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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54:10

허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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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성명 허쯔전(賀子珍,하자진)
아명 허구이위안(賀桂園,하계원)
한국식 독음 하자진
영문 He Zizhen
출생 1909년 9월 20일 청나라 장시성 지안부 융신현 원산구역 황주 촌락
사망 1984년 4월 19일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1. 개요2. 생애
2.1. 공산군의 여전사, 마오쩌둥의 부인이 되다2.2. 남편에게 배신당하다2.3. 이혼 후의 삶
3. 참고 문헌

1. 개요

마오쩌둥의 3번째 부인이자 정치가.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중국공산당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을 맡았다. 1928년에 마오쩌둥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낳았으나 마오쩌둥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부부갈등이 깊어진 끝에 1939년 이혼했다. 이후 오랜 세월 소련 모스크바에 지내다가 뒤늦게 마오쩌둥과 화해했다.

2. 생애

2.1. 공산군의 여전사, 마오쩌둥의 부인이 되다

허쯔전은 1909년 9월 28일 장시성 지안부 정강산 산록의 융신현의 평범한 농부 가족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녀가 태어난 시기가 계수나무 꽃이 피어오르는 가을인 점을 감안해 그녀의 이름을 '구이위안(桂圓)'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핀란드 여성 선교사가 운영하던 용신 여학교에 입학한 뒤 이름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아낀다는 뜻의 '쯔전(自珍)’으로 바꿨다가 다시 '쯔전(子珍)'으로 고쳤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해 오빠 허민쉐(贺敏学), 여동생 허이(贺怡)와 함께 '용신삼현(永新三賀)'으로 불렸다고 한다.

허쯔전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했고 16살 때인 1925년에 중국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한 후 이듬해에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녀는 당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해 현의 당무를 봤고 부녀부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위안원차이가 이끄는 농민자위군에 가입해 융신폭동을 일으켜 성공시키기도 했다. 얼마 후 후난성과 장시성의 국민혁명군이 연합해 융신을 공격해왔을 때, 허쯔전은 적위대를 이끌고 융신현 남문성에서 적 1개 특무대대를 격파해 100여 정의 총을 노획했다. 그러나 전력차를 극복할 수 없게 되면서 위안원차이 등 폭동 부대가 정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녀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던 1927년 10월, 후난성에서 추수폭동을 일으켰으나 국민혁명군에게 패배한 마오쩌둥이 패잔병들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피신했다. 마오쩌둥은 위안원차이(원문재), 왕줘(왕좌)의 녹림당과 무장투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산채로 올라가다가 위안원차이의 소개를 통해 허쯔전과 대면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젊은 처녀가 정강산에서 간부를 맡고있다는 것에 크게 놀라 "난 당신(위안원차이)의 딸이거나 어느 동지의 가족인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허쯔전은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정강산 투쟁에서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1928년에 후난성과 장시성 국경지대 특별위원회에서 선전 활동을 벌였고 제4대 군대 특별위원회의 선전 활동도 병행했다. 또한 마오쩌둥이 토지개혁안을 만들기 위해 융신현의 여러 촌락을 돌아다니며 현지 상황을 점검할 때, 허쯔전은 그를 따라가면서 의견을 제시하고 실무를 도맡는 등 여러 도움을 줬다. 그렇게 마오쩌둥과 가까이 지내는 동안, 그녀는 점차 마오쩌둥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탕비엔 촌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공산군은 지주 보안대의 습격을 받았다. 총소리가 산림의 정적을 깨트리고 사방에서 "마오쩌둥을 잡아 장제스에게 상을 받자!"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마오쩌둥과 허쯔전은 토지조사 자료를 분석하고 있던 중이었고 부근에 주둔해 있던 공산군 중대와 마오쩌둥의 경호원들은 군중들의 작업을 지휘하기 위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해지자, 허쯔전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마오쩌둥만 쳐다봤다고 한다. 이때 마오쩌둥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는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한 뒤 주민들에게 연락해 빨리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지주 보안대는 마을에 쳐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없자 한바탕 약탈한 뒤 돌아갔고 마오쩌둥과 허쯔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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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직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마오쩌둥과 허쯔전

