌 허씨는 초당 허엽의 딸이자 반역을 했던 허균의 누이이다. 허 씨는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웠으며 어릴 적부터 시를 잘지어 이름을 떨쳤다. 나이가 차서 한림 벼슬을 한 김성립에게 시집을 간 뒤로도 금슬 좋게 아주 성실하게 살았다.
<금계필담> 제5권 "천재 여류시인 허 씨"

다만 <금계필담>은 서유영이 다른 문헌을 참고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1873년(고종 10년) 시점 김성립과 허난설헌의 사이가 조선에서 어떻게 알려져 있었는지 알 수는 있지만 당시 김성립과 허난설헌의 실제 부부 관계를 아는데 도움이 되는 문헌은 아니다.

당대 문헌인 허균의 성소부부고와 김성립의 묘비명을 토대로 했을 때 허난설헌이 시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았고 두 자식을 잃는 과정에서 남편 김성립이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현숙하고 문장도 지녔으나,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고 또 두 자식까지 잃어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늘 생각하면 몹시 슬퍼하길 마지 아니하였는데... 누이를 애통해 하는 정이 애절하고 구슬프니 천 년이 지난 오늘 동기간의 슬픈 정이 이와 같이 서로 같았다.
성소부부고 제3권 훼벽사(毁璧辭) 병서(幷序) #
(허난설헌)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鶴山樵談) #

동시대의 인물인 이수광(李睟光, 1563 ~ 1629)이 쓴 김성립의 묘비명은 김성립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자기 물건 이외의 것으로 허식하는 것은 마음에 둔 바 없고, 항상 독서만 하면서 강가에 집을 지어 문을 개방하고 정신수양을 하였다.
김성립의 묘비명 [출처6]
미디어에서는 허난설헌을 포장하느라 김성립을 기생 끼고 외도를 일삼는 쓰레기로 묘사하는데 기록으로 추정 가능한 김성립의 성품은 지나칠 정도로 목석같은 사람에 가깝다. 허난설헌 평전을 쓴 저자 장정룡은 성소부부고와 김성립의 묘비명을 토대로 아내 허난설헌이 두 자식을 잃었을 때 "남편 김성립이 과거준비를 위해 강가에 집을 따로 지어서 생활하였고, 그로 인해 아내를 멀리하게 되어서 부부간의 정이 희박해졌다"고 설명한다.[출처7]

4.1.2. 김성립의 성품 관련 논란

김성립이 기생 끼고 외도를 일삼는 쓰레기로 묘사된 이유는 아래 두가지 기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1566 ~ 1628)이 김성립과 같이 강가의 집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할때를 회상한 기록이다.
내가 젊었을 때, 김성립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같이 했다. 한 친구가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냈다. 계집종이 이를 듣고는 난설헌에게 몰래 일러바쳤다. 난설헌이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고 커다란 흰병에다가 술을 담아서, 병 위에다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다.

낭군께서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한다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동국시화휘성> [출처8]
다음은 임상원 (任相元, 1638~1697)의 저서 <교거쇄편>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자기 남편 김성립이 서당에 독서하러 가면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고 글자를 헐어서 질투를 하며 꾸짖는 말을 했다.
ㅡ 《교거쇄편》 제1권 [출처9]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허미자[11]는 위 두 기록을 토대로 저서 <허난설헌>에서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아내 난설헌을 내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과거 공부를 했으며...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고 기생집만 즐겨 찾았다. 결혼하고도 10년 이상이나 과거에 급제하지를 못했다."라고 해석했다. [출처10]

다만 이런 해석은 허미자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 우선 신흠은 김성립이 기생집에 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헛소문이라고 일축하고 있으며 교거쇄편에서 '오늘의 접은 재주가 없다'는 말은 접(接)이라는 말이 옛날에는 '글방(-房) 학생(學生)들이나 과거(科擧)에 응(應)하는 유생(儒生)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허난설헌이 남편과 같이 공부하는 무리들이 재주가 없다고 오히려 조롱하는 글이다. 애초에 김성립이 응시했던 과거 시험은 기생집이나 다니면서 최종합격단계인 전시에 붙을 정도로 만만한 시험이 아니었다.

