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없어진 자동차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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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Crosley Motors Incorporated |
한국어 정식 명칭 | 크로슬리 자동차 주식회사 |
설립자 | 파웰 크로슬리 주니어 |
설립일 | 1939년 4월 28일 |
해체일 | 1952년 7월 3일 |
소재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
업종 | 자동차 제조업 |
[clearfix]
1. 개요
Crosley Motors Incorporated (크로슬리 자동차 주식회사)1939년부터 1952년까지 존속한 미국의 경차 제조사. 미국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본사와 연구개발시설을 두었다.
2. 역사
당시 신시내티 레즈의 구단주이자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보급형 라디오,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방송사업으로 성공한 미국의 사업가 파웰 크로슬리 주니어(Powel Crosley, Jr.)가 인디애나 모터 스피드웨이에서 1939년 4월 28일에 첫 차를 공개하며 출범했다.파웰 크로슬리 주니어는 청소년기에 단순한 구성의 자작차를 만드는가하면 20대에 자신만의 자동차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투자자를 모집하려고 했으며, 가전제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타이어와 차내 라디오를 비롯한 자동차 애프터마켓 용품 사업을 했을 정도로 자동차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파웰 크로슬리는 사업 리스크 때문에 자동차 사업 진출을 만류하는 동업자이자 동생 루이스 크로슬리(Lewis Crosley)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의 아메리칸 밴텀[2]이 영국에서 도입해 온 오스틴 모터 컴퍼니의 보급형 자동차 세븐을 벤치마킹하여 1937년 말부터 첫 프로토타입[3]을 만들고 인디애나 주의 리치몬드에 공장을 세운 뒤 크로슬리 모터스 주식회사(Crosley Motors Incorporated)를 출범하며 보급형 자동차 시장을 겨냥했다.
첫 신차는 1939년형으로 출시된 휠베이스 2,032mm의 2인승 경차로 워키쇼 엔진(Waukesha Engines)으로부터 공급받은 공랭식의 2기통 12마력(hp) 637cc 수평대향 엔진에 싱크로메시가 없는 3단 수동변속기를 맞물렸으며 서스펜션은 전후륜 모두 빔 액슬 + 리프 스프링 조합, 여기에 공차중량이 454kg 수준에 불과해 최고시속과 연비는 각각 50mph(약 80km/h)와 50mpg(약 21.3km/l)를 기록했다. 판매는 크로슬리가 기존에 확보한 2만 5천 곳의 가전제품 판매망을 통해 이루어졌고, 당대 시작가격 325~350달러를 책정해 오스틴 세븐을 따돌리고 미국에서 가장 저렴한 신차로 등극했다.
크로슬리 모터스의 신차판매는 1939년 첫 해에 2,017대를 생산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0년에는 422대가 생산될 정도로 수요가 미미했으나 1940년형에서 가격을 299달러로 인하하고 2도어 컨버터블 쿠페, 2도어 컨버터블 세단의 2가지뿐이었던 라인업을 다양하게 확장하며 1941년에는 2,300대에 달하는 생산대수를 확보했다. 또한 크로슬리는 태평양 전쟁에 따른 전시상황으로 인해 연료 배급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연비라는 장점을 어필하며 인기를 끌었고, 정부의 명령에 따라 민수용 자동차 생산이 중단된 1942년까지 1,029대를 더 생산하며 총 5,757대의 차를 생산했다. 특히 크로슬리는 이 시기 미국에서 가장 늦게까지 민수용 자동차 제조를 지속하는 기록을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상황 동안 크로슬리는 경형 군수차량을 제조하는 등, 군수품 제조에 집중했다.
