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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3:22:42

카렌 가


1. 개요2. 기원3. 역사
3.1. 파르티아~ 사산 왕조 초기3.2. 권신 수크라3.3. 사산 왕조 중후기3.4. 카린반드 왕조가 되다3.5.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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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7대 가문 중 하나인 고대-중세 이란의 대귀족 가문. 가문의 본관은 이란 중부의 나하반드였다. 카렌-팔라비 가문, 카린반드 가문이라고도 한다. 수렌 가와 함께 7대 가문 중에서 가장 뼈대 있는 대가문이었다. 카렌 가는 행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다른 가업으로, 그들은 이란 샤한샤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 데라프쉬 카비아니를 지키고 보존하는 임무를 맡았다.

2. 기원

카렌 가는 스스로의 기원을 페르시아 신화의 전설적 영웅, 대장장이 카베로 밝혔다. 대장장이 카베는 선왕 잠시드를 살해하고 사람을 먹으며 이란을 잔인하게 통치한 악마 아지다하카에 대항하여 첫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영웅 카베와 그를 따르는 반란군은 잠시드의 친족이자 걸물로 유명하던 파리둔을 반란의 수령으로 옹립하고 아지다하카를 쳤다. 파리둔은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아지다하카를 죽이고 이란을 해방시켰다. 또 대장장이 카베는 쿠르드족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쿠르드족 신화에는 아지다하카가 아시리아 국왕으로 나오며, 잔인한 아시리아의 통치를 피해 훗날 쿠르드족이 될 피난민들을 이끌고 쿠르디스탄에 숨어든 인물이 대장장이 카베[1]라고 나온다. 또 파리둔이 아지다하카를 죽인 페르시아 신화와 달리 카베가 아지다하카를 죽였다고 나오기도 한다. 카렌 가는 스스로를 이 대장장이 카베의 아들 카렌의 후손이며, 그래서 성씨를 카렌으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페르시아 신화를 다룬 서사시 샤나메는 카베의 후손인 여러 영웅들의 가문을 카렌 가문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이 데라프쉬 카비아니를 지키는 임무이자 권리를 부여받은 것도 이들이 데라프쉬 카비아니의 주인 카베의 후손이라는 전승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는 신화 속 내용으로 카렌 가가 스스로 주장한 이야기일 뿐이며, 실제 역사에서 추적해보면 일단 카렌을 성씨로 사용하는 인물은 아케메네스조 시대에 처음으로 확인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시기에 다리우스 3세의 장군 중 하나였던 박트리아의 히스타스페스[2]가 카렌이라는 성씨를 사용한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손녀로, 황실의 공주와 결혼한 것으로 보아 히스타스페스도 명가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우가멜라 전투 패전 이후 그의 아내가 마케도니아 군대에 사로잡혔지만, 그녀가 황실 종친이었던 덕분에 범해지지 않아서 다리우스 3세 사후 히스타스페스가 마케도니아에 항복하자 부부는 재결합하였고 히스타스페스 역시 고관에 올랐다. 하지만 근현대 역사가들은 카렌 가가 파르티아의 황실 아르사케스 가문의 방계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5세기 중후반의 아르메니아의 성직자이자 역사가였던 성 모브세스 코레나치가 카렌 가의 조상은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 중 하나인 카렌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즉, 크게 원래 아케메네스조 시대부터 내려오는 이란 귀족이었다는 설과 아르사케스 가문의 분가라는 설로 나뉘는 것인가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3. 역사

3.1. 파르티아~ 사산 왕조 초기

이들의 본관은 이란 중부에 있었으나, 그들의 주요한 영지는 이란 북동부였다. 또 파르티아 시대에는 아르메니아에도 광활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 왕조에 비해 봉건제의 성격이 강한 국가였기 때문에, 샤한샤는 절대권력을 누리지 못했고 귀족 평의회의 간섭을 받았다. 전쟁을 치를 때도 상비군은 없고 샤한샤의 개인 재산과 사병만으로는 부족해 귀족들의 재산과 병사를 동원해야 했다. 카렌 가는 당대에 수렌 가와 함께 다른 귀족들에 비해 압도적인 양의 군사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샤한샤에게 빌려주었고, 그로 인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얻었다. 이는 두 가문이 다른 귀족들에 비해 확실히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파르티아- 사산 왕조 교체기에 가문의 분열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성 모브세스 코레나치는 파르티아가 무너지던 때에 오직 아르메니아 카렌 분가의 사람들만이 사산 반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마지막까지 아르사케스조의 샤한샤에게 충성했다고 기록했으나, 한편으로는 사산 왕조가 세운 유적인 낙쉐 로스탐의 비문에, 카렌 가문을 왕과 가장 가까운 가문이자 황실 바로 다음 급의 가문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란의 카렌 가 사람들은 사산 왕조에 협력한 반면 아르메니아의 카렌 가 사람들은 아르사케스 왕조에 충성한 것이다. 덕분에 왕조 교체 후에도 카렌 가문은 강력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란의 재무를 담당한 경력도 사산 황실이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했다.

