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3:28

토머스 드 클리퍼드(제8대 클리퍼드 남작)

이름 토머스 드 클리퍼드
Thomas de Clifford
출생 1414년 3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모어랜드 애플리 성
사망 1455년 5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세인트 올번스
아버지 존 드 클리퍼드
어머니 엘리자베스 퍼시
형제 메리
부인 조앤 데이커
자녀 존, 로저, 로버트, 토머스, 엘리자베스, 마틸다, 앤, 조앤, 마거릿
직위 제8대 클리퍼드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동했고,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섰다가 전사했다.

2. 생애

1414년 3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모어랜드 애플리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7대 클리퍼드 남작 존 드 클리퍼드이고, 어머니는 헨리 '핫스퍼' 퍼시의 딸인 엘리자베스 퍼시였다. 누이로 메리 클리퍼드[1]가 있었다. 1422년 3월, 아버지 존이 모 공방전을 수행하던 중 전사했다.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할머니 엘리자베스 드 로스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퍼시가 후견인이 되었다. 1424년 3월 제6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의 딸 조앤과 결혼했다. 이후 장인인 토머스 데이커의 후견을 받았다.

1434년 2월 20세의 나이에 왕실 의회에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프랑스로 파견된 뒤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휘를 받았다. 1435년 성인으로 선언되어 자신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1436년 10월 16일 어머니가 사망한 뒤 어머니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436년 8월 베릭과 록스버러를 공격하는 스코틀랜드군에 저항하기 위한 사령관에 부임했으며, 그해 12월 10일 잉글랜드 의회에 클리퍼드 남작으로 처음으로 소환되었다. 1437년부터 정기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의 요크셔의 웨스트 리딩의 순회 판사로 활동했다. 1437년 스킵튼 성에서 대규모 건축 활동을 벌였는데, 그 중 하나가 1454년에 완성된 애플리 성이었다. 또한 숙모인 케임브리지 백작부인 모드가 물려준 코니스버러 성에서 살았다.

한편, 그는 컴벌랜드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적대했고, 그에 대한 폭동을 유발했으며, 퍼시 가문 및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동맹을 맺었다. 1448~1449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분쟁이 다시 불붙자, 스코틀랜드 국경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북부 영주 중 한 명이었다. 1449년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고, 1450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3세에게 파견된 3명의 왕실 사절 중 한 명이었다. 한편 잉글랜드 의회에 정기적으로 소환되었지만, 1454년 의회에 결근해 40파운드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1444년 헨리 6세의 신부인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모셔오기 위해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으며, 1448년 캥커셔 등지에서 추가 영지를 수여받았다. 또한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의 영지 관리를 맡았으며, 제2대 슈르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의 집행관을 역임했다. 1452년 3월 프랑스군의 윟벼을 받은 칼레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편 잉글래드 북동부, 특히 요크셔의 이스트 라이딩에 영향력을 강화해 1451년 요크셔, 요크, 헐에서 옷감 보조금을 받아냈으며, 1454년 장남이자 상속인인 존을 이스트 라이딩의 강력한 지주였던 헨리 드 브롬플렛의 딸이자 상속녀인 마거릿과 결혼시켰다.

1450년대 초 요크의 리처드와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간의 정쟁이 심해져서 내전이 발발할 조짐이 보였을 때, 토머스는 딱히 리처드에게 적대하지 않았지만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로 활동했다. 1452년 초 요크의 리처드가 군대를 일으켜 다트퍼드로 진군했을 때, 그는 사병대를 동원해 왕실군과 합세하여 리처드가 반란을 중단하고 군대를 해산하도록 압박했다. 1453년 8월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가 광기에 시달린 후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토머스는 리처드가 자신의 정적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동맹을 맺은 것을 경계해 퍼시 가문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1453년 10월에 시작된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간의 내전에서 퍼시 가문의 편에 섰다. 1454년 1월 제3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제1대 에그레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와 동맹을 맺고 네빌 가문에 대항했다. 요크의 리처드가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직접 잉글랜드 북부로 향하자, 그는 입장을 바꿔 리처드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요크셔의 형사 사건 심리 위원회에 참여했다. 1454년 성탄절에 헨리 6세가 정신을 차린 뒤, 요크의 리처드를 미워하던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가 리처드와 추종자들을 공직에서 밀어내고 랭커스터 지지자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때 토머스는 도로 리처드에게 등을 돌리고 랭커스터 왕조에 가담했다.

1455년 5월 21일, 레스터에서 대평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참석했다. 그러나 요크 공작 리처드는 자신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해 솔즈베리 백작 랄프 네빌과 함께 군대를 소집한 후 레스터를 향해 진군했다. 5월 22일, 왕실군은 세인트 올번스 시에서 주둔한 뒤 그곳으로 다가온 요크의 리처드와 협상했다. 리처드는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간신이라고 규탄하고 즉각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리처드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로 알려진 공세를 개시했다. 토머스는 성 베드로 교회 근처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리처드의 군대를 저지했지만,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인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끄는 분견대가 측면에서 침투했고, 결국 토머스는 패사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교회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발견되었고,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네틀스테드의 필립 웬트워스의 부인. [2]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