파웰 크로슬리는 1944년 6월 20일에 라디오 사업부를 분사 후 매각하는 등으로 크로슬리 모터스를 제외한 모든 사업을 매각했으며, 매각대금으로 개발한 신규 경차 라인업인 CC 시리즈를 1946년형 신차로 발표했다. 유선형 펜더가 강조되는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디자인 트렌드에 충실했던 A 시리즈 및 CB 시리즈와 달리, 유선형 2.5박스 패스트백 스타일에 평평한 측면부의 현대적인 디자인을 동일한 휠베이스 위에 구현하며 1946년형 카이저-프레이저와 함께 대량생산차 최초로 채용하는가하면 파워트레인도 캘리포니아 소재의 테일러 엔진 주식회사(Taylor Engines Inc)가 개발, 크로슬리와 독점 라이선스를 체결해 군수차량에 먼저 사용한 수냉식의 코브라(CoBra, Copper Braced) 724cc 직렬 4기통 엔진으로 교체하며 오버헤드 밸브 구성이 주류였던 시절에 대량생산차 최초로 오버헤드 캠샤프트 구성의 엔진 헤드를 채용하고, 최고출력도 26.5마력(hp)까지 상승했다. 가격도 2배 수준인 853.58달러로 상승하며 통상적인 대형 승용차와 가격폭이 크게 좁혀졌으나 크로슬리는 세컨드카 시장을 겨냥함과 동시에 전시상황 동안 신차에 굶주려 있었던 미국의 신차수요를 등에 업고 1946년에는 4,999대, 1947년에는 1만 9천 대 이상, 1948년에는 2만대 이상[4]을 생산하며 이전보다 높은 실적과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해 연 8만대의 생산대수를 전망했을 정도였다.[5]
하지만 이번에는 CC 시리즈의 코브라 엔진이 민수용 차량의 유지보수가 불안정한 운행환경과 맞지 않아 품질문제가 속출하고 1949년에는 생산대수가 7천 4백대 수준으로 급락하는 등, 실적에도 타격을 입었다.[6] 이 악재에 대응하여 크로슬리 모터스는 같은 사양에 소재를 주철로 바꿔 코브라 엔진 대비 내구성을 개선한 CIBA(Cast Iron Block Assembly) 엔진을 개발해 1949년형의 크로슬리 CD 시리즈에 적용하고 라인업도 다각화하여 복륜 타이어와 트럭 베드를 추가할 수 있는 경지용 다목적차 팜오로드(Farm-O-Road), 전쟁 이후 미국 최초의 국산 대량생산 스포츠카인 크로슬리 핫샷(Hotshot)과 슈퍼 스포츠(Super Sport), SUV의 "Sports Utility"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직접 적용한 스테이션 왜건 기반의 오픈형 모델 스포츠-유틸리티, 미제차 최초의 강철 바디 스테이션 왜건 라인업[7]과 4륜 디스크 브레이크 탑재 등의 의의를 남겼다.
나아가 크로슬리 모터스는 슈퍼 스포트를 통해 모터스포츠에도 진출했다. #
하지만 코브라 엔진과 디스크 브레이크[8]에서 불거진 신뢰성 문제로 인해 나빠진 평판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50년대가 다가오면서 제너럴 모터스,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3대 미국 자동차 대기업이 가격경쟁으로 전국의 중소규모 자동차 제조사들을 위기에 빠트리고 미국 소비자들도 다시 기존의 대형차를 찾기 시작하며 크로슬리 신차 대신 비슷한 가격의 중고차를 구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영난에 빠진 크로슬리 모터스는 결국 판매량을 회복하는 데 실패하여 1952년 7월 3일에 신차생산을 중단, 폐업했다.
크로슬리 모터스는 이때까지 약 8만 4천대의 차를 생산했으며, 공장과 CIBA 엔진의 판권은 각자 다른 곳으로 매각되어 제너럴 타이어 앤 러버(General Tire and Rubber)가 크로슬리 모터스와 함께 공장을 인수했다.
3. 차종
3.1. 1939~1942년형
크로슬리 모터스의 첫 차종으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시상황 돌입 전까지 생산되었다. #보급형 경차로 기획됨에 따라 각종 설계를 단순화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연료 펌프 없이 중력에 의존하여 연료를 엔진으로 공급하는 엔진룸의 4갤런(약 15.2L) 연료탱크,[9] 기계식 브레이크, 미닫이식 창문, 수동식의 단일 와이퍼 암이 적용되었으며 엔진 동력을 변속기에서 구동축으로 전달하는 관절부인 유니버설 조인트도 제거하고 고무 재질의 엔진 마운트로 대체, 토크 튜브를 통해 엔진 동력을 직접 구동축으로 전달했다.
