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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8:30:58

하야사카 큐베에

파일:천주교 대구대교구 로고.svg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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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안세화 플로리아노 주교
파일:프랑스 국기.svg
(1911~1938)
2대
문제만 제르마노 주교
파일:프랑스 국기.svg
(1938~1942)
3대
하야사카 큐베에 이레네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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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6)
4대
주재용 바오로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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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8)
5대
노기남 바오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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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6대
최덕홍 요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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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54)
7대
서정길 요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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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86)
8대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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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2007)
9대
최영수 요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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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9)
10대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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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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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3대 천주교 대구대교구
하야사카 큐베에 이레네오
[ruby(早坂,ruby=はやさか)][ruby(久兵衛,ruby=きゅうべい)] | Irenaeus Hayasaka Kyūbei
파일:하야사카 큐베에 주교.png
출생 1888년 12월 16일
일본 제국 미야기현 센다이시
사망 1946년 1월 7일 (향년 57세)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국적 일본국 파일:일본 국기.svg
주교 임명일 1942년 1월 센다이교구장 서리 임명
1942년 11월 10일 대구대목구장 임명, 주교승품
재임기간 센다이교구장 서리 1942년 1월~ 1942년 8월 30일
대구대교구장 1942년 10월 25일 ~ 1946년 1월 7일
파일:하야사카 큐베에 주교 문장.png
同心協力
(동심 협력) | (IN UNIONE CORDIUM)
[1]
파일:하야사카 주교 사진.jpg
<rowcolor=#FFFFFF> 하야사카 큐베에 주교 사진
파일:하야사카 주교 착좌식.jpg
<rowcolor=#FFFFFF> 하야사카 큐베에 주교 착좌식

1. 개요2. 약력3.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 일본의 가톨릭 성직자, 세례명 이레네오이다. 교구장 재임 기간은 1942년 12월 25일부터 1946년 1월 6일이다.

2. 약력

일본의 센다이교구에서 사목하다가, 1942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3대 교구장이 되었다. 해방 후 대구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대구시에 머물던 중 사망했다. 일본인 최초의 주교인 하야사카 큐노스케(早坂久之助) 야누아리오의 동생이기도 하다.

3. 생애

1888년 12월 16일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태어나 1898년 3월 센다이 모토테라고지 소학교를 졸업, 1902년 3월에 센다이시 히가시니반쵸 고등소학교를 졸업, 1907년 3월에 도호쿠 중학교 졸업. 1907년 9월 제2고등학교[2]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문과를 졸업했다.

1910년 11월 이탈리아 로마의 프로파간다 대학에 입학하여 1915년 5월 29일에 같은 대학에서 철학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 사제품을 받았다. 일본 귀국 후 1916년 6월에 미야기현 오오카와라 본당 주임 신부가 되고, 1923년 6월에 센다이시 모토테라고지 본당에 부임했다. 1927년 3월에 센다이시 츠노고로쵸 본당 주임, 1931년 9월에 이와테현 모리오카 본당 주임, 그리고 1940년 6월에 센다이시 타타미야쵸 본당 주임이 되었다. 1941년 12월에는 센다이 교구의 회계를 담당했다. 1942년 1월, 센다이 교구장 서리와 센다이시 타타미야쵸 본당 주임을 겸임했다.

1942년 8월 30일 조선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에 임명되어 동년 10월 8일 대구대교구에 부임했다. 같은 해 11월 10일 대구대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동년 12월 25일 주교품을 받았다. 하야사카 주교가 사제 생활 동안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조선의 대구 지역의 주교가 된 것은 순전히 일본 정부의 의도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의 책임자로 일본인 성직자가 임명된 것은, 조선 가톨릭교회를 일본 당국의 손아귀에 두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는 하야사카 개인의 입장에서도 기분 좋을 일은 아니었는데, 1942년 8월 30일 도쿄 주재 교황 대사 마렐라 대주교는 센다이교구 부교구장이었던 하야사카 신부에게 대구대목구의 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사실을 프랑스어로 쓰인 공문과 기밀 편지로 다음과 같이 통보하였다.
교황 성하께서 신부님을 대구대목구의 교구장 서리이며 사퇴하신 무세 주교님의 후임자로 임명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런 조치는 뜻밖의 일이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현재 한국이 처하고 있는 사정에 따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님은 이와 같이 위임된 사명을 피하고 싶은 생각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기보다 희생에 관한 것이며 저나 로마 성청이 그만큼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교황청의 긴급한 사정에 해당되므로 신부님께서 신앙과 희생의 정신으로 성청의 뜻에 따라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제 서품 때 약속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신부님의 사제 생활 경력을 보면 오랜 경륜을 쌓았고 로마에서 훌륭한 학업을 마쳐서 사회적으로나 교회 장상들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받아왔으므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직무에 적합한 분으로 예측하게 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면 즉시 정식으로 수락하신다는 뜻을 전문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제가 로마에 통보할 수 있겠습니다. 신부님이 현재 맡고 있는 직무를 생각하면 그 직무를 떠나기가 어렵다고 하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이 심각하므로 가능한 한 빨리 부임할 것을 요망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저는 오로지 저의 축복과 기도의 약속을 드립니다.

교황 대사 바오로 마렐라 대주교
-『대구대교구 100년사』


주교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하야사카 주교는 결핵성 늑막염에 걸렸다. 그는 어느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자기에 주어진 일을 제대로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전임자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무셰 주교에게 사제 서품식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도 되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끝끝내 하여 병을 악화시킨 일은 어떤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하야사카 주교의 부임으로 교구의 영향력이 약화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하야사카 주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한편 하야사카 주교는 정읍본당 주임으로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로 1930년대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군삼 베네딕토 신부[3]에 대하여 본당 재정의 장부 정리 미숙 등의 이유로 1943년 환속을 결정했다. 당시 교회법정의 기록이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4] 일본 당국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군삼 신부는 이후 강원도 정선군에 독신으로 은거하며 평신도 사도 활동을 하다 1982년 사망하였고, 말년에 대구대교구 소속 양로원과 대구가톨릭대학병원에 머무는 등 교구 차원의 배려는 받았지만 끝내 복권되지는 못하였다.

지병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주교는 1946년 1월 7일 대구 수도원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1] 주교 예모(禮帽) 좌우로 늘어뜨린 3층 수실과, 중앙의 十字와 방패형은 주교 문장의 공동 표시이다. 중앙의 十字와 방패형은 하느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뜻으로 9시편 118,113 ~ 120참조), 주교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하야사까 주교 문장의 방패형 안네 있는 산은 일본의 기개를 자랑하는 상징인 후지산이고, 그 밑의 물은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국토를 가르키며 빛나는 해는 중천에 뜬 해와 같이 찬란한 일본의 국의를 상징했다고 한다. [2] 이는 오늘날의 고등학교가 아니라 제국대학의 예과과정에 해당한다.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에게는 제국대학의 본과진학 또는 관립의과대학으로의 진학이 보장되었다. [3] 제77호 수품 신부, 최초의 제주도 출신 신부다. 이 시기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광주지목구는 전주지목구와 함께 대구대목구의 관리를 받는 지목구였기 때문에, 현대와 달리 사제들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비슷한 시기인 1941년에 전주지목구장을 사임한 김양홍 신부도 1942년 광주지목구로 이동하여 사목활동을 하다가 숨진 바 있다. [4] 2017년 해당 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한 제주교구에서 대구대교구의 당시 회의록을 열람한 바 있으나 제주교구 역시 내용을 공개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