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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19:44:39

파칼 왕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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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신전과 내부 무덤의 모습[1]

1. 개요2. 상세
2.1. 고대의 황금기와 몰락2.2. 1952년 발견
3. 구조4. 유해와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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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렝케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의 무덤. 고대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이 있다면 마야 문명에는 이 파칼 왕의 무덤이 있다.

무덤이 위치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비문의 신전'이라고도 불린다. 내부에서 마야 상형문자들이 새겨진 비문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2. 상세

2.1. 고대의 황금기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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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팔렝케 팔렝케의 왕궁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은 615년부터 683년까지 무려 69년 동안 마야 문명의 도시 팔렝케를 다스린 군주로,[2][3] 80세까지 장수하며 팔렝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다. 인근의 강대국 칼라크물의 침략으로 휘청거리던 팔렝케를 다잡고 인근 도시들을 정복해나가며 마야 문명 서부권을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이끌었던 것. 40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팔렝케에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들을 실시해서 궁전, 피라미드를 많이 지어놨다. 그렇게 오랫동안 팔렝케를 다스린 파칼 왕은 683년 8월 궁전에서 눈을 감았고, 이 비문의 신전 아래의 무덤에 고이 안장됐다.

팔렝케는 파칼 왕이 죽은 후에도 후계자 키니치 칸 발람 2세, 키니치 칸 조이 치탐 2세를 거치며 오랜 황금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711년 인근 도시 토니나의 공격으로 늙은 조이 치탐 2세가 붙잡혀 끌려가면서 종결되고야 만다. 치명타를 입은 팔렝케는 점차 쇠락했고, 800년대에 이르자 도시 자체가 붕괴했다. 팔렝케는 1520년대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정글의 암흑에 파묻혀 무너져갔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했을 무렵 팔렝케는 아무도 거주하고 있지 않는 폐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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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모슬레이가 찍은 1890년의 팔렝케[4]
그렇게 잠들어 있던 팔렝케는 1567년 스페인 출신 선교사 페드로 로렌조 데 라 나다가 처음으로 기록에 남기면서 역사에 재등장했지만 1773년까지도 아무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체계적인 조사는커녕 1786년에는 안토니오 델 리오 대령 휘하의 스페인 병사들이 스페인 국왕의 이색적인 취향을 맞추기 위해 팔렝케의 옥좌와 비석들을 통째로 뜯어갔을 정도.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800년대 들어서의 일로 그마저도 사진을 찍거나 그림 그리기, 비석들의 주형 떠가기에 그쳤다.

