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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3:41:15

프랑수아 세베르

프랑스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
파일:1971 US GP 1.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프랑수아 세베르
François Cevert
본명 알베르 프랑수아 세베르 골덴베르[1]
Albert François Cevert Goldenberg
출생 1944년 2월 25일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사망 1973년 10월 6일 (향년 29세)
미국 뉴욕 왓킨스 글렌 인터내셔널
신체 키 183 cm
소속 드라이버
(F1)
테크노 레이싱 팀(1969)
티렐 레이싱 (1970)
엘프 팀 티렐 (1971~1973)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eeeeee,#191919> 출전 횟수 48경기
월드 챔피언 0회
그랑프리 우승 1회
포디움 13회
폴 포지션 0회
패스티스트 랩 2회
첫 경기 1970년 네덜란드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71년 미국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1971년 미국 그랑프리
마지막 경기 1973년 미국 그랑프리 }}}

1. 개요2. 생애3. 사망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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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973 French GP 1.jpg

프랑스 출신의 전 레이싱 드라이버이다.

2. 생애

부유한 보석상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큰 키와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엄친아이다. 외모와 성격 덕에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어릴 때도 이런저런 스포츠를 즐기면서 놀기 좋아했고 공부 머리도 없던 건 아니었으나 어지간히 하기 싫어했던 모양(...). 다행히도 언어에는 소질이 있어서 국제 무대에서도 영어는 곧잘 했다. 어렸을 때는 별로 차를 모는 것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륜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어머니의 오토바이를 몰면서 놀았다고 한다. 이마저도 그냥 바이크 타면서 노는 수준이었고 전문적인 모터스포츠와는 거리가 멀었다.
왼쪽부터 샤를 세베르, 프랑수아 세베르, 자클린 세베르, 벨투아즈, 엘리 세베르
하지만 모터스포츠에 흥미가 생기는 큰 계기가 등장하는데, 프랑수아가 매우 가깝게 지내던 여동생 자클린의 남자친구가 다름아닌 장피에르 벨투아즈였기 때문이다.[2] 벨투아즈는 당시 모터사이클 레이서로 활동했고 1963년 사륜 레이싱으로 전향하여 훗날 훌륭한 F1 드라이버로 성장한다. 그렇게 프랑수아는 자연스럽게 모터스포츠에 빠져들었고, 16세의 나이에 모터사이클 레이스에 입문한다.