4.1.3. 허난설헌의 재주와 외모

김성립의 성품과는 별개로 아내 허난설헌에 비해서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아래는 김성립에 대해 서술한 기록이다.
난공 : 귀국의 경번당(景樊堂)은 허봉(許篈)의 누이동생으로 시에 능해서 그 이름이 중국의 시선(詩選)에 실렸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이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 人間願別金誠立
저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 地下長從杜牧之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난공 : 아름다운 부인이 못난 남편과 부부가 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ㅡ 《을병연행록》 일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
1765년 담헌 홍대용이 청나라의 선비 난공 반정균과 나눈 대화이다. 허균 외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김성립이 허난설헌에 비해서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다고 알려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위 두목지가 언급된 시는 후대 사람들이 지어서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퍼뜨린 것이며 허난설헌에 대한 모욕이라는 견해가 있다.[출처11]

다음은 허난설헌의 재주에 대한 일화이다.
남편의 친구 가운데 송도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으로 찾아와 김성립을 부를 때마다 이렇게 놀려먹었다.
“멍성립이 덕성립이 김성립이 있느냐?”
그럴 때마다 주변머리 없는 남편은 말대꾸도 제대로 못한 채 뒤통수만 긁으며 좇아나가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난설헌이 요 다음에 찾아와 또다시 그렇게 부르면 이러이러하게 응수하라고 일러주었다. 마침내 송도남이 다시 찾아와서 그런 식으로 놀려대자 김성립이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대꾸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오, 귀뚜라미 맨드라미 송도남이 왔느냐?”
그러자 송도남은 한바탕 웃어대더니, “자네 재주 같지는 않고, 부인에게 한 수 배운 모양이로군!” 했다.
ㅡ 허난설헌과 김성립의 일화 [출처12]
위 일화에 의하면 허난설헌이 남편 김성립보다 재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1.4. 김성립의 과거급제

세상에 문리(文理)는 부족하면서도 글은 잘짓는 이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金誠立)은 경ㆍ사(經史)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문(科文)은 요점(要點)을 정확히 맞추어서 논ㆍ책(論策)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책문을 지을 때에는 편 끝부터 거꾸로 지어 올라가되 맨 처음 끝 부분을 짓고 그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고 다음 축조(逐條), 다음 중두(中頭)를 짓고, 시지(試紙)에 옮겨 쓸 무렵에 모두(冒頭)를 짓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니 이것은 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ㅡ 《성소부부고》 제 24권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
위의 성옹지소록을 토대로 허균 평전을 쓴 허경진 교수는 김성립이 "경전과 역사를 읽으라고 해보면 혀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인물로 해석했다.[출처13] 이는 김성립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김성립 본인의 학습 유형이 암기력은 그렇게 특출나지 않았지만, 글을 짓는 감각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단련시켜서 높은 수준에 오른 유형이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를 계속해야만 양반 지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3대 이상 낙방이 계속되면 양반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한두대 걸러서 급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4대가 연속으로 급제를 한 집안도 많지 않은데 김성립의 집안은 무려 6대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던 엘리트 집안이었다.[16] 김성립도 가문의 영예를 잇기 위해 대를 이어 공부를 했으나 특출난 신동은 아니라서 허난설헌이 죽기 전까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허난설헌 생전에는 생원시만 합격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립 문서 참조.

그렇다고 김성립이 둔재였거나 과거급제가 심하게 늦은건 아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평균 연령은 소과, 대과 모두 다 합격기준으로 30대 초반이다. 28세에 병과(정9품) 급제한 김성립은 평균보다 조금 더 빨리 합격한 것으로 결코 모자랐다고는 할 수 없다. 허균은 자형인 김성립에 대해 "누나보다 못나고 공부만 할 뿐 실제로는 경전이나 역사도 제대로 모른다"고 악평했지만 이렇게 말한 본인은 17세에 초시 합격, 21세에 급제하고 우참찬(정2품)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던 천재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보니 눈에 차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4.2. 가족을 여의다

결혼 생활이 원만치 못한 가운데 허난설헌의 가족들에게 연속적으로 불행이 닥치는데, 아버지 허엽이 1580년 죽었으며, 자식으로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둘 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딸이 죽은 1579년에서 2년 후인 1582년에 아들 김희윤이 죽었고 하필이면 그 때 임신한 상태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배 속의 아기마저 유산했다. 허난설헌이 두 아이를 잃은 설움에 쓴 인 <곡자>의 링크.

