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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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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晉西事變(정체), 晋西事变(간체)

1. 개요2. 배경3. 사변 경과4. 중국 국민당의 주장5. 중국 공산당의 주장6. 양측의 화해7. 그 후의 이야기8. 참고 문헌

1. 개요

중일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39년 11월 28일, 팔로군과 옌시산이 이끄는 국민혁명군간의 무력 충돌 사건. 이 사건으로 국민혁명군의 1939년 겨울 공세가 어그러졌다. 중국 공산당은 옌시산이 국공합작을 저버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려던 팔로군을 공격했다고 비난했고 옌시산과 국민당은 공산당이 명령을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후 양측은 가까스로 화해하고 국공합작을 이어갔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 배경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단행해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은 점차 북중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산시성 또한 일본의 위협을 받았다. 1935년 말, 일본은 하북 사건을 조사하고 국민정부에게 북중국의 5개 성의 자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공산군은 대장정을 성사시킨 뒤 1936년 5월 초 산시성 북부지역에 진입했다. 이에 국민혁명군은 산시강 동쪽에 주둔해 공산군 토벌을 준비했고 6월엔 천청이 섬서초비총사령관이 되어 산시성의 국민혁명군을 이끌었다. 이것은 '산서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시성을 확고히 지배하고 있던 옌시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옌시산은 장제스의 위협이 노골화되었다고 느꼈고 심지어 부하 량화지(梁化之)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공산당에게 죽지 않을 테지만 장에게 죽을 것 같군."

이후 일본군, 공산군의 공격과 국민혁명군의 위협에 직면한 옌시산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타협을 이끌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린 공산당원과 국민당의 한가운데에서 위험에 처해있다. 그러나 공산당과 협력하지 않는다면 해결책이 있겠는가? 이제 나는 공산당의 수단만 사용할 수 있고 나는 일본과 장제스에게 대항할 수 없다. 나는 공산당을 이용함으로서 공산당을 약화시킬 것이다."

1936년 9월 18일, 산시성의 일부 좌파들은 "반일구국동맹회(抗日救國同盟會)"를 창설했다. 옌시산은 일본의 분노를 사는 걸 두려워해 이 단체의 이름을 "희생구국동맹회(犧牲救國同盟會)"로 바꾸고 자신이 회장이 되었다. 그해 10월 말, 옌시산의 초청을 받은 산시성의 공산당원 보이보는 희생구국동맹회의 사역을 관장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산시성과 옌시산의 반일 민족 통일 전선에 가담했다.

그러던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그해 8월 5일, 옌시산은 난징으로 가서 국방회의에 참석해 일본과의 전면전을 지지했으며 제 2군의 지휘관을 지냈다. 8월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에 관한 합의에 이르렀고, 공산군은 제 8 육군으로 재편되어 제 2군의 지휘를 받으며 산시성 항일 전쟁에 투입되었다. 옌시산은 "국가 혁명"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보이보의 지휘하에 "산시청년항적결사대(山西青年抗敵決死隊)"를 조직하는 것에 동의했다.

일본군은 베이징과 천진을 공략한 후 산시성에 군대를 파견했다. 8월 27일, 옌시산은 제8 육군에게 옌먼관(雁門關)으로 가서 일본군에게 대항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9월 초 일본군이 산시성을 침략했을 때, 진시 일대의 군대는 광릉을 방어하지 못했다. 9월 말 진시 육군과 중부 군대 및 제 8육군이 공동으로 전투를 실시했으나 전세는 불리했고 11월 8일 일본군은 산시성의 수도 타이위안을 점령했다.

이 기간 동안 옌시산의 진시군의 손실은 상당히 많았다. 그는 산시청년항적결사대가 이 상황을 역전시키도록 지원할 것을 기대했다. 결사대는 1939년 여름까지 옌시산의 지원을 받고 총 4개의 기동대로 증강되었으며 약 5만 명의 회원이 50개 그룹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정작 공산군은 마오쩌둥의 "일본군과 대결하지 말고 손실을 최소화하라."는 지령에 따라 항일 작전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고, 옌시산과 산시성의 국민혁명군은 이러한 공산군의 행태에 분노했다. 결국 1939년 11월 말, 양측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비화되었다.

3. 사변 경과

1939년 11월 26일, 국민당은 일본군에 대한 1939년 겨울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옌시산의 제2군이 이 공세의 주공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11월 28일, 결사대의 2종대와 4종대가 제2군의 10종대와 총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결사대의 4종대가 괴멸되었고 2종대는 전멸했으며 제2군 10종대의 제1영과 제3영 역시 큰 손실을 입었다.

