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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2:42:27

웅진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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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웅진회의 | 사비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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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과 영향3. 여담4. 관련 문서

1. 개요

熊津會議
반파국 안라국 가야 연맹의 제국(諸國)들과 백제 사이에 있었던 외교적 회의. '웅진(熊津)'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 백제 수도였던 웅진성에서 열린 웅진백제와 가야 연맹 사이의 회담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 배경과 영향

일본서기에 이 회담이 언급되는데, 당시 삼국시대 후기인 6세기 가야의 주변국들인 신라 백제는 가야 일대를 점령하려 했으며[1] 가야 내의 소국들도 친신라파와 친백제파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때 안라국은 권위를 잃어가던 반파국을 대신해 가야를 외세의 침입 및 개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여러 회의를 개최했는데, 웅진회의도 그중 하나로 이미 이전에도 안라회의가 있었고, 훗날 사비회의로도 이어지게 된다.

다만 안라국의 주도로 열리긴 했어도 엄연히 회의장소가 백제였기에 가야에 불리한 점도 있었다. 게다가 백제는 가야의 여러 소국들에 백제의 패권을 확장하려 했기에 가야는 이에 싫증을 느껴 되레 고구려 신라 등과 친하게 지낼 궁리도 한다. 그러나 이조차 딱히 이뤄지지 않아서 결국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맺게 된다.[2]

3. 여담

고고학적 발굴로 입증된 안라회의, 두 차례나 있었던 사비회의와 달리 웅진회의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없어서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4. 관련 문서



[1] 한동안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위험을 느낀 백제와 가야가 동맹을 맺어 신라와 고구려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섬진강 유역을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대립하는 등 영토분쟁이 있기도 했다. [2] 가야 입장에서는 백제도 불만의 대상이었지만 신라는 안보적으로 더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고,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서로 접해있지도 않았다. 결국 주변국으로서 가야 입장에서는 그래도 신라보단 나은 백제를 (좋든 싫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