그러다 군 제대 후 벨투아즈처럼 관심을 자동차에 두기 시작해 1966년 21세의 나이로 사륜 모터스포츠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 그는 교육 프로그램 이수 중 '볼랑 [3]'에 참가하게 된다. 여기서 우승하면 부상으로 프랑스 포뮬러 3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 1966년 우승자는 세베르였다! 그렇게 그는 사륜차에 입문하자 마자 F3 프리패스권을 얻게 되었고, 이후 F3에서 쭉 활동하다 1968년 포뮬러 3마저도 우승하게 된다.
파일:cevertf3.jpg
파일:cevert69f2.jpg
1969년 F2 시절의 세베르 랭스-괴에서 재키 스튜어트 등을 누르고 우승한 세베르
그렇게 그는 1969년 테크노 레이싱 팀의 눈에 들어 바로 유럽 포뮬러 2로 콜업되었고 여기서도 바로 챔피언십 시즌을 3위로 마감했으며, 단 한 번이지만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의 독일 그랑프리에도 F2 클래스로 참가하여 F1 차량들과 함께 달리기도 했고 랭스-괴에서 열렸던 논챔피언십 레이스에서도 재키 스튜어트, 요헨 린트, 재키 익스, 피어스 커리지, 난니 갈리 등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들을 상대로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사실 지금 포뮬러 2라고 하면 무조건적인 하위 리그이지만 당시에는 F2가 가지는 뉘앙스가 지금과는 아주 달랐는데, 일단 차량 성능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고 당시 F1은 경기의 개수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F1 드라이버들도 짬이 나면 F2에 참가하곤 했다.[4] 마트라[5] 소속의 1969 F1 월드 챔피언 재키 스튜어트 또한 그런 드라이버 중 하나였는데, 그는 F2 경기에서 세베르를 지켜본 후 팀의 수장이던 켄 티렐에게 알아 둘 만한 드라이버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마침 바로 이듬해인 1970년에 프랑스 마트라와 마트라 인터내셔널, 즉 영국 마트라 팀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마트라 소속이던 벨투아즈가 마트라 인터내셔널에서 프랑스 마트라로 넘어갔고, 마트라 인터내셔널이 티렐 레이싱으로 개편된 후 1970 시즌이 개막한 뒤 시즌 도중 다른 드라이버였던 조니 세르보개빈[6]도 은퇴하게 되어 메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기게 된다. 빈자리에 빠르게 투입할 만한 드라이버를 고민하던 켄 티렐은 스튜어트가 했던 충고를 단박에 기억해 냈고, 그렇게 세베르는 F1 출전권을 따내 시즌 5라운드 네덜란드 GP부터 투입된다. 즉 커리어를 시작하고 4년 만에 모터스포츠의 최정상까지 올라오게 된 셈...[7]
파일:tyrrellduo.jpg
세베르와 스튜어트
걸출한 실력에 알맞은 때에 알맞은 기회가 오는 굉장한 운이 따라 주며 F1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세베르는 챔피언십을 우승한 선배[8] 스튜어트를 팀메이트로 두고 F1의 세계를 빠르게 배워 나갔으며 세베르는 스튜어트를 스승으로, 스튜어트는 세베르를 제자로 대했다. 스튜어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고, 세베르도 빠르게 배워 나갔다.
파일:cevert71es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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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르는 처음에는 하위권에서 시작했으나 성장해 나가며 점차 순위를 올려 나가기 시작했고 포인트 피니시도 한 번 경험하게 된다. 과도기였던 1970년이 지나고 티렐이 티렐만의 차량을 만들기 시작하여 진정한 티렐 팀으로서 거듭난 1971년이 되어 안정기에 접어들자 포디움에 들기 시작했는데, 5라운드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차량이 크게 업그레이드되자 프랑스 GP와 독일 GP에서 2위에 입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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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이탈리아 그랑프리 1971 미국 GP에서 우승한 세베르
세베르가 처음으로 우승의 문턱까지 갔던 경기는 1971 이탈리아 그랑프리였는데, 이때 우승 후보들부터 예상되지 않았던 언더독들까지 모조리 합세해 격돌하였고, 세베르를 포함한 5명의 드라이버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열한 배틀을 지속하여 피니시 라인을 상위 3대가 나란히 통과했다. 세베르는 1위와 단 0.09초 차이로 3위로 피니시하였다. 이 경기는 F1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9][10]

특히 최종전 미국 그랑프리에서 페라리의 강적 재키 익스[11]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며 우승한 것은 그의 커리어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티렐의 굿이어가 가면 갈수록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페라리의 파이어스톤은 레이스가 후반부로 갈수록 페이스가 올라왔고 세베르를 턱밑에서 수 바퀴 동안 압박하다 갑자기 페라리의 차량이 오일을 흩뿌리며 자결하면서(...) 익스가 리타이어했다. 우승자는 세베르였고, 세베르는 두 팔을 들어올려 환호했다. 이 경기의 우승과 함께 그는 데뷔 2년 차에 챔피언십을 3위로 마감하는 가공할 만한 성과를 보여 줬다. 특히 스튜어트가 부진했을 때 우승과 포디움을 달성해 내면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또한 착실히 보조하였는데, 티렐은 1971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시즌에서 2위와 무려 2배가 넘는 포인트 차이로 챔피언이 되었다.

