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9:39:53

대통사

중동 석조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10px" <tablebordercolor=#008080> 파일:백제 군기.svg 성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 생애 | 관산성 전투
관련 장소 대통사
관련 문서 웅진회의 | 사비회의
}}}}}}}}} ||
파일:349527.jpg
<colbgcolor=#008080> 대통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반죽동 당간지주
파일:DSC00781.jpg
대통사의 유구를 도심형 공원으로 만든 대통사 쉼터

1. 개요2. 특징3. 역사
3.1. 대통교
4. 명칭5. 구조6. 유물
6.1.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6.2. 공주 반죽동 석조6.3. 공주 중동 석조
7. 여담8. 같이보기

1. 개요

백제의 성왕이 아버지 무령왕의 명복과 아들 위덕왕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1][2] 충청남도 공주시 반죽동 301번지에 세웠는데, 현재까지 한국에서 위치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이다.

2. 특징

백제 웅진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불상 조각이나 기와 조각, 당간지주나 석조 등의 정황 증거만 나왔을 뿐 건물지같이 제대로된 실체가 드러난 적은 없는 베일에 쌓인 유적이다.[3]

3. 역사

대통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삼국유사에 딱 한번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丁未)에는 양제(梁帝)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 웅천(熊川)은 곧 공주(公州)인데, 당시는 신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정미년은 아닌 것 같다. 곧 중대통(中大通) 원년 기유(己酉)(529년)년에 세운 것이다. 흥륜사를 처음 세우던 정미년(527년)에는 미처 다른 곳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제3권 흥법(興法) 제3편 원종흥법염촉멸신조
삼국유사는 대통사를 신라 법흥왕이 세웠다고 기록하는데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백제 성왕이 세운 사실이 후대에 잘못 전해졌다고 해석한다.

반죽동 당간지주가 통일신라 양식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남북국시대까지는 그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대통사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나말여초를 전후하여 폐사된 것이 유력하다.

3.1. 대통교

대통사 앞에 있었다고 해서 대통교라고 이름붙여진 다리가 공주시에 있었는데 1935년에 시멘트로 준공되어 지금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 다리로 추정되는 기록이 하나 남아있다.
20년(498)에 웅진교(熊津橋)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4권 동성왕편
이 웅진교가 무엇이냐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데 공주시 제민천에 위치한 다리였을 경우 웅진교는 대통사 앞에 있었던 대통교와 동일한 다리가 된다. 이 경우 다리가 절보다 먼저 세워지고 이후 절이 세워지며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KC_DSC_7618.jpg
<colbgcolor=#008080> 반죽동 대통교 초석
대통교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밝혀진 몇 안되는 백제의 다리로서 그 가치가 높으나 일제시대 때 해체되어 지금은 부재 일부만이 반죽동 당간지주 옆에 놓여있다.

4. 명칭

대통사 명칭의 의미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첫번째로, 백제 성왕이 대통불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찰이라 절의 명칭도 대통사라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참고로 여기서의 대통불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을 상징한다.

두번째로, 양무제를 위하여 건립한 사찰이라 그의 연호인 '대통(大通)'을 따서 사찰명을 대통사라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한다.

세번째로, 불교계에서 간혹 나오는 의견인데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대통지승여래의 이름을 따서 불국정토를 꿈꾸던 백제인들이 올린 이름이라는 의견도 있다.

네번째로, 조경철 교수는 『법화경』의 전륜성왕-대통불-석가모니로 이어지는 계보상의 대통불을 모시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백제 왕실을 석가와 가계와 일치시켜 성족관념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았다.

5. 구조

아직까지 절의 극히 일부분만 발굴로 드러났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정확한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양식인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될 뿐이다.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대통사의 석조 2개가 아직 남아있어 대통사의 금당 양 옆에 석조가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석조는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6. 유물

6.1.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49호 150호 151호
공주 반죽동 석조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제150호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公州 班竹洞 幢竿支柱
Flagpole Supports in Banjuk-dong, Gongju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반죽동 302-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당간
수량 1기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백제
위치
}}}}}}}}} ||
파일:MG0A4414_resize.jpeg.jpg
<colbgcolor=#008080> 보물 제150호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6.2. 공주 반죽동 석조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48호 149호 150호
공주 중동 석조 공주 반죽동 석조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제149호
공주 반죽동 석조
公州 班竹洞 石槽
Stone Basin in Banjuk-dong, Gongju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동)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기타
수량 1개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백제
위치
}}}}}}}}} ||
파일:공주반죽동석조.jpg
<colbgcolor=#008080> 보물 제149호 공주 반죽동 석조 [4]

6.3. 공주 중동 석조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47호 148호 149호
밀양 영남루 공주 중동 석조 공주 반죽동 석조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제148호
공주 중동 석조
公州 中洞 石槽
Stone Basin in Jung-dong, Gongju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동)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기타
수량 1개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백제
위치
}}}}}}}}} ||
파일:공주_중동_석조.jpg
<colbgcolor=#008080> 보물 제148호 공주 중동 석조

7. 여담

유적 전체가 공주 도심 밑에 깔려있어 풍납토성만큼 발굴조사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대통사지 전체를 발굴하려면 아마 보상부터 시작하여 수십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8. 같이보기


[1] 중국 양무제를 위해 창건했다고도 전한다. [2] 전륜선왕-석가모니 가계를 모심으로서 백제 왕가를 석가 일족과 동일시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출처: 조경철 ( Gyung Cheoul Jo ). "특집 : 한국 고대 동아시아 사상의 교류 ; 백제 불교의 중국 영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 韓國思想史學 0.36 (2010): 51-78. [3] 일단 대강의 위치는 추정이 되는데 그 위에 전부 건물이 들어서있어 제대로된 조사가 어렵다 [4] 참고로 위 사진은 배경으로 보아 국립공주박물관이 웅진동으로 이전하기 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