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피셔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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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42대 |
클라우스 피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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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피셔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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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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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클라우스 피셔 Klaus Fis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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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9년
12월 27일 ([age(1949-12-27)]세) 서독 바이에른 주 크로이츠슈트라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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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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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79cm | |
직업 |
축구 선수 (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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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SC 크로이츠슈트라슬 (1958~1961 / 유스) SC 츠비첼 (1961~1968 / 유스) TSV 1860 뮌헨 (1968~1970) FC 샬케 04 (1970~1981) FC 쾰른 (1981~1984) VfL 보훔 (1984~1988) |
감독 |
VfL 보훔 (1988~1989 / 수석 코치) FC 샬케 04 (1989~1992 / 수석 코치) FC 샬케 04 (1990~1991 / 감독 대행) FC 샬케 04 (1992 / 감독 대행) FC 샬케 04 II (1992~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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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45경기 32골 ( 서독 / 1977~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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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2. 선수 경력
2.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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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때 TSV 1860 뮌헨에서 데뷔했으나, 1970년 팀이 강등당하자 샬케 04로 이적했다.
그의 클럽 경력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샬케 04다. 샬케에서 그는 182골을 넣어 역대 최다 득점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1976년에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올랐다. 득점왕은 이때가 유일한 기록인데, 당시 게르트 뮐러, 유프 하인케스, 디터 뮐러, 칼 하인츠 루메니게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분데스리가 득점왕 경쟁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샬케에서 전성기 11시즌을 보내며 원클럽맨에 가까운 레전드로서의 입지를 다졌지만, 1980/81시즌 후 팀이 강등당하게 되자 결국 당시 분데스리가의 강호 중 하나였던 FC 쾰른으로 이적했다. 공교롭게도 피셔의 이적과 동시에 클라우스 알로프스도 뒤셀도르프에서 쾰른으로 이적해 왔고, 피에르 리트바르스키와 함께 서독 국가대표팀의 세 명의 주전 공격수가 동시에 FC 쾰른에서 뛰게 되었다. 비록 샬케 시절보다는 폼이 떨어졌지만 피셔는 쾰른 이적 후에도 괜찮은 득점력을 보였다. 그러나 쾰른은 전성기에 이른 알로프스와 떠오르는 신예 리트바르스키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해 나갔다. 결국 피셔는 1983/84 시즌이 끝나고 쾰른과의 재계약에 실패하며 VfL 보훔으로 이적했고 여기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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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에서 보인 전설적인 활약에 비해 국가대표 경력은 짧은 편이다. 우선 피셔보다 네 살 많은 게르트 뮐러가 당시 대표팀의 부동의 주전이었다. 게르트 뮐러를 논외로 하더라도 제2의 스트라이커로 충분히 국대에 뽑힐 만한 실력이 되었지만, 대표팀의 헬무트 쇤 감독은 대표팀의 조직력을 위해서 당시 분데스리가의 양대 강팀이었던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을 꾸렸다. 때문에 피셔 대신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의 유프 하인케스가 대표팀에 발탁되곤 하였다.
1974 월드컵이 끝나고 게르트 뮐러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자 1977년 초부터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었으나, 이미 그의 나이 28세였다. 선수 생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남들은 거의 대표팀에서 은퇴할 나이가 가까워져서야 데뷔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국대에서 활약한 시기는 길지 않았다.
피셔가 국가대표에서 활약한 시기는 1977년부터 1982년 사이었다. 뒤늦게 대표팀의 주전이 되었지만 그래도 45경기에 출전한 것은 결코 적지 않은 기록이다. 당시 세계 정상급이었던 서독 국가대표팀은 워낙 주전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가차없이 주전에서 탈락하기 일수였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당시 서독 국대에서 활약하던 주전 멤버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국대에서 활약한 시기가 길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당시 대표팀에서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던 파울 브라이트너를 봐도 대표팀에서 총 48경기에 출장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피셔보다 확실히 많은 출장 기록을 가졌던 선수는 루메니게 정도에 불과했다.[1]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동안 45경기에서 32골을 기록하여 골 순도가 매우 높았다. 1경기당 한골 이상 넣은 게르트 뮐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뮐러를 제외한다면 역대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경기당 득점율도 단연 뛰어나다.
다만 큰 경기에서 임팩트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지역 예선전에서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하면서 대표팀을 하드캐리했지만, 정작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셔가 본격적으로 대표팀 주전을 차지한 것은 1977년부터였다. 1977년 동안 각국 대표팀은 월드컵 지역 예선을 소화하느라 바뻤는데, 전대회 우승팀이었던 서독 대표팀은 지역 예선에서 면제되었고 친선전만 소화했다. 그해 피셔는 대표팀의 9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넣으며 전임자 게르트 뮐러를 무색케 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피셔는 첫 메이저 경기였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부진했다. 1977년 대표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던 피셔는 1978 월드컵을 몇개월 앞두고 갑자기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월드컵이 시작되고 나서도 부진이 이어지며 결국 대회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피셔의 부진으로 서독 국가대표팀 역시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2]
1979년 동안 펼쳐진 유로 1980 지역 예선에서 피셔는 6경기 5골을 넣는 맹활약을 하며 팀이 본선에 진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유로 1980 본선 때는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때는 이미 그의 나이가 30대 중반을 향해가면서 기량이 많이 쇠퇴한 상황이었다. 피셔는 1981년에 펼쳐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도 역시 맹활약을 하며 6경기 7득점을 하며 대표팀을 본선에 진출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피셔는 1982년에 이르러 갑작스런 노쇠화로 인해 극심한 부진에 빠져 있었다. 당시 피셔의 대표팀 승선을 놓고 갑론을박이 많았으나, 그동안 대표팀에서 그가 해준 것이 있었고 특히 1982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맹활약하며 본선에 진출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결국 승선하게 되었다. 1982 월드컵이 시작되고 나자 우려대로 피셔는 침묵하며 히혼의 수치에 일조하는 등 부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토너먼트 진출 이후 살아나 8강 스페인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팀을 4강으로 이끌었고, 4강 프랑스전에서는 연장전에서 자신의 장기인 오버헤드킥을 작렬하며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결승 진출에 이바지하는 등 그래도 대표팀 경력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바이시클 킥에 능했다고 전해진다.4. 기록
4.1. 대회 기록
- 1. FC 쾰른
- DFB-포칼: 1982-83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준우승: 1982
4.2. 개인 수상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75-76
- 키커 올해의 공격수: 1976-77
- 키커 올해의 팀: 1978-79
- DFB-포칼 득점왕: 1971-72, 1983-84
- 독일 올해의 골: 1975, 1977, 1982
- 독일 10년의 골: 1970년대
- 샬케 04 명예의 전당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