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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미르 왕조 | ||||
모이미르 1세 | 라스티슬라프 | 스바토플루크 1세 | 슬라보미르 | 모이미르 2세 | }}}}}}}}}}}}}}} |
<colbgcolor=#11457E><colcolor=#FFF> 모라비아 공국 2대 공작 라스티슬라프 Rastisla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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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라스티슬라프 (Rastislav) |
라틴어 |
라스티즈 (Rasti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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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
라시스틀라보스 (Ῥασισθλάβ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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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사망 | 870년 이후 | |
재위 | 모라비아 공국의 공작 | |
846년 ~ 870년 | ||
아내 | 밀로슬라바? | |
아버지 | 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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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라비아 공국 2대 공작.2. 행적
모라비아 초대 공작 모이미르 1세의 조카이다. 보헤미아 출신의 가톨릭 성직자이자 역사가였던 얀 토마시 페시나 이 체코로두(Jan Tomáš Pešina z čechorodu, 1629 ~ 1680)에 따르면, 그는 보소라는 인물의 아들이며, 밀로슬라바라는 이름의 달마티아 공주가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846년 8월 중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인들이 충성을 거부하자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그곳을 복속시킨 뒤, 모이마르 1세의 조카인 그를 공작에 선임했다. 루트비히 2세가 그를 공작에 선임한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많은 학자들은 그가 일찍이 제국 궁정에 인절로 가서 루트비히 2세에게 신임을 얻었기 때문일 거라 추정한다.
852년, 라스티슬라프는 간통 혐의로 의해 루트비히 2세에게 추방당한 알브기스(Albgis)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853년 불가리아인과 함께 동프랑크 왕국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854년 루트비히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스트리아 변경백 라트포트(Ratpot)를 지원했다. 또한 855년까지 타이아강과 다뉴브 강 사이의 지역과 동부 슬로바키아 일대를 공략했으며,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855년, 루트비히 2세는 라트보트를 굴복시킨 뒤 라스티슬라프를 응징하기 위해 모라비아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라비아 요새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후 모라비아인들은 반격을 개시해 바이에른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이후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카란타니아 총독으로 삼아 모라비아인들을 상대하게 했다. 제국 연대기에 따르면, 856년과 857년에 모라비아인과 카를로만 사이에 승부가 나지 않은 전투가 이어졌다고 한다. 한편 라스티슬라프는 857년 동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축출된 보헤미아 공작 슬라비타(Slavitah)를 보호했다.
861년, 카를로만은 여러 사령관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을 해임하고 추종자들로 교체했다. 루트비히 2세는 자기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인사권을 행사한 아들을 질책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에 라스티슬라프는 카를로만과 동맹을 맺고 루트비히 2세에 대항하기로 했다. 862년, 두사람은 루트비히 2세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어 인 강까지 이르는 바이에른 일대를 공략했다. 이제 루트비히 2세가 아들과의 전쟁 때문에 모라비아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자, 그는 완전한 독립을 꾀했다.
라스티슬라프는 교회 차원에서 독립하기 위해 교황에게 동프랑크 교회의 통제에서 독립된 모라비아 주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이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거부하자, 라스티슬라프는 862년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3세에게 슬라브어로 기독교 신앙을 전할 수 있는 학자들과 주교를 모라비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863년 동로마 제국의 저명한 성직자이자 학자인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모라비아에 찾아왔다. 그들은 정교회 교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과 동시에 글라골 문자를 만들었다.
863년, 루트비히 2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보리스 1세와 동맹을 맺은 뒤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카를로만을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라스티슬라프는 카를로만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는데, 많은 학자들은 불가리아가 모라비아로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것에 위협을 느꼈을 거라고 추정한다. 864년 8월, 루트비히 2세는 보리스 1세와 함께 모라비아를 협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군은 마지막 순간에 작전 참여를 취소했지만, 루트비히 2세는 공세를 이어가 다뉴브 강을 건너 도위나 요새[1]에서 라스티슬라프를 포위했다. 그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여겨 항복하고 많은 모라비아 고위 인사들을 루트비히 2세에게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라스티슬라프는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며,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만든 문자에 기반한 슬라브 언어로 예배가 치러지도록 후원했다. 865년 재차 반기를 든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후 그는 모라비아의 동부 지역인 나트라 공국을 조카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넘겼다. 루트비히 2세는 868년과 869년에 모라비아에 프랑크군을 연이어 파견했으나, 라스티슬라프와 스바토플루크 1세의 저항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교황청은 메토디오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대주교로 임명해 바이에른 교회 관할권에서 모라비아를 제거했다. 이리하여 모라비아에 최초의 슬라브 대주교구가 탄생했다.
870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스티슬라프는 분노해 사냥을 함께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불러들인 뒤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음모를 사전에 파악한 스바토플루크 1세는 라스티슬라프를 급습해 체포한 뒤 870년 11월에 동프랑크 왕국에 넘겼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 후 그는 로마에서 모라비아로 가던 도중에 바이에른 주교에 의해 체포된 메토디오스와 함께 바이에른 수도원에 감금되어 870년 이후에 사망했다.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모라비아 공작이 되었지만, 871년 카를로만이 파견한 오스트리아 변경백 빌헬름 2세와 어퍼 판노니아 변경백 엥겔샤크 1세에게 체포되어 바이에른으로 끌려갔다. 이에 슬라보미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로만은 이에 대응해 스뱌토플루크 1세를 석방시킨 뒤 슬라보미르를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스뱌토플루크 1세는 슬라보미르의 항복을 받아내고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를 처단하고 모라비아 전역을 차지한 뒤, 동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94년, 라스티슬라프는 프레쇼프에서 체코 및 슬로바키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