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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미 페이지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이다.2.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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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모습 |
어렸을 때 성격은 내성적이면서도 재치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외동아들로 자란 게 조금 영향을 미친 모양.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로큰롤 열풍이 불자 어린 지미 페이지 역시 로큰롤에 빠져들었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Baby Let's Play House란 곡에 매료돼서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동네 친구, 형들이 하던 스키플 밴드에 들어갔고 13~4살경이던 1957~8년엔[2] BBC의 Huw Wheldon's All Your Own talent라는 일반인 장기자랑 프로에 밴드와 함께 출연까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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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 세션맨 시절과 야드버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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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맨 시절의 모습 |
1963년경부터 다시 음악계로 뛰어 들어 전문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64~5년경엔 영국에서 가장 바쁜 세션맨이 되어 있었다. 당시엔 록 밴드 결성 붐이 대대적으로 일때여서 웬만큼 실력 있는 뮤지션은 죄다 밴드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세션기타리스트 중에선 단연 뛰어났다고 한다. 이 시기에 빅 짐 설리반[4]과 지미 페이지 둘이서 런던의 각종 세션 녹음마다 가장 많이 불려다니는 양대 세션 기타리스트였다. 지미 페이지가 세션맨으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하도 많이 연주했기 때문에 이 시기(1964~5)에 영국에서 녹음된 세션 기타 연주 중 몇 십%를 지미 페이지가 연주한 것이라는 좀 과장된 풍문들도 들었다고 한다.[5] 007 골드핑거의 주제곡인 "Gold Finger"나 킹크스, 롤링 스톤스, 더 후의 녹음에도 참여했으며, 심지어는 오케스트라의 녹음에도 기타 세션맨으로 참여하였던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지미 페이지는 레드 제플린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런던 음악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지미 페이지는 악보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6] 록 음악과는 달리 악보가 중요한 오케스트라 녹음을 할 때는 눈치보다가 치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후에 펜더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1969년 즈음에는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당시 로큰롤뿐만 아니라 엘모어 제임스, 비비 킹, 오티스 러쉬, 프레디 킹, 머디 워터스 등의 블루스 음악과 포크 음악에도 심취하였다.[7] 그리고 더 후, 롤링 스톤스, 제프 벡, 에릭 클랩튼 등의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1966년에, 한국에선 소위 세계 3대 기타리스트[8]라고 알려진 인물들을 모두 배출하게 되는 역사적인 밴드인 야드버즈에 가입했다. 야드버즈의 1기 기타리스트였던 에릭 클랩튼이 밴드를 떠나고 지미 페이지가 후임 기타리스트로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제프 벡을 추천하여 제프 벡이 먼저 들어갔다. 이후 제프 벡의 요청으로 지미 페이지도 가입했고 리듬기타를 맡고 있던 크리스 드레야가 베이스에 익숙해질 때까지 처음엔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이후 제프 벡의 바람대로 같이 트윈 기타를 연주하게 되었다.
4. 전성기: 레드 제플린 시절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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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제플린 시절의 모습 |
1969년 1월 첫 레드 제플린의 앨범이 녹음되었다. 이때 재밌는 일화 중 하나가 있는데, 지미가 야드버즈 때의 동료였던 제프 벡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것이다. 제프 벡의 얘기로는 당시 본인이 만들던 앨범에 윌리 딕슨의 You Shook Me를 편곡하여 넣으려 했다고 한다. 그때 녹음 중에 지미 페이지가 방문하였고, 이걸 듣고는 자기도 레드 제플린의 앨범에서 이 곡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제프 벡은 페이지에게 전화로 울면서 항의 했다고 한다. 어쨌든 지미는 레드 제플린의 선장을 맡으며 레드 제플린을 세계 최고의 밴드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레드 제플린 시절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밴드의 리더로서 부와 명예를 축적했지만, 동시에 각종 사건 사고들도 일으키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 시절 지미 페이지는 친한 친구들인 키스 리처즈, 에릭 클랩튼과 함께 온갖 괴상한 마약들을 하면서 광란의 파티를 벌여 논란이 되기도 했고, 그루피들과 관련한 각종 논란들도 많았다.
이렇듯 약 10년 동안을 역대 최고의 밴드의 리더로 보내다가 동료의 요절이라는 봉변을 맞게 된다. 1980년 9월 25일 지미 페이지의 집 '윈저'에서 종일 과음한 존 본햄이 자다가 구토를 해 구토물이 목을 막아 질식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날에서야 존 폴 존스가 숨을 쉬지 않는 존 본햄을 발견했다. 그 당시 흑마법에도 심취해 있던 지미 페이지는 동료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그의 시신 앞에서 흑마법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그러나 당연히 실패했고, 존 본햄은 32세의 나이로 동료들과 이승에서 이별하게 됐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얼마 뒤, 지미는 레드 제플린 해체 선언을 하면서 밴드가 해체되었다.
