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c002d><colcolor=#fff> 핼리팩스 폭발 사고 Halifax Explo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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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발에 휘말린 도시 일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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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1917년 12월 6일 오전 9시경 | |
발생 장소 | ||
핼리팩스 (
캐나다 자치령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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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폭발 | |
원인 | 선박 충돌로 인한 화재 및 유폭 | |
인명 피해 | <colbgcolor=#bc002d,#11102d><colcolor=#FFF> 사망 |
1,782명 (공식 확인) 약 2,000명 (비공식 추산) |
부상 | 약 9,000명 (비공식 추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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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핼리팩스 폭발 사고(Halifax Explosion)는 1917년 12월 6일 아침 캐나다 자치령 핼리팩스에서 프랑스 화물선 SS 몽블랑 호(SS Mont-Blanc)가 노르웨이 국적 화물선 SS 이모 호(SS Imo)와 충돌하며 발생한 화재로 인한 폭발 사고이다. 폭발의 규모가 매우 컸고 폭심지가 만으로 연결되는 도시 중심부의 더 내로우스(The Narrows) 해협에 위치한 항구였기 때문에 약 2천 명의 사망자와 9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해일이 발생하여 항구가 완파되었고 충격파는 멀리 떨어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에서도 관측되었다.이 사고는 인류 역사상 자연재해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한 폭발 사고로 기록되었으며,[1] 동시에 단일 사고로서 핼리팩스는 물론 캐나다와 북미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고이기도 하다.[2]
2. 전개
당초 선박 충돌 사건은 이모 호의 과실에 의해 발생났다. 이모 호는 선체가 길어서 선회가 잘 되지 않는 배였는데, 당시 선장과 항해사들은 과속으로 좁은 해협을 항행하였고, 이 때문에 돌파 과정에서 2척의 다른 배를 피해야 했다. 또 좁은 해협에서 원칙으로 선박은 우측통행이나 역주행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모 호는 역주행으로 과속하던 중 반대측에서 접근하는 몽블랑 호와 마주쳤다. 몽블랑 호에서는 곧바로 경적을 울렸으나, 이모 호는 "못 비켜 준다"는 대답으로 경적 2번을 울리면서 이를 무시했다. 대량의 폭발물을 실은 몽블랑 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우향전타를 시도했지만, 정면에서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이모 호를 피하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어떻게라도 회피하려고 선수를 좌측으로 꺾으려 했지만, 이모 호가 몽블랑 호 우측을 들이받았다.
충돌은 아침 8시 45분에 일어났으며, 반파되어 가라앉은 이모 호와 달리 몽블랑 호는 피해가 크지 않아 헬리팩스 항구에 접안을 시도했다. 충돌 여파로 바로 밑에 불이 났다는 걸 알아차린 건 10분 이상이 지난 다음이었다. 불이 조금씩 타고 있었고 이들도 충돌 사고 여파로 이거 보고해야 하네 뭐네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었던 것. 선원들도 불이 커지면서 연기와 냄새를 보고 비로소 알아차렸다.
당시 몽블랑 호에는 군사용으로 조달한 2,146톤의 피크르산, 227톤의 TNT, 56톤의 니트로셀룰로오스, 223톤의 벤젠이 적재되어 있었다. 모두 폭약과 인화성 물질이었다. 이에 아미에 르 데릭 선장은 경악하면서 빨리 불을 끄라고 지시했으나 불은 급속도로 빠르게 번졌고, 선장과 1등항해사도 물을 퍼서 날랐지만 역부족이었다. 9시가 되자 배에서 연기가 치솟았고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오고 화재 경보가 울렸다.
누가 봐도 진화할 수 없을 상황이라 르 데릭 선장은 결국 선외 대피를 명령했다. 선원들은 하선하면서 "화물이 화약인데 불이 붙었어요!", "어서 피해요! 위험해요, 폭발이 일어납니다!"라고 프랑스어로 다급하게 외쳤는데, 한때 프랑스령이었고 프랑스계가 많이 사는 동부 지역이었으므로 이를 이해하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으나,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배에 불난 것을 구경하고자 모여드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이미 항구에서 몇 천명이 몰려와서 구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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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약 20초 뒤 폭심지로부터 남동쪽으로 13마일(20km) 떨어진 지역에서 촬영된 사진. |
그러던 9시 4분경, 내부 적재된 화약이 동시에 유폭하며 당시까지 인류가 관측하지 못했던 크기의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그 위력은 TNT 2.9킬로톤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폭발이다.[3] 이 사고로 약 2000여 명의 사망자와 9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핼리팩스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SS 이모의 탑승자는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폭발음은 321km 떨어진 지역에서도 들렸다. 하필이면 사고 이후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고 기온이 내려가고 폭설이 내려 피해가 더 커졌다.