3.2. 권신 수크라

카렌 가의 권력의 절정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수크라이다. 수크라는 페로즈 1세 시절에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483년,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의 전쟁에 나서면서 동생 발라시 크테시폰 총독-즉 섭정-으로, 수크라를 부총독으로 임명하고 원정을 나갔다가 헤라트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했다. 에프탈은 그대로 이란에 진입하여 전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수크라는 샤한샤의 복수를 외치며 남은 병사를 모조리 이끌고 고르간으로 나아갔다. 에프탈의 군주 쿠쉬나바즈는 감히 또 자신에게 덤벼오는 이란 장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만한 어투의 편지로, 수크라의 공식 직함은 무엇이며 자신에게 군대를 이끌고 오는 의도가 무엇인지 물었다. 수크라는 자신은 이란의 대재상으로, 돌아가신 선황의 복수를 위해 그대를 치러 간다고 당당히 답했다. 그러자 쿠쉬나바즈는 페로즈 1세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와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는 답변을 한 후 고르간에서 수크라의 군대를 맞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투에서 수크라의 군대는 에프탈족을 압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너무 많은 전사를 잃어 당황한 쿠쉬나바즈는 이란에서 퇴각하겠다며 평화 조약을 맺어줄 것을 간청했으나, 수크라는 에프탈족이 페로즈 1세를 이기고 얻은 모든 재물과 포로들을 석방하고 가지 않으며 모조리 섬멸해버리겠다며 강하게 나갔다. 이에 쿠쉬나바즈는 헤라트 전투에서 사로잡은 재무장관, 모바단 모바드[3], 공주를 비롯한 모든 포로와 전리품을 수크라에게 넘기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승리 후 그는 크테시폰으로 돌아왔는데 , 그곳에서 여러 귀족들은 그를 큰 영예로 영접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공식적으로 그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또 수크라는 곧장 선황의 동생 발라시를 샤한샤로 옹립했다. 그러나 발라시는 아르메니아 반란군과 타협하여 현지인들의 자치권과 기독교 신앙을 인정해주면서 사제 계급에서 인기를 잃었고, 에프탈족이 입힌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면서 귀족 계급에서도 인기를 잃었다. 그러자 수크라는 발라시를 폐위시키고, 에프탈로 망명했던 페로즈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카바드를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카바드 1세이다.

이제 샤한샤의 삼촌이 된 그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졌다. 수크라는 완전히 일본 역사의 쇼군마냥, 완전히 카바드 1세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총괄했다. 군권과 재정권을 모조리 자신의 손에 쥐었다. 그 권세가 어찌나 막강했는지 사람들이 대놓고 카바드의 면전에서 그를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고, 지역 관리와 귀족들이 샤한샤가 아닌 수크라에게 충성 맹세를 보낼 정도였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카바드 1세는 493년에 성인이 되자, 제일 먼저 수크라를 낙향시켰다. 그런데 권세가 어찌나 강한지 낙향을 해서도 권력이 줄지를 않았다. 후대 역사가는 '샤한샤의 머리 위에 얹힌 제관을 제외한 모든 것을 통제했다'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거기다 고향 쉬라즈에서도 샤한샤가 나 덕분에 즉위한 것이라며 위험 발언을 일삼고 뽐내기도 했다. 이에 카바드 1세는, 이러다가 수크라가 찬탈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곧 샤한샤는 은밀히 나라의 또 다른 대귀족 가문 메흐란 가의 샤푸르 메흐란을 불러들였다. 샤푸르는 수크라의 정적이었다. 샤한샤의 밀지를 받은 샤푸르는, 메흐란 가의 사병들과 샤한샤의 사병을 이끌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수크라도 카렌 가의 사병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군사를 합쳐서 쉬라즈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여기서 샤푸르가 수크라를 상대로 승리했다. 그는 수크라를 잡아왔고, 카바드 1세는 그를 하옥시켰다가 곧 처형했다. 뭇 사람들은 이를 두고 '수크라의 바람이 멈추었으니 이제 메흐란의 바람이 분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원래부터 라이벌 구도였던 카렌 가와 메흐란 가는 제국이 망하는 날까지 원수가 된다.