5. 이후의 솔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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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활동 시절의 모습 |
레드 제플린 당시의 하드 록 음악을 벗어나 컨트리 뮤직, 뉴 웨이브, 월드 뮤직, 포스트 펑크, 포크 음악 등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했던 로버트 플랜트에 비해 지미 페이지는 조금 더 정통한 블루스 록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상업적, 비평적으로도 모두 지미 페이지가 로버트 플랜트에 비해 확연히 밀린다. 정규 앨범 수도 4장밖에 안된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은 레드 제플린인지라 Coverdale-Page 앨범이 빌보드 5위, 로버트 플랜트와 함께한 라이브 앨범 No Quarter가 4위를 기록하는 등 꽤나 성공하기는 했다.
밴드 해체 후 애증이 엇갈리는 친구 제프 벡, 레드 제플린 시절의 동료 로버트 플랜트, 펑크(Funk) 기타의 전설 나일 로저스와 같이 허니 드리퍼스란 밴드를 조직해 "Sea of Love"라는 노래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또한 프리와 배드 컴퍼니의 보컬리스트 폴 로저스, 플랫리스 베이스의 달인 토니 프랭클린, 맨프레드맨, 유라이어 힙을 거친 드러머 크리스 슬레이드와 더 펌이란 밴드로 활약하기도 한다. 또한 데드 위시 등의 영화 음악도 맡는 다던가, 콜로세움의 보컬리스트 크리스 팔로우와 블루스 곡들을 협연하기도 하고, 딥 퍼플과 화이트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커버데일-페이지 를 결성하여,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의 콜라보라며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실제 앨범은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보컬이 입혀진 매우 레드 제플린스러운 음악이었다. 또 그리스에서 미국의 서던 록 밴드 블랙 크로우즈와 함께 레드 제플린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로버트 플랜트와 같이 활약하기를 바랬지만 로버트 플랜트의 거절로 계속 어긋나다가 마침내 94년에 의견이 맞아 드러머 마이클 리, 베이시스트 찰리 존스와 함께 '페이지 앤드 플랜트'를 결성해 같이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94년에는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로 중동과 인도의 신비주의가 물씬 풍기는 포크 앨범인 "No Quarter: Jimmy Page & Robert Plant Unledded", 98년엔 이전의 레드 제플린적 취향이 잔뜩 반영된 사이키델릭 블루스 지향의 앨범 "Walking into Clarksdale"을 발표하였다. "Walking into Clarksdale" 때의 프로듀서는 너바나의 In Utero 앨범을 프로듀싱한 인물로 유명한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로 이 두 앨범의 스타일을 비교해보며 듣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이후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에 관한 얘기가 많았지만 현재 들리는 얘기로 보면 쉽지 않은 모양이다.[10] 2018년에는 퀸의 전기 영화인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성공을 거두자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레드 제플린 전기 영화에 대한 떡밥을 뿌리기도 했다.
[1]
멀리 갈 것도 없이
비틀즈,
롤링 스톤즈,
더 후가 노동 계급 출신이고, 동 시대의
블랙 사바스도 노동 계급 출신이다.
[2]
자료 출처에 따라 58년이라는 설명도 있고 57년이라는 설명도 있다. 일단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1957년도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3]
지미 페이지가 이 사람의 세션 기타리스트 활동을 그만 두고 그 후임으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리치 블랙모어다. 원래 지미 페이지는 밴드를 그만 두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친구인
제프 벡을 추천했지만, 닐 크리스챤이 제프 벡의 성격이 까탈스러워 같이 작업하기 힘들다고 제프 벡을 거부했고, 리치 블랙모어를 영입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리치 블랙모어와 지미 페이지는 10대 시절부터 서로 면식이 있었고, 이 때 부터 이미 서로를 라이벌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다.
[4]
리치 블랙모어가 이 사람한테 기타를 배웠다. 빅 짐(Big Jim)은 그의 별명으로 지미 페이지는 리틀 짐(Little Jim)으로 불렸다.
[5]
당연히 어디까지나 소문이고 정확한 근거가 있는 얘기는 아니다.
[6]
지미 페이지 뿐 아니라 1960~70년대 대부분의 주요 록 뮤지션들이 악보 보는 법을 몰랐다. 애초에 당대의 록 음악인들은 작곡이든 연주든 악보를 이용해서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7]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에 흑인 음악을 크게 배척을 한 반면, 영국에선 보수적이긴 하지만 인종과 상관없이 이들의 음악을 크게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이들의 음악을 듣고자란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같은 밴드들이 탄생했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8]
참고로 이 "3대 기타리스트"라는 표현은 오직
한국에서만 유행했던 수식어이다.
[9]
무거운 레스폴이나 EDS-1275를 들고 연주할 때는 말 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텔레캐스터를 들고 연주할 때에도 기타를 드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10]
본햄이 죽고 해체를 발표할 때, 그가 없는 밴드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레드 제플린을 해체한다고 못을 박았었다. 단 하나의 가능성은 존의 아들 제이슨이 들어가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