3. 피해와 영향
당시 핼리팩스의 총인구는 약 65,000명이었는데, 이 사고로 1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하루 아침에 도시 인구의 15% 손실이 일어난 것이었으며, 도시 기능은 곧바로 마비되었다. 인구 밀집 지역의 모든 주택, 상가는 잿더미가 되었고 수도, 가스, 전력을 포함한 사회 기반 시설이 단절되었으며, 교통 수단이 파괴되어 환자를 이송할 수 없었고 병동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철도가 복구될 때까지는 구호 물품이 재난 현장에 전달될 수 없었다.또 핼리팩스는 캐나다 해군의 전신인 영국 해군의 모항으로서 성장한 도시로, 해군 기지와 대학 등이 항구 주변에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폭발로 이들 기지도 피해를 입으며 당시 교육중이던 생도들이 단체로 불구가 될 정도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러한 수준의 피해는 세계대전 전면전 중 벌어진 폭격기 공습 때에나 찾아볼 수 있는 피해였다.
심지어 항구에 들어온 다른 화물선에는 하필이면 창문용 유리를 가득 싣고 있었던 것도 있었는데, 이 배들도 폭발에 휘말렸다. 후폭풍에 의해 깨지면서 작은 유리파편이 후폭풍과 함께 마구 흩어져 화재를 구경하고자 몰려든 사람들을 강타하였다. 이때문에 눈에 맞아 실명하거나 온 몸에 유리파편을 맞아 부상당한 사람도 가득했다.
13년 먼저 터진 몽펠레 화산폭발 같은 대폭발 자연재해로 모두 3만여명이 다 죽고 겨우 23명만 살아남는 참사(2, 3차 폭발 피해 사상자 제외만으로도 이 정도)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연재해이고, 인재로 생각하자면 당시 인재로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만큼 당시 캐나다에 끔찍한 대재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 때문에 당시 주 당국과 사회적 여론은 조사의 방향을 '사고'가 아닌 '이것은 독일군의 파괴 공작이 틀림없다' 라는 의심을 하고 패닉에 빠져서 당시 지역에 거주중이던 독일계 캐나다인 생존자들을 체포하여 감금하기까지 이르는데, 단기적인 해프닝이긴 하나 마치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에서 벌어진 행정명령 9066호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나중에 이들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보상이 이뤄지기도 했다.
폭발을 일으킨 몽블랑 호 선장과 승무원들도 다쳤지만 죽은 사람은 딱 1명이었다. 어이 없게도 피해자인 이들은 큰 사회적 규탄을 받았으며, 나중에 재판을 받았으나, 처벌받을 잘못은 없었기에 무죄로 풀려났다. 여하튼 얼마나 폭발과 피해가 컸는지 무려 2년이 지난 1919년에도 파편 청소를 끝내지 못했으며 곳곳에 남은 파편을 정리할 때 2년이나 지났으니 이젠 썩어서 뼈만 남은 사망자 시체가 나왔을 정도였다.
아직까지도 캐나다는 역사상 핼리팩스 폭발사고보다 더 강력한 폭발 사고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한편 당시 아버지 국가였던 영국의 왕립해군과 미국의 미 해군 등 양대 동맹국들은 이 사건 직후에 현지와 가까운 함정들을 급파하여 캐나다의 핼리팩스 시 구호를 적극 보조하는 등 같은 영미권 문명의 국가들 간 끈끈한 의리를 보여준 일화가 있다. #
4. 여담
2020년 8월 4일 발생한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는 선박 충돌로 인한 사고는 아니었으나, 항구에 적재된 폭발물의 유폭으로 인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이것이 도시 전체의 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점에서 백 년 전의 핼리팩스 폭발 사고와 비교되었다.[4] 베이루트의 폭발은 TNT 1.1킬로톤 내외로 핼리팩스 폭발과 비교해 1/3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캐나다 트위터에서는 'Halifax'가 실시간 트렌드로 떠오르는 등 이슈가 되었고, 노바스코샤 지역 언론에서도 이를 보도하며 구호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4.1. 유사 사례
[1]
전시 폭격 등을 제외하고 핼리팩스 폭발 사고보다 더 큰 인명 피해를 낸 것이 확인된 폭발 사고는 없다. 1769년 이탈리아 브레시아 지역의 화약고에 번개가 쳐서 6천 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1626년 5월 30일, 명나라 시기의 베이징에서 대폭발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것이 단일한 하나의 폭발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2]
사건으로까지 범위를 확대한다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에서
아메리칸 항공 11편 테러 사건과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테러 사건으로 각각 제1, 제2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2,600여명의 사망자가 북미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기록하였다.
[3]
N1로켓 폭발이 6kt으로 최대라는 주장이 있으나 다른 자료에서는 최대 0.3~1kt 정도로 보는 자료가 있어서 무엇이 사실인지 정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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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만 여파는 베이루트가 더 심하다. 핼리팩스의 경우 캐나다 내에서 13위, 대서양 연안에서는 최대도시라는 위상과 캐나다 해군 거점이라는 매우 중요한 위상이 있지만 베이루트는 레바논의 수도이다. 한국으로 치면 핼리팩스 사건은 평택이 날아간 것으로, 베이루트 사건은 서울이 날아간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당연히 여파 또한 큰 차이가 있어서 베이루트가 날아간 후 레바논은 원래부터 있던 정치적 불안에 더해서 경제위기까지 같이 찾아왔다. 아예 프랑스에게 다시 레바논을 지배해 달라는 요구까지 나왔을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