수크라가 반역 혐의로 처형된 후, 카렌 가는 권세가 한풀 꺾이는 듯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카바드 1세는 훗날 귀족 세력 약화를 위해 마즈다크교를 후원하다가 폐위당해 자마습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망각의 탑이라는 곳에 갇혔는데, 그곳에서 탈출하여 에프탈로 가 에프탈의 공주[4]와 결혼하고 복위를 시도했는데, 이때 수크라의 아들 자르미르가 발벗고 나서 카바드 1세를 도왔다. 카바드 1세는 복위에 성공한 후 수크라의 아들들을 중용했다. 자르미르는 자불리스탄 사트라프 직에 올랐고, 그의 동생 보조르그메르는 재상이 되었다. 그의 아들 시마 바르진은 호라산 사트라프가 되었다. 카바드 1세의 뒤를 이은 호스로 1세는 아예 부황께서 카렌 가에 너무 모질게 굴었다고 인정하고 다시 카렌 가를 높이면서, 가문의 권세는 유지되었다.

3.3. 사산 왕조 중후기

보조르그메르는 호스로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어떤 사제도 풀지 못한 호스로 1세의 꿈을 풀어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재상이 된 그는 엄청난 내정 능력을 보여주면서 나라를 잘 다스림은 물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어 이란 최고의 현자로 불리기도 했다. 어느 날 인도의 왕이 호스로 1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것은 체스, 정확히는 당대 인도의 초기형 체스인 차투랑가 판과 말 세트였다. 인도 국왕은 호스로 1세에게, 차투랑가가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인도에 조공을 하라는 편지를 동봉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호스로 1세는 조정 신하들을 모조리 모아 머리를 모아봤으나 도저히 감을 잡지 못했다. 이때 보조르그메르가 일주일 만에 차투랑가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곧 인도에서 현자들이 와서 차투랑가를 어떻게 하는 지 알아냈냐며 거만하게 물어보았는데, 보조르그메르가 나서서 인도 현자들과 차투랑가를 하여 이들을 이기면서 인도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조르그메르는 샤한샤에게 우리도 인도인들에게 우리의 현명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진언했다. 샤한샤가 반격을 허가하자, 보조르그메르는 자신이 개량한 주사위 게임 백개먼 판과 말을 인도 현자들에게 주면서, 백개먼이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이란에 조공을 해야 할 것이라며 압박했다. 이에 인도에서도 현자들이 모두 모였으나 결국 백개먼을 분석해내지 못했고, 결국 인도 왕은 조공을 바치고 플레이 방법을 알아가야 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처신은 그렇게 현명하지 못했던 모양인데, 그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오만하게 굴어 샤한샤에게 밉보였고, 결국 노년에는 국가 예산을 횡령하여 일신의 건강을 위한 보석 관장[5]을 했다는 혐의로 투옥되고 말았다. 하지만 보조르그메르에게는 다행이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절과 밀봉된 상자를 보내며 상자를 열지 않고 내용물을 맞추지 못하면 로마에 조공을 보내라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스로 1세와 신하들은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맞출 수가 없어, 결국 호스로 1세가 몸소 감옥으로 가 보조르그메르를 꺼내고 위로하며 수수께끼를 맞추게 했다. 그러자 보조르그메르는 호스로 1세에게 각종 수수께끼를 던져서 샤한샤가 머리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인정하게 만든 뒤 동로마의 수수께끼도 깔끔하게 풀어냈다. 이 일로 그는 복권되었다. 하지만 그의 말로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어떤 기록에는 복권된 후 자연사했다고 전하는 반면, 어떤 기록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혐의로 처형당했다고, 또 다른 기록에는 마니교로 개종한 혐의로 처형당했다고 전한다. 보조르그메르는 인도와 로마의 콧대를 눌러주고 이란인의 현명함을 보여준 인물로써 이란 민족의 자존심의 상징으로 남아, 현대까지 흉상이 세워지는 등 이란에서 존경받고 있다.