허경진이 옮긴 허난설헌 시집에 의하면 장녀 김씨와 김희윤이 죽었을 때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 뒷동산의 안동 김씨 선영에 무덤을 썼으며, 딸과 아들의 무덤 앞 산기슭인 모랏골에 거처를 옮겨서 살았다 한다. 모랏골이 김성립의 친가가 있는 한성부는 아니므로 김성립이 과거 시험 공부를 하려고 강가에 집을 지어서 지내고 있을 때 따로 살 곳을 마련한 것, 즉 별거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자식이 죽고 나서 부부가 별거를 시작한 것을 보면 두 자식 사후 김성립과 허난설헌의 부부 관계가 사실상 파탄난 것은 확실하다.

아기 외삼촌인 허봉 무덤 앞 글을 하나 새겼는데 글에 남자 아이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였다고 나와 있다. 글은 김희윤 문서 참고. 둘째오빠 허봉마저 대학자 이이 탄핵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귀양을 갔고 풀려난지 얼마 안 된 1588년에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최후

1580년 아버지가 경상감사의 관직에서 해임되어 돌아오던 중 상주에서 객사한 이후로 8년만에 자식 2명과 자신을 가장 아꼈던 오빠 허봉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슬픔은 극에 달했으며, 결국 허난설헌은 시집살이 스트레스에 친가에 닥친 불행과 자식들까지 요절한 충격으로 병을 앓다가 1589년, 본인도 27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조선이라는 소천지(小天地)에 더구나 여성으로서 태어난 것과 그 중에도 가장 박색인 김성립의 처가 된 것을 평생의 삼한으로 생각하며 더욱 김성립의 원유로 인하야 금슬이 화해치 못함을 슬피여겨 원사의 작이 많으며... 그가 중국에 나지 못한 것은 고려 문종이 꿈속에 중국에 가서 놀던 일례와 임진란에 모하당 김충선이 조선에 거하기를 구한 일례와도 같이 외국 사모의 열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김태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 조선어문학회, 1931, 106쪽[출처14]
생전에 '소천지(小天地; 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인터넷에 퍼져 있는데 허난설헌 본인이 말한 것이 아니라 1931년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에서 저자 천태산인 김태준이 허난설헌의 인생이 평생의 삼한, 세 가지 한스러움이라고 평하면서 언급한 것이다.
"부인의 성은 허씨요, 스스로 난설헌이라 불렀다. 균의 셋째 누이로 저작랑 김성립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매우 많은 글을 지었지만, 유언에 따라 불태워 버렸다.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으나 모두 동생 균이 베껴서 적어 놓은 것에서 나왔다. 그것이 오래되었고 더구나 망실되거나 화재를 입을까 걱정이 되어, 이에 나무에 새겨 널리 전하는 바이다. 만력 기원 36년(1608년) 맹하(4월) 상완(상순) 동생 허균 단보가 피향당에서 쓰다."
ㅡ 1608년 허균이 쓴 《 난설헌집》 평 [출처15]
유언으로 "내가 쓴 문집을 전부 불태워서 없애다오"는 말을 남겼는데, 남동생 허균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누나의 시를 모아서 으로 발간해 세상에 공개했다.[19][20]

1608년 허균이 직접 쓴 < 난설헌집>의 평에 의하면 누나 허난설헌이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매우 많은 글을 지었지만, (누나의) 유언에 따라 불태워 버렸다.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으나 모두 동생 균이 베껴서 적어 놓은 것에서 나왔다. 그것이 오래되었고 더구나 망실되거나 화재를 입을까 걱정이 되어, 이에 나무에 새겨 널리 전하는 바이다."라고 한다.

5.1. 허난설헌 자살설

허난설헌 사후 허난설헌의 최후에 대해 다른 기록이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의 무신 구수훈(具樹勳, 1685 - 1757)은 저서 <이순록(二旬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설헌이 일찍이 월황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부용일타 삼구상타홍"이라 하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삼구의 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이 시는 문집에 들어있다.
구수훈, <이순록(二旬錄)> 하, 권9. 18세기[출처16]

노회찬의 1997년 저서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에서 허난설헌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허난설헌은 국제적 베스트 셀러 작가, 1563년 신사임당의 고향 강릉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두 오빠, 그리고 동생들이 모두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였던 것처럼, 허난설헌도 어려서부터 어깨 너머로 배운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자랐다. 15살 때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결혼한 허난설헌은 27살이던 1589년 강물에 몸을 던져 한과 고뇌로 가득한 젊음을 마감했다.
노회찬,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 일빛, 1997년, 33쪽[출처17]