2.2. 1952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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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루즈 륄리에의 모습과 발굴 현장
숨겨져 있던 파칼 왕의 무덤이 발견된 건 1952년이다. 당시 팔렝케 발굴현장은 프랑스의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즈 륄리에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1949년 비문의 신전을 조사하던 도중 신전 바닥이 독특한 재질의 판석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 판석 바닥에는 2줄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에 집중한 루즈는 주변을 수색하던 도중, 벽이 바닥에서 끝나지 않고 바닥 아래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 줄의 구멍이 있는 석판을 들어올리자 피라미드의 내부 중앙으로 이어지는 지하 계단이 드러났으나, 계단통로 내부는 자갈과 돌덩어리들로 막혀 있는 상태였다. 루즈는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무려 3년 동안 계단 통로 내부에서 자갈과 돌을 퍼내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1952년에 마침내 루즈는 69개에 달하는 계단들을 모두 파내고 돌 빗장이 걸린 문에 다다랐다. 루즈가 빗장을 열고 문 안으로 들어가자 두 번째로 봉인된 문이 보였고 그 앞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조개껍데기 3개, 3개의 점토 접시, 주사 가루[5]와 11개의 옥구슬을 담은 조개껍데기가 놓여있었다. 두 번째 봉인마저 깨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6구의 인간 해골이 들어있는 또다른 상자를 발견했다. 그 뒤에는 마지막 세 번째로 봉인된 문이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동화 같은 광경, 또 다른 세계의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광경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얼음으로 조각된 마법 동굴 같았고, 벽은 눈 결정처럼 반짝거리고 빛났다. 섬세한 종유석 꽃줄이 커튼 술처럼 걸려 있었고, 바닥에 있는 석순은 커다란 양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보였다. 사실 묘실에 대한 내 첫 인상은 버려진 예배당 같은 느낌이었다. 너머의 벽에서는 얕은 부조의 치장벽토 조각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런 다음 내 눈은 바닥을 향했는데, 바닥은 거대하고 완벽하게 보존된 조각된 돌이 거의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 루즈의 일기
세 번째 입구마저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길이 8.8m, 너비 3.9m에 달하는 묘실이 드러났다. 묘실의 벽은 제례 의복을 입은 남자 9명이 돋을새김된 회반죽으로 장식됐다. 방 한가운데에는 상형문자들이 복잡하게 새겨진 거대한 직육면체 석판이 놓여있었는데, 루즈는 처음에 그 석판이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즈는 곧 이 정교하게 새겨진 석판이 석관의 관뚜껑일 가능성을 떠올렸고 1952년 11월 석판을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서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의 유해가 발견됐다. 석관 안에는 유해 뿐만 아니라 옥, 조개껍데기, 돌로 만든 정교한 데스마스크와 팔찌, 목걸이 등 옥으로 만든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야학자들 사이에서는 투탕카멘의 무덤 급의 대발견이었다. 귀족들의 무덤들이 발견된 적은 여러 차례 있지만 왕의 무덤, 그것도 이 정도로 권력이 강했던 왕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발견은 마야 왕릉의 양식과 당시의 왕실 장신구, 유물들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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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신전 꼭대기의 사원 구조 사원 내부
비문의 신전은 지금이야 칙칙한 회색 사원에 불과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붉은색 염료로 칠해져 있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색깔이었다.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이 죽기 10년 전부터 건설을 시작해 아들 키니치 칸 발람 2세 시절에 완공됐다. 총 8단의 피라미드 구조로, 맨 꼭대기에는 상형문자 텍스트들이 새겨진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5개의 문이 있는 사원이 세워졌다. '비문의 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사원에서 발견된 복잡한 상형문자 비문 때문인데, 아직까지 무슨 의미인지는 해독되지 않았다. 대충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나 파칼의 업적을 새긴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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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구조도

무덤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꼭대기의 사원 바닥에서 찾을 수 있다. 총 69개의 계단들을 걸어내려가면[6] 왕의 시신이 묻힌 매장실이 나온다.

지면에서 2m 아래 위치한 매장실은 8.8m X 3.9m 짜리 크기에 높이 7m 수준으로 마야 문명권에서 가장 거대한 지하실이다. 지하실 바닥은 9톤 짜리 거대한 암석 하나로 이뤄져 있다.

4. 유해와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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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칼 왕의 석관 덮개
가장 눈여겨볼만한 것은 무게가 20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관이다. 5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관덮개로 덮여있는데, 이 돌덮개에 화려하게 돋을새김된 부조가 아주 걸작이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외계인이 우주선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돌았는데 사실 그건 아니고 옥수수 신의 현신인 파칼 왕이 저승으로 돌아가 부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만 마야 문명권에서도 유난히 돋보일 정도로 화려한 조각, 세계수, 해와 달, 별, 죽은 자의 세계를 상징하는 거대한 뱀 등 다양한 상징들이 넘쳐나기에 문화적, 예술적으로도 독보적인 작품들 중 하나로 꼽힌다.

석관은 맨 위에 거대한 석관덮개가 있고, 그 덮개를 옆으로 치우면 아래에 항아리 모양의 석관 관뚜껑이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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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칼 왕의 부장품 데스마스크
관뚜껑을 열었더니 옥으로 만든 데스마스크를 쓴, 매우 키가 큰 파칼 왕의 유해가 붉은 주사 가루에 뒤덮여 있었다. 특히 이 데스마스크가 제일 유명한데, 200개의 옥조각들을 깎아 붙여 만들었고 눈동자는 흑요석으로, 흰자는 진주층으로 만들었다. 마야인들이 만든 옥 유물들 중에서는 최고의 정교함을 자랑하는 물건이다.[7][8] 옥으로 만든 이유는 옥이 마야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생명을 상징하는 광물이었기 때문. 이 마스크의 특징은 왕의 얼굴을 그대로 본떠 만든 마스크라는 점이다. 왕의 두개골에서 가면의 본을 뜰 때 사용하는 스투코가 발견됐기 때문.