이 사건 후, 허쯔전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마오쩌둥의 담대한 모습에 완전히 반해버렸고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진전되었다. 마오쩌둥은 그녀가 날씬한 몸매에 청초하고 아름다운 얼굴, 큰 눈망울을 가졌다며 '일지화(一枝花)'라는 별명을 붙였다.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 역시 허쯔전에게 반했지만 허쯔전은 오로지 마오쩌둥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해 마오쩌둥은 마침내 허쯔전과 결혼했다. 사실 마오쩌둥에게는 아내 양카이후이가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결혼했다. 이때 마오쩌둥의 나이 34세였고 허쯔전은 18세였다.

2.2. 남편에게 배신당하다

허쯔전은 결혼 후 중국 공산당 특별위원회 비서관을 역임했다. 그녀는 마오쩌둥의 손발이 되어 정강산에서 구하기 힘든 신문들을 스크랩하고 마오쩌둥이 글을 쓰거나 서류를 작성할 때 필요로 하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을 도맡아했다. 또한 그녀는 서류가방을 직접 만들어 마오쩌둥에게 선물했고, 마오쩌둥은 이 서류가방을 행군하거나 작전을 수행할 때 항상 어깨에 메고 다녔다. 1931년 마오쩌둥이 깐난회의에서 잘못된 노선을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고 소비에트 중앙국 대리 서기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닝뚜 회의에서 홍1방면군 총정치위원 직을 해직당하는 등 일련의 굴욕을 맛보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자, 허쯔전은 아이를 막 낳아 허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심기일전을 할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

1934년 10월, 징강산의 공산군은 국민혁명군의 공세를 피해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때 그녀도 남편을 함께 갔지만 아기 마오마오(毛毛)를 데리고 갈 수 없어 어느 촌락에 맡겼고, 그 아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대장정 중에 아이를 낳았으나 역시 현지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35년 4월 23일 구이저우를 지나던 도중 적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으로 인해 머리, 가슴, 팔 등 17곳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잠시 기절했던 허쯔전은 그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상당해서 죄송합니다. 부디 지도자껜 이 사실을 바로 알리지 말아주세요. 그 분은 최전선에서 매우 바쁘시니 그분을 힘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저를 근처의 이웃에게 넘겨주세요. 그리고 미래에 승리를 쟁취해주세요....."

하지만 마오쩌둥의 소중한 부인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던 동지들은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고 대장정 끝까지 그녀를 데리고 갔다. 허쯔전은 이 부상으로 평생동안 고통받았으며 1950년에 장애인 3급으로 공식 인정받았으나 연금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자신을 이토록 보필하고 가정을 돌보며 치명적인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투쟁하는 부인을 철저하게 기만했다. 그는 1936년 옌안에 도착해 대장정을 마무리한 뒤 여러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결국 1937년 초여름, 일은 터지고 말았다. 허쯔전이 마오쩌둥과 불륜 상대가 성관계를 가지던 현장을 덮친 것이다. 당시 엔안에서 마오쩌둥을 취재하고 있던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초여름,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었다. 릴리 우(우광웨이, 스메들리의 통역 겸 비서)의 동굴 방에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었는데, 마오가 그쪽 문을 두드렸다. 조금 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릴리 우의 방문을 확 열였고,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야,이 개자식아! 네가 어떻게 나를 속이고 몰래 저 소자산 계급의 댄스홀 기녀 집으로 기어들 수 있어!"
허쯔전이었다. 나는 코트를 대충 걸쳐 입고 릴리 우의 방으로 달려갔다. 마오의 부인이 악을 쓰면서 옆에 앉아 있는 마오쩌둥을 긴 손전등으로 마구 때리고 있었다. 맞고 있던 마오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쯔전, 그만하시오! 공산주의자로서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오."
허쯔전은 릴리 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춤이나 추는 창녀! 감히 너따위가 어떻게 우리 주석에게 더러운 술수를 부릴 수 있어?"
허쯔전이 릴리 우를 구타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다니는 동안, 그녀는 내 쪽으로 숨었다.