- 시리즈 1A
- 시리즈 2A
- 시리즈 CB41
- 시리즈 CB42
3.2. 1946~1952년형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시상황이 해제되며 생산이 시작되었다. 괄호의 연도는 년형이 아닌 생산기간 기준.- CC 포(CC Four, 1946~1948)
라인업은 1946년형이 2도어 패스트백 세단, 2도어 컨버터블 쿠페를 제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7년형에는 픽업, 1948년형에는 후드 오너먼트를 더하는 동시에 스테이션 왜건과 이에 기반한 상용밴인 패널 딜리버리, 스테이션 왜건 기반의 오픈형 모델인 스포츠-유틸리티가 신규 라인업으로 추가되었으며 픽업도 후미부를 기존의 둥그스름한 형태에서 왜건에 기반하는 각진 형태로 변경했다. 1948½년형에는 굵직한 수평 크롬바 두 줄, 그리고 엠블럼 자리의 원뿔형 돌기가 추가되는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이들 중 인기가 많았던 모델은 1947년 11월에 1948년형으로 등장한 스테이션 왜건으로, 크로슬리의 1948년 한 해 생산대수 중 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23,489대를 차지하는 건 물론 당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왜건을 생산하는 기록까지 남겼다.
- CD 포(CD Four, 1948~1952)
1950년 중순부터는 내구성 문제에 시달리던 디스크 브레이크를 종래의 기계식 드럼 브레이크로 환원시켰다. 1951년형은 세단, 왜건, 쿠페에 집중하되 각 모델별로 최상급 트림인 슈퍼(Super)를 추가했으며, 기본형 모델을 단종시켜 딜럭스를 기본사양으로 재배치하는 동시에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 핫샷(Hotshot, 1949~1952)
- 슈퍼 스포트(Super Sport, 1951~1952)
- 팜오로드(Farm-O-Road, 1950~1952)
크로슬리 모터스가 폐업한 후에는 W.B. 크로프톤(W.B. Crofton)이 CIBA 엔진과 함께 판권을 인수, 적재함을 늘리고 출력도 35마력까지 증강시키는 대대적인 업데이트를 거쳐 1958년부터 1964년까지 크로프톤 버그(Crofton Bug)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었다.
4. 여담
- 크로슬리 차종을 전문으로 다루는 오너 클럽이 있다. 1969년에 설립되어 2024년 기준 8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또한 메인 페이지를 통해 크로슬리 차종들의 중요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 1952년에 폐업한 자동차 부문과 달리, 크로슬리의 가전제품 부문은 여러 차례 인수합병과 개명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정밀기계산업에 종사하는 L3해리스(L3Harris)로 흡수되었고, 상표권은 타사로 양도되어 라디오 및 가전제품 사업체의 브랜드로 유지되고 있다. 2024년 6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도 크로슬리의 복고풍 턴테이블이 수입되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도 페이지가 있다.
- 크로슬리 기반의 키트카 패키지로 1952년에 등장한 스콜피온이 있다. 크로슬리의 섀시 위에 얹을 수 있는 파이버글래스 바디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950년대 초 기준으로 현대적인 2인승 로드스터 모습을 갖추었다. 총 28대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대는 완성차로 만들어졌다.
- 닛산자동차의 전신이었던 닷선이 1948년에 출시한 승용차 라인업인 DB 시리즈가 크로슬리 CC 시리즈와 유사한 모습이다. 닛산 글로벌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미국의 바디 스타일을 적용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 창업주 파웰 크로슬리 주니어는 2010년에 자동차 부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 폐업 후 살아남은 개체 중 일부는 핫로드나 드래그스터로 개조, 드래그 경기에 투입되기도 했다. 미국의 자동차 전문 유튜브 채널 Donut Cars에서도 드래그스터로 개조된 개체 중 하나를 다루었다. #
- 더 그랜드 투어 시즌 5 2화에 제임스 메이가 고른 연노랑색의 크로슬리 CC 포 컨버터블이 등장하며, 경매장에서 11,050 유로(한화 약 1,640만원)에 낙찰받았다. #
5. 참고 자료
[1]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전시상황이 종결된 이후부터 폐업할 때까지 지면광고에 모토로 적용되었으며, 당시 부착된 십자가 모양
엠블럼에도 적용되었다.