1939년 12월 1일, 옌시산은 겨울 공세에 착수해 12월 5일 링스(靈石)와 곽현(霍縣) 구간의 철도를 끊기 위해 결사대의 제2 종대를 투입시킴과 동시에 진시군에게 에비대로서 결사대의 후방에서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결사대와 진시군 간의 2번째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옌시산은 결사대 제2 종대가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이며 국민혁명군 장교를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진시군 제19 연대와 제61 연대를 투입해 이들을 포위하게 했다. 결사대 제2 종대의 정치위원이었던 한쥔(韓鈞)은 12월 7일 습현(隰縣) 의당진(義棠鎮)에서 옌시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총좌(總座) 백천(百川, 옌시산의 자) 선생께:

제61연대는 우리를 너무 괴롭히고 있으며 이는 반역행위입니다. 만여 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2종대는 총좌에게 대승리를 바치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12월 12일까지 임무를 완수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다음달 하반기 동안, 우리는 두려움 없이 승리를 보고할 것입니다. 외지에 나간 장군은 군주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이 학생 보고서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승리의 결과를 지켜봐주십시오.

학생 한쥔 올림.

전보를 받은 직후, 옌시산은 즉시 수석 간부회의를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의 전보는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사령관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학생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그가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12월 12일까지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우리에게 예속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쥔은 반역자다!

이후 옌시산은 한쥔이 "반역"을 꾀했으며 그를 격퇴하기 위해 국가의 동력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진시사변이 발발한 후, 옌시산은 동맹회의 모든 직원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했다.
수이동(綏東) 전투 이후, 나는 국가적 저항운동의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이는 모든 동지들이 힘을 합쳐 이른 성과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 조직에 숨겨진 반역자들로 인해 군대가 조종되어 반란을 일으키면서 진시 사건이 발생했다. 여러곳에서의 민주적 운동의 작업은 지연되었고 지역 동지들은 배신자들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갔거나 강요를 받고 있다. 군대는 혼란에 빠졌으며 적은 현재도 위협을 가하고 있다. 슬프도다! 현 상황엔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내 모든 동지들에게 진실을 밝히겠다.

1. 진시 사건이 발생한 후, 나는 시멍 사람들이 발급한 모든 문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들이 자신의 위장을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동맹을 희생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멍 연합 내에서는 항상 다양한 음모와 정치적 술수가 횅횅했다. 나는 항일 전쟁을 위해 서문회를 세웠고 전쟁의 긴급한 필요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젊은 간부를 기용했다. 나는 국민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위장 요소가 국익에 관계없이 사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내부에 스며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국가적 관점에서 벗어나 조직을 분열시키는 이러한 행위..... 이것은 나에게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게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며 모든 동지들은 이 점을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2. 사건 초기, 이 소수 공모자들에게 조작된 유일한 진실은 산시가 이미 부분적으로 적에게 항복하고 타협했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분열분자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모든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여전히 적과 싸우고 있음이 밝혀졌다. 전쟁을 위험에 빠뜨리고 분열을 일으키는 모든 음모는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공모자의 기만적인 선전은 절대 진실을 모호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3. 사건이 발생한 후, 동지 대부분이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나는 시멍 연맹의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고수할 것이다. 적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단합은 우리나라의 기본 정신이다. 오늘날의 불행은 소수파의 배신에 기인한다. 모든 동지들은 옳고 그름을 인식해야 한다. 무지한 자의 헛소리에 흔들리지 말라. 우리는 과거의 투철한 정신으로 우리의 입지를 강화하고 갓발 아래 서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나는 지역 군대와 정치 당국에게 진실이 실현된 후에 돌아온 동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모든 동지들이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혼돈에서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지고 유혹에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후 결사대 제2종대는 사력을 다해 대항했으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진시군은 뒤이어 용허군, 단녕군, 사문회 연합 등 여섯개 구역의 공산정부를 무너뜨리고 결사대를 향한 공세를 지속했다. 또한 그들은 수백명의 현지 간부와 중국 공산당원들을 납치, 살해했다. 이에 보이보는 옌시산에게 맞서기로 결정하고 포위된 결사대를 지원하기 위해 3개의 주력군을 투입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옌시산의 반일 입장을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옌시산 휘하 장군들이 제멋대로 공산당 간부를 살해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한편 결사대는 진시군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12월 6일, 진남 남서 비행 중대는 "옹염항일토역총지휘부(擁閻抗日討逆總指揮部)"를 설립했고 장문앙(張文昂)이 최고 사령관을 맡았다. 한쥔은 모든 남서부 결사대에게 자율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했다. 12월 9일, 결사대는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주공은 양 길로 나뉘어져 일군은 습현(隰縣)으로, 또다른 군은 스뤼현(石樓縣), 융허현(永和縣)으로 진군한 후 습현 오성진(午城鎮)에서 합류해 다닝현(大寧縣) 포현으로 진격했다. 12월 14일, 천창제(陳長捷)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이들을 제압하러 진군했지만 그날 밤 진시군에서 이탈한 115사단에게 야습을 당해 격파되고 말았다.