1972 시즌에는 칼을 갈고 온 로터스와 폼이 급상승한 맥라렌으로 인해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놓침은 물론 스튜어트도 챔피언을 하지 못했고, 특히 세베르는 2위를 2번 경험하긴 했으나 기복이 큰 모습을 보여 주며 단 3번의 포인트 피니시로 매우 부진했으나 이번에도 최종전 미국 그랑프리에서 스튜어트 1위, 세베르 2위로 원투 피니시를 일구어 내며 설욕에는 성공했다. 또, 세베르는 1970년부터 캔암과 WSC에 참가하며 내구 레이스에도 발을 들여 놓고 있었는데, 1972 르망 24시에서 마트라 소속으로 2위라는 높은 순위로 완주하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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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르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는 바로 1973년이다. 이전까지는 우승도 경험하고 몇 번 포디움에 들기는 했어도 포인트권 바깥의 낮은 순위로 피니시하거나 리타이어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는데 크게 업그레이드된 머신인 006이 제공되었던 1973 시즌의 세베르는 비록 우승은 없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정말로 이제는 스튜어트의 턱밑까지 따라잡았다고 할 만했다. 1라운드 아르헨티나 그랑프리부터 11라운드 독일 그랑프리까지 리타이어가 단 한 번도 없었음은 물론 7경기에서 포디움에 올랐으며 한 번의 3위를 제외하면 모두 2위였다. 세베르의 커리어 중에서 폴 포지션은 없었지만 스튜어트의 뒤에 바짝 붙은 랩타임을 내거나 때로는 그를 이기기도 하였으며, 100분의 1초 단위의 근소한 차이로 폴 포지션에 근접한 기록을 내기도 하였다. F1에서 그는 커리어 하이에 근접하였으며, 여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결과를 제하고 세베르가 보여 준 순간순간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 괄목할 만했는데, 스튜어트의 바로 뒤에 붙어서 달리던 경우가 많았으며 두 선수가 일렬로 나란히 달리는 장면이 많이 나와 1973년에 찍힌 사진 중에서 두 선수가 같이 나오는 사진이 많을 정도였다. 또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로켓 스타트로 모두를 제치고 나가 1위로 올라서 경기를 한동안 리드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한편 캐나다 그랑프리에서는 조디 셱터와 배틀 중 셱터의 실책으로 둘 다 트랙 바깥으로 밀려나서 세베르가 펜스에 정면으로 충돌해 위쪽 섀시가 날아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헬멧을 아직 벗지도 않은 셱터에게 절뚝거리는 발로 걸어가서 현피를 신청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세베르는 F1 이외의 시리즈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경험을 쌓았는데 발렐룬가 6시간 레이스에서 우승했으며 스팟 출전한 F2 포(Pau) 그랑프리에서도 우승하였다. 첼트베그 1000 km 경기에서는 벨투아즈와 한 차량으로 같이 참전해 2위로 피니시하기도 했다.

한편 어느덧 3회 챔피언이 된 스튜어트는 세베르의 실력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티렐 퍼스트 드라이버 자리를 세베르에게 물려 줄 궁리 중이었다. 1973 시즌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부터 이미 은퇴할 결심을 굳힌 스튜어트는 켄 티렐과 모의하여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발표하며 세베르에게 서프라이즈 선물로 퍼스트 드라이버 자리를 양보하기로 계획했다. 이는 티렐과 스튜어트를 제외하면 그의 아내까지도 몰랐을 정도로 비밀스러웠다고 한다.

한편 세베르는 페이스가 한껏 올라온 한편 티렐의 세컨드 드라이버로 지낸 지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스튜어트의 태도가 좀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스튜어트가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 시기 스쿠데리아 페라리로부터 이적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던 세베르는 스튜어트와 티렐에게 향후 자신의 거처에 대해서 확실히 해 줄 것을 바랐으나 웬만해선 비밀을 지키고 싶었던 스튜어트는 티렐에 남는 게 웬만하면 좋을 것이고 자세한 건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며 좀처럼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했고, 세베르는 여러모로 심란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12]

그러다 어느덧 세베르에겐 좋은 기억들이 있는 최종전 미국 그랑프리가 다가왔고, 이 레이스는 마침 스튜어트의 딱 100번째 경기였다. 스튜어트는 진작에 챔피언을 확정시켜 놓은 상태였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스튜어트는 커리어를 챔피언으로서 마감함과 동시에 정확히 100개의 레이스에 참가한 뒤 제자 세베르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 주는 일만 남았으나...