이렇듯 카렌 가는 수크라의 시대와 그의 몰락 후 닥쳐온 짧은 위기를 황실에 대한 무한 충성으로 돌파했다. 호스로 1세의 대개혁 때 이란을 네 개의 코스트로 나누어 행정 효율을 높이는 방안이 통과되었는데, 이 때 카렌 가는 이란 동북부의 호라산 코스트를 위탁받았다. 590년에 카렌 가의 숙적 메흐란 가 바흐람 추빈이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자, 카렌 가는 즉각 바흐람 추빈의 즉위를 불인정하고 그를 토벌하는 데 제일 먼저 앞장섰다. 이후 여러 비왕조 출신 귀족들이 샤한샤를 자칭하는 혼란한 시기에, 카렌 가는 한결같이 사산 황실을 지지했다.

3.4. 카린반드 왕조가 되다

651년, 외부에서 닥쳐온 이슬람 제국에게 사산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카렌 가는 최후의 전투 까디시야 전투에서도 가업으로 수호해 온 데라프쉬 카비아니를 들고 야즈데게르드 3세를 수호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데라프쉬 카비아니까지 이슬람군 전사인 자랄 빈 카타브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기존의 체제가 무너지는 격동의 시대에, 카렌 가문은 중앙에서의 거점이던 나하반드는 빼앗겼지만 지방에서의 거점인 이란 북동부 타바리스탄에 할거했다. 그곳에서 사산 황실의 방계 가문인 다부이 가문, 이란 7대 가문 중 한 곳인 이스파부단 가와 싸워, 다부이 가문이 지도자가 되었으며 카렌 가와 이스파부단 가가 그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다부이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 멸망하자, 카렌 가는 독립 왕조가 되어[6] 또 다른 사산 황실의 방계 가문인 바반드 가와 함게 이란 북부 다일람 지역의 이슬람화를 저지하며 총독을 방해했다. 아예 782년에는 카렌 가의 당주 빈다드후르마즈드와 바반드 가의 당주 샤르윈 1세가 연합하여 반이슬람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사이프 알 하라시가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일람으로 진입했는데, 지형이 험준하여 바반드-카렌 연합군을 쉽게 이기지 못했다. 이후 이들은 반독립 지위를 얻는 선에서 타협하고 반란을 그만두었으나 계속하여 반이슬람 활동은 이어갔는데, 이러한 저항 활동 805년에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두 사람을 바그다드로 소환하면서 끝난다. 칼리프의 궁정에서 둘은 이슬람 제국에 대한 충성과 조공 납부를 맹세하고 4년 간 그들의 장남을 바그다드에 인질로 두어야 했다. 이후 빈다드후르마즈드는 809년에 사망하여 아들 카렌이 상속받았고 샤르윈 1세는 817년에 사망하여 아들 샤흐리야르 1세가 상속받았다.

하룬 알 라시드의 후계자 알 마문 동로마 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그는 이 전쟁에 카렌 가와 바반드 가를 동원했다. 바반드 가의 샤흐리야르 1세는 완강히 거부하고 병사를 보내지 않았으나 카렌 가의 카렌은 이에 응하여 아나톨리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대가로 카렌은 칼리프에게 많은 보물과 관직을 얻었다. 샤흐리야르 1세는 이를 보고 카렌을 조로아스터교와 페르시아의 배신자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카렌 가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카렌의 아들인 마지아르의 대에 카렌 가는 완전히 패배하고 영토를 모두 빼앗기고 만다.

이에 마지아르는 바그다드로 도주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823년에 아바스 왕조의 관군을 데리고 다일람으로 돌아왔다. 마지아르는 샤흐리야르 1세의 아들 샤푸르를 죽이고 다일람을 수복하고 통합하였다. 그는 모스크를 짓는 등 무슬림 통치자인 척 하다가, 조용히 조로아스터교로 돌아와서 무슬림을 박해하고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통치를 이어가다가,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의 명목상 상관인 타히르 왕조의 아미르가 세금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이다. 마지아르는 이를 거부했는데, 그러자 타히르 왕조는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마지아르는 자신과 칼리프의 대장군 알 아프신 하이다르 이븐 카우스, 화제의 조로아스터교도 반란자인 바박 호람딘 사산 왕조 복고를 목표로 단결하였다고 선언한 후, 조로아스터교 반란을 일으켜 선공에 나섰다. 서쪽에는 자신의 형제 쿠히야르를, 동쪽에는 바반드 가의 카렌 1세를 보냈다. 반란 초기에는 승승장구하였으나, 곧 쿠히야르는 타히르 왕조에게 매수되었고 카렌 1세는 가문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데다가 무슬림 폭동까지 터지면서 반란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지아르는 사로잡힌 후 사마라로 압송되어 참수당했다. 그 시신은 바박 호람딘의 시신과 같이 효수되었다. 마지아르 역시 오늘날의 이란에서 이란의 기백을 보여준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쿠히야르가 타히르 왕조의 위세를 빌려 카렌 가 당주에 올랐으나, 조로아스터교의 이름으로 싸우던 마지아르를 팔아먹은 쿠히야르를 싫어하던 조로아스터교도 병사들이 곧 그를 살해하였다. 가문은 혼란에 빠져 약해졌고, 곧 바반드 가의 봉신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카렌 왕조는 끝이 났다. 이후 카렌 가는 적어도 11세기까지는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확인된다.