그후 12월 21일, 결사대의 주력군과 진시군에서 이탈한 제115사단은 효의현(孝義縣) 수두진(水頭鎮)의 진시군 19연대를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12월 23일, 옌시산의 군대가 산시 남서 일대를 포위해 결사대와 진시군의 이탈자들을 섬멸시키려 하자, 결사대와 이탈 부대는 현장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철수했다. 이후 남서부 산시 일대는 진시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다.

4. 중국 국민당의 주장

1936년 가을, 옌시산은 여러 단체들을 연합시켜 일본군에 대항하고자 민족 구국협회를 조직해 게릴라전을 전개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원들이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공산당은 산시성의 105개 지역 중 60개 지역에서 국민당의 치안판사를 대신해 사법부를 장악했으며 해당 지역의 간부들 중 상당수가 공산당 소속이었다. 이후 그들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를 "신군(新軍)"이라 일컫고 옌시산이 이끄는 진시군을 "구군(舊軍)"이라고 불렀으며, 구군이 일본군이 저항하지 않는다는 선전 활동을 전개해 양측간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1939년 3월, 옌시산은 구군과 신군간의 내부장벽을 억제하기 위해 신군을 구군 내부에 편입시켰다. 그후 11월 26일 국민당이 겨울 공세를 단행했을 때 옌시산의 제2군이 주공을 맡았다. 11월 28일, 한쥔이 이끄는 결사대 제2 종대가 구군 장교들과 가족들을 공개적으로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한쥔은 12월 7일에 전기를 끊었으며 보이보, 장문앙 등이 이끄는 결사대가 여기에 가담했다. 이후 반란군은 서로 긴밀히 협조하면서 반란 행위를 지속했다.

이에 옌시산은 한쥔이 반역을 꾀했음을 알리고 동맹회의 모든 직원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후 그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반란 분자들을 단호하게 분쇄하고 산시성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5. 중국 공산당의 주장

옌시산은 산시성에서 중국 공산군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자 이를 경계했다. 그러던 1938년 2월 일본군이 산시성을 침략하자, 엔시산은 후바으로 후퇴했고 팔로군과 신군, 진시군은 일본군에 맞서 항전했다. 일본군은 주요 교통 노선과 중소 도시를 장악했고, 항일 군대는 산악 지역을 장악했다. 또한 진차지 국경 지역은 중국 공산당이 주도했다.

1938년 8월, 옌시산은 진시현의 지식인들과 회담을 벌이면서 구군이 신군에 대항해야 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후 1939년 1월 충칭에서 열린 제5차 전국민총회 본회의에서, 공산당을 제한하는 정책이 결정되었고, 비밀리에 "다른 당을 예방하고통제하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1939년 3월 25일부터 4월 22일까지, 옌시산은 산시성 치우린진(秋林鎮)에서 간부회의를 열었다. 그는 구군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한이 무너지면서 저항운동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제2차 세계대전은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팔로군 만이 강력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한 그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으니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묘한 말을 남기며 신군의 정치 위임제도를 취소하는 안건을 제시하고 공무원이 사령관 직을 겸직해 군사권을 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안건은 결사대의 분대장 보이보와 장문앙 등의 반대에 부딪쳤다. 또한 옌시산은 신군을 구군에 편입시키고 공산당 정치위원회를 취소하고 많은 진보적 법률과 규정을 폐지했다. 이후 결사대는 옌시산의 "통합 계획"에 따라 국민혁명군의 통제를 철저하게 준수해야 했다.

1939년 5월 말, 옌시산은 보이보에게 "공산당은 군사적 입장을 제시할 수 없다. 오직 장제스 총통의 결정만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보이보가 "결사대는 전적으로 공산당이 통제하고 있다. 정치위원회가 폐지되더라도 나는 산시로 돌아가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동의했다.

타이위안으로 돌아온 보이보는 즉시 옌시산과의 회담 내용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북부국에 보고했고 대책을 제안했다. 1939년 8월 6일, 북부국은 "산시성의 연합정선을 통합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9월 21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산서의 역류에 관한 투쟁 지침"을 발표한 후 산서성위원회의 이름으로 "위험한 경향을 극복하기위한 항일 전쟁 준수 선언"을 발표했다.