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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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르가 죽었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퀄리파잉 도중 세베르의 차량이 에세스[13] 커브에서 트랙 연석을 친 뒤 차량이 미끄러져 왼쪽의 가드레일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여 충돌하였다. 지금도 왓킨스 글렌의 해당 구간에서는 암코 배리어를 쓰고 있지만 당시의 배리어는 정말 원시적인 암코 배리어, 즉 그냥 일반적인 도로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가드레일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므로[14] 배리어는 240 km/h라는 높은 속력을 견딜 수 없었고 충격이 흡수되기는커녕 차가 뒤집어진 채로 가드레일을 비집고 들어갔고, 당대의 높고 약한 차체는 세베르를 전혀 보호해 주지 못했다. 세베르는 오히려 차량 안으로 파고든 배리어에 몸이 반으로 찢겨 즉사하였다.[15] 차량이 두 동강이 나 차체 앞부분이 완전히 날아갔으며 신체가 전복된 차량 밖으로 노출되었을 만큼 현장은 참혹했다. 사고 도중의 장면을 찍은 사진은 없으나 사고 이후에 찍힌 사진들만 보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세베르의 사고가 발생하자 적막이 서킷을 감쌌다. 피트에 있던 이들도, 트랙을 달리고 있던 드라이버들도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진 것을 느꼈고 다들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트랙 위에 있던 차량들은 한참 뒤 피트에 아주 느린 속도로 들어왔다. 그 고요 속으로 사고의 심각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들려오기 시작한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추 알게 되자 모두 비통에 잠겼고 특히 70년대에 티렐과 치열한 경쟁을 하며 관계를 쌓았던 주요 경쟁자들의 반응이 매우 안 좋았다. 로터스의 콜린 채프먼도 티렐 피트로 와 스튜어트에게 소식을 알린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으며 에메르손 피티팔디도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고 한다. 재키 익스 같은 평소에 눈물이 없던 드라이버들도 차에 앉아 울었다고.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던 드라이버이자 티렐이 1974년의 세컨드 드라이버로 내심 점찍어 놨던 셱터였다. 셱터는 사고를 보자 마자 차를 세우고 내려 세베르를 도우려고 달려갔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벨투아즈도 이 경기에 참가했었는데, 처음에 그는 티렐 차량을 보자 당연히 세베르가 아닐 거라 생각하였고 스튜어트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세베르의 차량임을 알아차렸고 세베르의 차량으로 가까이 걸어 가자 셱터가 "굉장히 잔혹하니 가지 마라"라고 저지하였다. 셱터는 피트에 돌아와서도 현장으로 가려는 티렐 관계자들에게 가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자클린도 세베르와 벨투아즈에게 해당 경기에 초대를 받았으나 자클린은 당시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기름 냄새를 맡을 수 없어 가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한참을 있다가 가장 마지막에 사고 현장으로 갔다. 상술한 만큼 희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사고였기 때문에 마셜들도 드라이버를 구하거나 꺼내려고 어떻게 건드리지 못해 스튜어트가 도착한 뒤에도 현장은 그대로였다고.