데스마스크 뿐만 아니라 으로 만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구슬, 장신구 따위도 함께 있었는데 이는 마야학 역사상 최고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왕실 유물들이 이렇게까지 잘 보존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까닭이다. 목에는 호박 모양으로 깎은 수백여개의 옥 구슬들을 꿰어 만든 옥목걸이가 있었고, 팔에는 옥구슬로 만든 팔찌를 차고 손가락마다 두꺼운 옥 반지를 끼워놨다. 오른손에는 길이 3.5인치 짜리 옥 큐브 하나, 왼손에는 같은 크기의 옥 구체 하나씩을 올려놨다. 왕의 사타구니 위에는 마야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옥수수 신을 형상화한 옥 조각이 하나 올라가 있다.

석관 북쪽에는 파칼이 쓰던 제례용 옥 허리띠 하나와 작은 개인 장신구 하나, 석관 아래에는 고급 도자기와 정교하게 조각한 스투코 조각상 2개를 놓았다. 2개의 조각상들 중 하나는 젊은 파칼 왕을 묘사하고 나머지 하나는 팔렝케의 성숙한 왕으로서의 파칼 왕을 묘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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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칼 왕의 조각상[9] 주사 가루를 담은 조개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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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칼 왕의 유해 옥 팔찌와 반지 옥으로 깎은 태양신 조각상
다만 파칼 왕의 유해는 2024년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 투탕카멘의 미라가 이미 조사가 어느 정도 다 끝나서 얼굴까지 3D로 복원하는 수준까지 온 것과는 천지차이로 파칼 왕의 얼굴 복원은커녕 유해가 죽었을 때 몇 살이었는지 밝혀내는 것조차도 어려운 수준이다. 가장 큰 원인은 유골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 유해의 75% 만이 보존되어 있고 그마저도 부패해서 DNA 추출마저도 어려운 실정이다. 알아낸 것은 그의 키가 생전 165cm 정도였다는 것 정도 뿐이다. 치아 마모 정도로 유추한 시신의 나이가 죽을 당시 고작 40~50세에 불과, 80세까지 장수했다는 파칼 왕의 기록과는 전혀 맞지 않아 과연 이 유해가 정말 파칼 왕의 것이 맞냐는 논란까지 있을 정도다.[10]

현재 멕시코 시티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서는 파칼 왕의 무덤을 1:1로 완벽히 복제해서 재현해놨다. 특히 2004년에는 관광객들의 출입으로 인해 팔렝케 유적의 진짜 무덤이 습도와 온도가 높아져 회반죽이 훼손되자 무덤의 출입을 금지했고, 정글 속에 위치한 팔렝케가 마냥 가기 쉬운 곳도 아니기 때문에 더 편하게 무덤 내부를 보고 싶다면 멕시코 시티의 인류학 박물관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1] 엄밀히 말하면 아래의 사진은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 무덤의 모습을 1:1 비율로 보기 편하도록 재현해놓은 것이다. [2] 세계에서 5번째로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한정하면 캐나다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오래 재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3] 참고로 당시 한국에서는 한창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투닥거리다가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뤄지던 시기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676년이다. [4] 첫 번째 사진에 나온 피라미드가 바로 파칼 왕의 무덤이 묻힌 비문의 신전이다. 두 번째 사진은 정글에 파묻혀버린 왕궁의 모습. 위에 나온 팔렝케 왕궁과 동일한 건축물이다. [5] 마야인들은 주사 가루를 신성한 광물로 여기고 숭배했다. 주사 가루를 녹이면 액체 수은이 되는데, 이 은빛의 액체 수은이 빛을 내며 찰랑찰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신의 액체라고 여겼던 것. 하지만 마야인들은 수은의 위험성과 중독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수은중독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6]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은 69년 동안 재위했다. [7] 투탕카멘의 가면 같은 번쩍번쩍한 데스마스크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아보일지 몰라도 상당히 정교하게 깎인 물건이다. 바로 옆의 피라미드에서는 왕비의 데스마스크가 발견됐는데, 이 역시 비슷한 공작석과 옥으로 만들었는데 파칼 왕의 데스마스크에 비하면 훨씬 열화한 것이 보인다. [8] 이 귀한 마스크는 멕시코 시티 인류학 박물관 전시 중 1984년 도난당했다가, 기적적으로 5년 후에 우연히 되찾아 현재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9] 머리장식이 더 화려한 왼쪽 조각상이 성숙한 왕으로서의 파칼 왕, 오른쪽 조각상이 젊은 시절의 파칼 왕이다. [10] 다만 이는 파칼 왕이 아무래도 왕이다보니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음식들을 많이 먹었고, 때문에 치아 마모도로 측정한 나이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