그 후 허쯔전은 마오쩌둥과 통역 비서간의 불륜 문제에 대해 당이 조사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공산당은 '사적인 일로 주석을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허쯔전의 이같은 행동에 분노한 마오쩌둥은 이후 그녀를 멀리하고 장칭과 대놓고 불륜을 벌였다. 일설에 따르면, 허쯔전은 식칼을 들고 마오쩌둥과 장칭을 향해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대장정 도중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병세가 깊어지면서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마오쩌둥과 이혼한 뒤 옌안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장칭이 마오쩌둥에게 허쯔전이 그를 떠나기를 원한 이유를 물었을 때,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그녀가 나를 떠났지. 그녀는 기질이 성마르고 작은 일을 가지고 종종 다퉜어. 한번은 외국에서 여성 기자가 나와 인터뷰했어. 그 미국인 여성은 개방적이었고 거리낌이 없었지.[1] 나도 그녀에게 농담을 몇개 던졌어.우리는 대화하면서 서로 웃었어. 이게 허쯔전을 화나게 만들었지.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만이 아니라 싸움을 벌이기 일쑤야. 나는 그녀에게 이 무식한 짓을 하지 말라고 비판했어. 그녀는 듣지 않았지.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시끄럽게 싸우곤 했어....."

결국 허쯔전은 1938년 옌안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6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는 10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허쯔전은 마오쩌둥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낳았으나 그중 셋을 잃었고 4남 마오안홍(毛岸紅(모안홍)1932년 ~ 1971년)과 장녀 양위에화(楊月花(양월화), 1929년 ~ 1973년), 3녀 리민(李敏(이민), 1936년 ~)만이 장성했다.

2.3. 이혼 후의 삶

허쯔전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모스크바 손중산대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여 1947년 대학원 정치학 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녀는 중국으로 귀국한 후 심양 재정 국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하얼빈에서 열린 전국 노동 총회에 참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절강성 여성 연맹 회장을 역인한 그녀는 10월에 중국 공산당 상하이 시정위원회 조직 부서의 업무를 맡았다.

1959년 여름에 허쯔전은 루샨에서 마오쩌둥과 마지막으로 만났다. 마오쩌둥은 허쯔전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게 하고 경비원을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힌다. 오랜만에 마오쩌둥과 둘이서 대면하게 된 허쯔전은 소리없이 울기 시작하고 마오쩌둥은 그런 허쯔전을 설득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마오쩌둥 : 우리가 다시 만났는데 당신은 말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군. 나중에 날 보지 못하게 되면 말했어야 했다고 후회할 지도 모르오. 당신, 여기 오고 몇 년이나 지난 거요? 몸은 괜찮소?
허쯔전 :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주석께서는 예전보다 건강이 나빠지신 것 같습니다.
마오쩌둥 : 이제 66세요. 많이 늙었지! 전보다 바쁘기도 하고!
앙금을 풀고 화해한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대화.

마오쩌둥은 허쯔전에게 소련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나갔고 허쯔전은 자신이 옌안에서 마오쩌둥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점을 사과하였다. 그렇게 마오쩌둥과 허쯔전은 서로를 향한 노여움을 풀고 화해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화해한 후로도 허쯔전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9년 6월에 제5차 중국인민정치협의회 제2차회의에서 중국인민정치협의회 전국위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5년을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상해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1984년 4월 19일에 사망하였다.

3. 참고 문헌


[1] 위에서 언급된 미국인 여성 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가리킨다. 그녀는 실제로 당시 공산당 치하의 마오쩌둥 휘하 세력 사람들에게 사교 댄스를 가르쳐주는 등 상당히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마오쩌둥과 바람을 핀 건 스메들리가 아니라 그녀의 통역관인 릴리 우(우광메이)였지만, 혁명정신이 투철한 공산주의 여전사였던 허쯔전은 스메들리도 싫어했고 공공연히 그녀가 문제의 씨앗이라고 주장하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