스튜어트와 티렐은 미국 그랑프리의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스튜어트의 레이스 기록은 엔트리는 100회이지만 레이스 회수는 99회로 기록되고 있다. 세베르는 인망을 많이 쌓아 뒀던 것인지 스튜어트뿐만 아니라 켄 티렐의 가족은 물론이고 티렐의 모든 팀원들에게도 깊게 자리잡은 드라이버였기에 티렐 팀 모두가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이 사고로 티렐 팀에게도 작지 않은 타격이 가해졌는데, 오랫동안 키워 온 세베르를 리더 드라이버로 올린다는 계획이 무너짐에 따라 스튜어트와 세베르를 둘 다 잃게 되면서 졸지에 드라이버 라인업이 리셋되어 1974년 시트는 조디 셱터와 파트리크 드파예에게 돌아갔다. P34가 등장하기도 했던 1970년대 후반까진 팀이 어찌저찌 상위권 즈음에서 버텼으나,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스폰서가 없어 켄 티렐이 자비로 팀을 굴려야 했을 정도였으며 1980년대에는 완전한 중하위권 팀이 되었고 1998년을 끝으로 티렐의 이름은 사라졌다. 세베르는 스튜어트는 물론 모든 관계자들이 그를 확실한 미래의 챔피언으로 생각했을 만큼 티렐 맨으로서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드라이버였고 1974년 차량인 007은 티렐에 처음 온 셱터도 몇 번의 우승을 해 낼 만큼 성능이 보장된 차량이었기 때문에 세베르가 배턴을 정상적으로 이어받았다면 티렐 팀 자체의 역사가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기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6]

당대 티렐의 차량은 길이, 특히 휠베이스가 유독 짧아 기동성은 최강이지만 차가 뻣뻣하고 통통 튀어서 안정성이 개판인 것으로 유명했는데, 1973년에 사용된 006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가장 짙게 나타난 차량이어서 스튜어트가 몰아 본 차량 중에서도 난이도가 최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튜어트는 사고 지점인 에세스 코너를 지나갈 때 느리더라도 확실한 안정성 확보를 위해 4단 기어를 사용했으나 세베르는 그렇지 않고 3단 기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스튜어트 또한 처음엔 3단 기어를 사용했으나 세베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4단을 썼다고 한다. 후속 기종인 007은 휠베이스를 늘리고 안정성을 중시하여 개발되고 있었는데 개발이 늦어져 이전 차량들처럼 시즌 도중 선행 적용되지 못했기에 더 아쉬운 부분.