즉 구수훈과 노회찬의 기록을 참고하면 허난설헌이 병에 걸려서 요절한 것이 아니라 자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난설헌 평전을 쓴 장정룡이 저자 노회찬과 직접 전화했을 때 노회찬 작가는 허난설헌의 자살에 대한 1차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고, 문중 비문 등 2차 자료를 통해 추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허난설헌이 자살했다는 1차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장정룡은 허난설헌이 자살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추정하면서 이에 다른 견해를 제시한 차옥덕 교수의 견해를 저서 허난설헌 평전에 실었다.
난설헌의 죽음과 관련하여서 생각해 볼 때 난설헌은 아무런 병이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물론 신체적인 외부적 면에서만 언급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의 예언과 직관에 의해 이미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점으로 유추해 볼 때 극도의 정신적 긴장과 고통과 갈등에 의해 소위 정신적 스트레스의 양에 의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적중된 것으로 보인다.
차옥덕, <허난설헌작품에 나타난 페미니스트 의식연구>, 이화여대대학원 여성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6년, 108쪽[출처18]

6. 사후

1598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그 후 1606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허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으며 200년 뒤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수많은 여인들의 눈물을 앗아갔다. 이후 남동생 허균마저 이이첨의 장기말 노릇을 하다 버려져 오체분시당했는데 조선에서는 허균의 역모 때문에 애꿎은 허난설헌의 시집도 불태워졌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동래로 역수입되는 얄궂은 상황이었다. 중국과 일본 찍고 조선에서 다시 출판된 것이 1692년으로 허난설헌이 죽은지 103년이나 지난 이후이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허균이나 허난설헌을 키워낸 친정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엄격한 시가와의 갈등, 허난설헌의 도교적인 취향[24] 등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시어머니와의 불화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후인들은 추측한다. 김성립은 28살 때 아내 허난설헌이 죽은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해서 홍문관 저작(정9품)을 역임했다. 이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는데, 임진왜란 의병으로 나서 싸우다 1592년 사망하였다. 김성립 무덤의 비석[25] 철종 때 7세손 김수돈이 세운 것으로 비문을 부탁받아서 써준 사람이 허씨 집안의 후손 허전(1797~1886)이다.


[1] 는 아버지인 허엽이 지어주었고, 는 자신이 직접 지었다. [2] 허균이 『학산초담(鶴山樵談)』 등에서 직접 기록한 많은 일화와 다르게 중국을 통해 역 수입된 기록이다. [출처2]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 58쪽 [출처3] 허경진 옮김, 허난설헌 시집 34쪽 [출처4]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85쪽 [출처5]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3쪽 (2007) [출처6]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06쪽, 107쪽 [출처7]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07쪽 [출처8]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07쪽, 308쪽 [출처9]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08쪽 [11] 1931년 출생했으며 2022년 시점 정년 퇴임했다. [출처10]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07쪽, 308쪽 [출처11] 허경진, 허균 평전 65쪽~66쪽 [출처12] 황원갑 지음, 한국사여걸열전 우리 민족사를 울린 불멸의 여인들 525쪽, 526쪽 [출처13] 허경진, 허균 평전 62쪽 [16] 이 정도면 가히 명문가라 칭할만한데 대표적으로 이발의 경우 본인부터 9대조까지 모두 과거에 급제한 가문이었는데 이 호남 제일의 명문가였다. [출처14]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10쪽 [출처15]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55쪽 [19] 일설에는 모두 태워버렸는데 허균이 발군의 기억력으로 누나의 시들을 거의 외우고 있어서 자신이 외운걸 책으로 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불태울 때 허균이 급히 이를 말리고 시 한 질을 겨우 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위 허균의 말을 토대로 했을 때 "누나의 작품 중 일부를 베껴서 적어 놓았고, 나무에 새겼다"는 것은 확실하다. [20] 정확히 허난설헌이 어떻게 유언을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생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이)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매우 많은 글을 지었지만, 유언에 따라 불태워 버렸다."이라고 말했을 뿐, 유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균의 말을 기반으로 유언의 내용이 "평생을 저술한 글을 불태우라고 말했다"는 것이라는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출처16]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17쪽 [출처17]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18쪽 [출처18]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19쪽 [24] 당대 조선 선비들 중에서도 도교에 심취한 이들은 많았다. 다만 대놓고 도교적 삶을 보란듯이 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대체로 입신양명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도교에 관심을 많이 두다 보니 '사대부가 좇을 바가 아니다'에 가까운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많은 선비들은 본인 문집에 도교적인 글을 쓰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도교 취향을 향유하는 정도의 소소한 취미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25] 정확히는 동시대 인물 이수광이 쓴 묘비명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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