3.5.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파르티아 시대에 아르메니아로 간 카렌 가문은 캄사라칸 가문으로 이름을 한번 바꾸었다. 그들은 예르반다샤트를 수도로 삼아 아르메니아에서도 강력한 권력을 누렸다. 아르메니아 아르사케스 왕조-소위 아르샤쿠니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캄사라칸 가의 지위는 굳건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북서부를 다스리면서 전반적으로 친로마 정책을 이어갔다. 5세기 초에 동로마 제국이 아르메니아 서부를 직할령으로 편입하자 캄사라칸 가의 당주 가자본 2세가 사산 왕조령 아르메니아 영토로 이주하긴 했으나, 후계자 아르샤비르와 나르세스 1세 등이 마미코니안 반란에 가담하는 등 사산 왕조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으며 실질적으로 동로마 제국 귀족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캄사라칸 가에서 고위 인사가 셋이나 나왔다. 그 필두는 유명한 명장 나르세스로, 환관이었으나 뛰어난 군재와 처세술로 동고트족, 프랑크족 등의 적을 상대로 막대한 공을 세우며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양팔이 되었다. 80대까지 현역으로 일했고 95세에 사망하며 천수와 부귀영화를 모두 누렸다. 또 아르메니아인 이삭은 라벤나 총독을 역임하였으며, 또 다른 이삭은 이탈리아 주둔군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했다. 또 중앙정치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현지에서도 당주 나르세스 2세가 로마령 아르메니아의 부왕직과 궁정 고위직인 쿠로팔라테스를 겸임하는 등 높은 명성을 누렸다.

이렇게 충성스러웠던 만큼, 이슬람 제국이 세를 떨치기 시작했을 때 캄사라칸 가는 이에 완강히 저항했다. 아예 771년에 여러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들과 함께 대대적인 반이슬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775년, 바그레반드 전투에서 아르메니아 연합군이 패전하고 주요 가문들의 당주들이 몰살당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여파로 캄사라칸 가는 완전히 몰락하여 결국 그들의 작위를 바그라티온 왕조에 팔아넘기고 그 가신이 되었다. 이후 캄사라칸 가의 분파인 팔라부니 가가 바그라티온 왕조 휘하에서 다시 영지를 받아 대귀족이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분할할 때 그레고리우스 팔라부니가 아르메니아 총독직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팔라부니 가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간드자크의 오신이 팔라부니 가문 일원을 데리고 킬리키아로 이주하였고, 킬리키아로 간 팔라부니 가는 헤툼 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조가 되었다가 1340년대에 단절되었다.

남하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에 남은 가문의 일원은 자카리아-므하르그르드젤리 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은 조지아 왕국 휘하로 들어가서 아르메니아 북부를 통치했으며, 훗날 흑양 왕조에 패배해 조지아로 올라갔다가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에 멸망하자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 들어간 후에는 입향조 아르구트의 이름을 따 아르구틴스키-돌고루코프 가로 이름을 바꾸었다. 19세기 캅카스 정복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 모이세이 자카로비치와 당대 러시아 최고의 말라리아 권위자이자 소아과라는 개념을 러시아에 처음 도입한 병리학자 겸 소아과 의사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등의 위인을 낳았다. 이 가문은 현재 카렌 가의 후예 중 유일하게 현대까지 후손이 남아있는 가문으로, 족보 위조가 없었다면 현재 이름이 남은 카렌 가의 유일한 부계 직계 후손은 러시아에 있는 것이다.


[1] 쿠르드어로는 카웨로 발음한다. [2] 페르시아어로는 비쉬타스파. [3] 사산 왕조 시기 조로아스터교의 종교 지도자. [4] 앞서 수크라가 구해왔던 페로즈 1세의 공주가 낳은 딸로, 카바드 1세의 친조카다. [5] 당대 이란인들을 보석을 갈아마시는 방식으로 장을 깨끗이 하고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6] 카린반드 왕조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