4. 여담



[1] '-berg'로 끝나는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친가가 유대인이다. 세베르가 태어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고 또 부친 샤를 골덴베르는 레지스탕스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수아를 포함한 4남매가 전부 외가 쪽 성씨를 따르게 되었다. 양친 사이의 연애 관계까지 비밀에 부쳐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던 모양. 심지어 쭉 사실혼 관계였다고 한다. 종전 후 샤를 골덴베르가 "골덴베르로 개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봤지만 가족들이 반대했다고. [2] 둘은 이후 결혼에 골인하고 자식도 둘이나 얻는다. [3] Volant Shell. 느베르 마그니-쿠르 서킷의 영 드라이버 교육 프로그램 중 진행됐던 레이스이다. 1964년부터 1994년까지 지속됐고 르네 아르누도 여기 우승자 출신이며 데이먼 힐도 여길 거쳐 갔다. [4] 그래서 시간 여유가 있던 당대 F1 드라이버들은 F1에 F2 받고 내구 레이스까지 뛰는 경우가 많았고, 세베르도 F1 현역 시절에 그랬다. [5]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 국적의 마트라 팀은 '마트라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었고 훗날 티렐 레이싱으로 발전하는 이 팀은 켄 티렐이 마트라 차량을 가져다 쓰던 커스터머 팀, '마트라 인터내셔널'이었다. [6] Johnny Servoz-Gavin, 1942-2006. 전년도에 2위를 한 번 하기도 하는 등 커리어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1970년 시즌이 개막하기 전에 오프로드 레이스 사고로 눈을 다쳤고 눈 건강을 계속 걱정하고 다녔다고 하며 그 때문인지 1970년 티렐 차량은 위닝카였음에도 이후 실적이 리타이어, 5위(완주자 중 꼴등), DNQ(...)로 시원찮았고 시즌 도중 본인의 안전을 우려하여 3라운드 후 갑자기 모터스포츠 은퇴를 선언했다. [7] 물론 당시의 F1과 F2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 모터스포츠판 자체가 지금처럼 위계적이지 않았고 빠르게 올라오는 경우는 정말 빠르게 올라오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4년이란 기간은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8] 흔히 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때 스튜어트가 엄청난 대선배로 그려지곤 하지만 사실 스튜어트도 세베르와 나이 차이도 5살밖에 안 나고 1965년에 데뷔한 선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노땅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막 전성기를 시작했던 시기. [9] 여담으로 영국인 드라이버 피터 게신(Peter Gethin)의 유일한 우승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 1위와 2위 사이의 격차는 단 0.01초로 시대상으로 인해 1000분의 1초까지 기록되진 않았지만 F1 역사상 가장 가까웠던 격차의 피니시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0.001초까지 기록되었던 그랑프리들 중에서는 2002 미국 GP에서의 미하엘 슈마허 루벤스 바리첼로의 0.011초 차 피니시가 가장 가까웠는데, 1971 이탈리아 GP는 이것보다는 격차가 컸을 가능성이 높다. [10] 한편 이듬해인 1972년부턴 몬차 서킷에 시케인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1971 이탈리아 그랑프리는 같은 서킷에서 열린 2003 이탈리아 그랑프리가 개최되기 전까지 무려 32년간 역대 최고 평균 속력(242.6 km/h)을 달성한 그랑프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도 했던, 여러 가지 기록들을 가지고 있던 전설적인 경기였다. 이 속력은 야드파운드법으로 환산하면 150 mph가 넘는데, 이 정도면 거의 인디 500급(...) 평균 속력이다. [11] F1에서는 직전 시기에 전성기를 찍었던 드라이버로 독보적이지는 못하던 퍼포먼스의 페라리로 티렐과 로터스에 맞서 1969년과 1970년 시즌을 2위로 마감했다. [12] 스튜어트와 세베르가 했던 대화 내용에 따르면 세베르는 페라리가 빨리 계약 안 하면 다른 사람을 뽑겠다고 했다고 한다. 젊은 드라이버로서는 상당한 심적 부담이 되었을 만한 부분. [13] Esses. 그냥 S자 코너들이라는 의미이다. 엄청난 오르막의 고속 구간인 데다가 코너들이 급격하고 연석이 높아 빠른 차량으로 돌아 나가기 굉장히 타이트한 구간으로 유명하다. [14]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엔 마셜들이 암코 배리어 접합부에 "제발 여기 박지 말아 주세요"라고 마커로 써 놓기도 했다(...). 그리고 초고속으로 배리어를 쓸고 지나갈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이 접합부를 차량이 파고 들었기 때문에 암코가 차량 안으로 파고들어 흉기로 돌변하는 경우가 잦았다. [15] 암코 배리어는 오픈휠 모터스포츠에 있어서는 사회악과도 같다. 배리어로서의 능력도 타이어, 텍프로 배리어보다 한참 떨어지는 데다 앞이 낮고 뾰족한 포뮬러는 암코 배리어 사이를 파고들기 딱 좋기 때문. 이는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로버트 쿠비차가 차량을 뚫고 들어온 가드레일에 찔려 죽을 뻔했다가 한쪽 팔뚝을 잘라야 했고, 로맹 그로장도 차량이 암코 배리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죽을 뻔했다. [16] 그나마 티렐 팀의 먼 후신이 지금의 메르세데스이긴 하다. 참고로 재키 스튜어트도 90년대에 자신만의 F1 팀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이 팀은 지금의 레드불 레이싱이다(...). 자아분열 그리고 이 두 팀이 2010년대의 모든 챔피언십을 전부 우승했다. [17] 스튜어트의 프로필상 신장인 163 cm를 기준으로 할 경우 정확히 20 cm였다. 그때는 스튜어트가 좀 더 컸을지도 모르지만. 참고로 페달 모듈도 서로 다른 걸 썼을 정도로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듀오로 유명했던 피에르 가슬리 츠노다 유키의 키 차이도 20 cm가 안 된다. [18] 사고 경황 자체는 쾨닉의 것이었지만 등장한 차량은 세베르의 티렐이었다. 실제 사고 당시 쾨닉이 몰았던 차량은 팀 서티스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