1939년 6월, 보이보는 산시성 친위안현(沁源縣) 활봉촌(活鳳村)에서 간부회의를 열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현재의위기를 극복하고 항일 전쟁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방안을 논의한 뒤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적에게 타협하거나 항복하는 것은 위험하며 산시성 주민들은 공산당에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조직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지배하며 항일 전쟁을 착실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9 년 하반기, 신군의 기동이 모두 준비되었다. 예를 들어 군대에 남아있는 100여 명의 공산군 장교들은 항일 군사 및 정치대학 지부로 보내질 에정이었다. 이 장교들의 직책은 장치 간부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옌시산은 이러한 신군의 준비를 산시성의 군대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오해했고 결국 1939년 11월 28일에 신군에게 반역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잔혹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6. 양측의 화해

장제스는 옌시산과 공산군 간의 갑작스런 무력 충돌에 경악했다. 그는 즉각 옌시산과 중공 간의 중재를 맡았다. 한편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신군을 공격하고 공산 간부를 살해한 옌시산을 비난하면서도 산시성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2월 11일 옌시산에게 보내는 서신의 초안을 작성했다.
염 장관께

지난 3개월 동안 산시성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적은 박수를 보내고 있으며 전황은 극도로 괴로워지고 있습니다. 어찌 대합과 새가 서로 싸우다가 어부에게 잡혀버리는 꼴을 피하지 않으십니까? 이 어부는 일본 제국주의이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군과 구군을 자극하여 두 군대를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먼저 사라지면, 남은 군대는 고립되어 갇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구군 또한 이익이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두 군대를 조화시키고 힘을 모아 일본에 저항하는 것이 매우 적절합니다. 이번에 두 군대가 서로 충돌했지만, 신군은 자기 방어였을 뿐이며 구군에 대한 편견이 없습니다. (후략)

마오쩌둥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번 전보는 어떠한 조건도 언급하지 않고 두 군대의 단결만을 언급하므로, 양측이 좋은 방향의 합의를 이룰 수 있다. 샤오진광(萧劲光)이 저들과 협상하게 하라. (중략) 그들이 타협에 동의한다면, 신군의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단결 선언을 발표하라. 또한 산시성의 신군은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호를 발표해야 한다.
1.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자.
2. 구군과 신군은 연합하여 일본과 항쟁한다.
3. 신군은 구군과 싸우지 말고 구군도 신군과 싸우지 말자.
4. 총기를 외부로 돌리고, 전투를 중단하자.
이 슬로건은 구군과 가까운 장소에서 작성해야 한다.

2월 25일, 샤오진광과 왕뤄페이(王若飛) 등은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어 옌시산을 찾아갔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일본에 대항하는 국민혁명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뜻을 보였다고 말하며 신군은 여전히 옌시산의 지휘를 받을 것이라고 알렸다. 이후 두 사람은 엔시산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안했다.
1. 양측은 군사 작전을 중단한다.
2. 양측은 정치적 공격을 중단한다.
3. 신군은 지원을 표명하되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4. 양측은 서로를 처벌하지 않으며 서로를 위반하지 않는다.
5. 우리는 앞으로 힘을 합쳐 10번째 개요를 실현한다.
6. 신군은 라디오 및 인사 교류를 다시 연결한다.

옌시산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1. 신군이 진시군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 소원이지만 중앙 정부에 문제가 넘겨졌다고 말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더이상 신군이 진시군에 소속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2. 군대는 군사작전과 정치적 공격을 중단할 것이다. 한쥔이 일본군에게 공격당하면, 우리는 한쥔을 도울 것이다.
3. 신군 라디오와 빛번하게 접촉할 것이며 이 교류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4. 미래에는 주의를 기울여 화합을 추구하라.

또한 옌시산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공산당과 국민당의 중개자이며 자신의 존재가 화합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진시 선로를 복구하기 위해 공산당이 제안한 조건에 동의했지만 선로에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후 양 당사자는 1940년 4월 초에 합의에 도달했고, 진시사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7. 그 후의 이야기

진시사변 이후에도 양측은 협력과 투쟁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사건의 발발에 책임이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믿었다. 공산당과 옌시산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후인 1944년 7월 21일과 22일, 엔시산은 <서경일보>에 1939년 겨울에 일본에 대한 공세를 준비했을 때 신군의 한쥔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진차지 군사지역의 정치위원 펑전은 이 소식을 전달받고 심포지엄을 개최해 옌시산의 주장을 반박하며 "옌시산의 배신으로 산시성의 항일 투쟁이 어그러졌다."고 주장했다.

한편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옌시산의 주장을 대체로 수용했다. 그러나 대만의 내셔널 이브닝 뉴스는 옌시산 사망 후 "옌시산이 국가 장례식에 적합할까?"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으며 옌시산이 국민혁명군에 포섭할 수도 있었던 신군을 토벌하려 한 결과 그들이 공산당으로 가버려 진차지 지역의 주력군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했다.

8.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