[2]
American Bantam. 1929년에 설립되어 오스틴 세븐의 북미 사양을 만들어 판매했던 아메리칸 오스틴 카 컴퍼니 주식회사(American Austin Car Company Inc)가 1935년에 파산, 청산되자 로이 에반스(Roy Evans)와 윌리엄 와드 주니어(William A. Ward Jr.)가 그 자산을 인수해 펜실베이니아 주에 아메리칸 밴텀을 설립했다. 이때 이들은 오스틴 세븐을 북미 취향에 맞춰 대대적으로 재설계(미국 취향에 맞는 매끈한 스타일링, 엔진 재설계를 통한 토크 및 출력 항상 등)를 거친 신차를 만들어 1936년에 출시한다. 이후 미국이 전시상황에 돌입하자 미국의 군용 사륜차 제안에 맞춰
윌리스 MB의 원형을 제안했고, 이후에는 1956년까지 트레일러 생산에 집중했다.
#
[3]
4륜차이되 후륜 디퍼렌셜을 제외하는 차원에서 후륜 사이의 간격을 좁혀 3륜차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4]
출처에 따라 24,871대, 혹은 27,707대.
[5]
크로슬리 CC를 정식 공개했을 당시에는 6백여곳의 딜러에서 3만 건에 달하는 주문을 접수했으며, 1946년 8월 26일에 정식공개했을 당시 9천명의 관중이 모였고 하루 10명밖에 주문접수가 안 되는 상황임에도 1천여명이 현장예약을 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높은 수요와 관심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크로슬리에서는 전시차량 2대를 항공기로 배송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6]
파웰의 동생이자 엔지니어였던 루이스 크로슬리는 코브라 엔진을 신차에 탑재하자는 형의 의견에 반대를 표했는데, 군용차 대비 불규칙한 민수용 자동차의 유지보수 실태와 함께 강철과 구리로 이루어진 엔진 헤드와 실린더 블록이 냉각수에 노출되면 산화되어 부식되는 소재상의 이유를 들었다. 코브라 엔진은 강철을 압축성형해서 만든 경량의 엔진 헤드와 실린더 블록을 구리로 납땜하는 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크로슬리 CC 시리즈에 탑재된 후에는 엔진이 군용차에서 쓰일 때보다 불규칙한 가동환경에 노출된 것은 물론, 당시 민간에서 쓰던
부동액도 염분기가 있는 성분이었기 때문에 엔진이 쉽게 부식되어 내구품질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
[7]
이때까지만 해도 스테이션 왜건은 강철 대신 목재로 승차공간을 만들었으며, 이 시기 목재 바디가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들은 "우디 왜건(Woody wago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8]
항공기 용도로 개발된 디스크 브레이크를 자동차에 그대로 탑재한 것이 원인이었다. 항공기에서는 이착륙시에만 브레이크를 사용한 것과 달리 민수용 자동차는 브레이크의 사용 빈도가 높은데다가, 알루미늄 소재로 만들어진 특성상 부식에도 취약해 브레이크를 자주 사용하면 내구도에도 악영향이 가게 되었다.
#
#
[9]
컨버터블 쿠페 기준. 컨버터블 세단은 6갤런(약 22.7L) 연료 탱크가 후방에 설치되었다.
[10]
컨버터블 쿠페는 둥근 모서리, 컨버터블 세단은 각진 모서리가 들어간다.
[11]
크로슬리 오너 클럽의 크로슬리 역사 페이지 기준. 같은 사이트의 크로슬리 CC 정보 페이지에는 5월 9일로 명시되어 있다.
[12]
창업주였던 파웰 크로슬리 본인부터가 6피트 4인치(약 193cm)에 달하는 장신이었기 때문에, 신장 6피트(약 183cm)의 성인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실내공간을 확보했다.
[13]
기본으로 제공되는 후미등은 좌측에만 부착되었다.
[14]
스테이션 왜건과 픽업은 CC의 바디를 유지했다.
[15]
처음에는 옵션이었으나 기본 엔진으로 정착했으며, CIBA 엔진 출시 전에 출고된 기존 차량에도 장착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