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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2 15:09:36

천정대

天政臺

1. 개요2. 정사암 회의
2.1. 창작물에서

1. 개요

충청남도 기념물 제49호.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에 위치한 사적지로, 백제 후기에 재상을 선출하던 곳이다. 금강의 상류인 백마강(白馬江, 백강)변의 바위 절벽에 위치해 있다. 이 커다란 바위를 정사암(政事巖), 이 곳에서 열리는 귀족 회의를 정사암회의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사적지를 알리는 작은 정자 하나만이 설치되어 있다. 강 건너편에는 수도 사비성의 왕궁이었던 부소산성이 있다.

2. 정사암 회의

또 호암사(虎嵓寺)에는 정사암(政事嵓)이 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宰相)을 의논할 때에 뽑을 만한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국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又虎嵓寺有政事嵓. 國家将議宰相, 則書當選者名或三四凾封置嵓上, 湏臾取看, 名上有印跡者為相故名之.
삼국유사 기이편 남부여 전백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백제의 귀족 회의이다.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達率) 이상의 귀족이 이 회의에 참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정사암 회의는 전술한 기사에도 보이듯이 재상선출 등을 비롯한 주요국사를 이곳에서 논의하고, 또 일정한 의식을 거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 신라의 비슷한 귀족 회의인 화백회의와 달리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2.1. 창작물에서

2.1.1. 계백

드라마 계백에서 정사암 회의를 두고 백제의 왕들과 귀족들간의 힘겨루기가 자주 묘사되었다. 6화에서 무왕은 자신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사택가문을 제거하기 위해 사택가문이 무왕 이전의 두 왕과 선화황후를 죽였다는 증거인 살생부를 무진을 시켜 입수한 뒤 금마(익산)으로 천도를 추진하는 한편 왕권을 제약하는 정사암 회의를 없애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사택비가 귀족들을 선동해 무왕을 협박함과 동시에 무진이 자신을 인질로 잡은 일을 의자와 연루시켜 죽이려고 하면서 결국 무왕은 살생부를 불지르고 무진을 희생시켰다.

29회에서는 낙마사고로 의자가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만일을 대비해서 태자를 정하기 위해 정사암 회의가 열렸다. 이때 은고의 아들 부여효와 연황후의 아들 부여태가 물망에 올랐는데, 명분상 장자이자 황후의 아들인 부여태가 계승이 유력했다. 은고는 계백을 찾아가 자신의 아들을 지지해달라 부탁했지만 이미 흑화가 진행중이던 의자왕과 은고에게서 백제 개혁 정치가 어렵다고 보고 결국 계백과 성충, 흥수는 부여태의 태자 임명을 찬성한다. 이후 연태연은 그간 자신과 대립했던 은고에게 "순장을 준비하는 게 어떻겠느냐"란 발언을 하는 등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의자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본인 부재시에 대신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명분으로 정사암 회의를 폐지하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연태연은 황후자리에서 쫓겨나 아들과 함께 사비성에서 나가고, 흥수는 삭탈 관직, 성충은 정치적 권력을 잃고 계백 또한 관직을 잃고 추방당한다. 이는 이후 의자왕의 몰락을 가져왔는데,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의자왕에 충성맹세를 했지만 불만이 가득했고 계백이 추방당하자 국경을 방어할 만한 장군이 없어 그동안 빼앗은 영토를 신라에 다시 탈취당한다.

결국 계백이 복귀하면서 전선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의자왕은 폭군의 모습을 종종 보였고, 대당 외교 실패와 황후 은교의 세작 행위로 결국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당한다. 그리고 그동안 왕에게 억눌려있던 귀족들은 아무도 의자왕을 돕지 않으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