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드 베레 John de Ve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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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408년 4월 23일 ~ 1462년 2월 26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브레인트리 캐슬 헤딩엄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아버지 | 리처드 드 베레 | |
어머니 | 앨리스 세르주 | |
형제 | 로버트, 리처드 | |
아내 | 엘리자베스 하워드 | |
자녀 | 오브리, 존, 조지, 리처드, 토머스, 메리, 조앤, 엘리자베스 | |
직위 | 옥스퍼드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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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제12대 옥스퍼드 백작.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과 대적했고,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다가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처형되었다.2. 생애
1408년 4월 23일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브레인트리 캐슬 헤딩엄에서 제11대 옥스퍼드 백작 리처드 드 베레와 콘월 콜키트의 기사 리처드 세르주의 딸인 앨리스 세르주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로버트, 리처드[1]가 있었다. 1417년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옥스퍼드 백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젊은 백작과 그의 땅에 대한 후견권은 먼저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가 행사했고, 1426년 엑서터 공작이 사망한 후에는 베드퍼드 공작 존이 행사했다.1425년 기사 존 하워드의 딸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의 할아버지인 위겐홀의 존 하워드가 1436년에 사망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노퍽, 서퍽, 에식스 및 캠브리지셔의 땅을 물려받았고, 이에 따라 그의 연간 수입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는 왕실의 허락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결혼했다. 그는 엑서터 공작의 조언에 따라 결혼을 진행했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당하고 2,000파운드에 달하는 벌금을 내야 했다.
1426년 5월 26일 레스터에서 형제 로버트와 4살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를 포함해 34명의 젊은 귀족들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429년 7월 4일에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인수했다. 1431년 추밀원의 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430년대와 1440년대에 이스트 앵글리아의 지역 정치에 참여해 다양한 위원회에 봉사했고, 서퍽과 캠브리지셔에서 순회 판사로 활동했다. 1435년 2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그가 순례를 떠났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436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구원하기 위한 1만 원정대를 이끈 랭커스터의 험프리 휘하 부관을 맡았고, 1437년 7월 23일 캔터베리에서 열린 헨리 4세의 왕비 나바라의 조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439년 6월 헨리 보퍼트 추기경과 함께 프랑스와 평화 협상을 위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441년 5월 16일 노르망디 총독으로 임명된 요크의 리처드와 함께 포츠머스에서 프랑스로 항해했고, 리처드의 지휘하에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 1450년 6월 켄트에서 반란자 잭 케이드의 추종자들과 싸우도록 선임된 귀족들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잉글랜드 정계에서 요크의 리처드와 2대 서퍽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간의 정쟁이 심해질 때, 그는 쉽사리 어느 편에 들어가지 않았다. 1453년 요크의 리처드가 정신병에 걸린 헨리 6세의 섭정이 되었을 때 섭정 위원회의 일원으로 발탁되었지만, 장미 전쟁으로 알려진 내전이 발발했을 때도 중립을 유지했다. 1455년 5월 22일 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는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러 갔으나 일부러 행군을 지연해 전투 자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9년 헨리 6세의 왕비이며 랭커스터파의 지도자 노릇을 한 앙주의 마르그리트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1459년 12월과 1460년 4월에 요크파의 전횡을 조사 및 심판한 에식스의 사법 위원회를 이끌었다.
1460년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요크의 리처드가 승리를 거두자, 그는 중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그는 "허약함으로 인해" 왕 앞에 서거나 의회에 출석하는 것이 면제되었다. 계속 정치에 참여했다간 위험해질 것을 우려해 질병을 가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462년 2월 권좌에 오른 에드워드 4세는 그를 장남 오브리, 측근 토머스 터든햄, 다른 2명의 기사와 함께 앙주의 마르그리트에게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그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1462년 2월 26일, 존 드 베레는 런던 탑에서 처형되었고 런던의 오스틴프라이어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하워드: 기사 존 하워드의 딸.
- 오브리 드 베레(? ~ 1462):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뒤 2월 26일 또는 그 전에 런던 탑에서 처형되었다.
- 존 드 베레(1442 ~ 1513): 제13대 옥스퍼드 백작. 랭커스터파에 가담해 요크파와 오래도록 항전했으나 끝내 에드워드 4세에게 제압된 뒤 칼레 인근의 암메 요새에 투옥되었고 직위와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후 암메 요새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뒤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헨리 튜더에 가담했고, 1485년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로 건너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와 대적할 때 경험없는 헨리 튜더 대신 실질적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헨리 튜더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헨리 7세로 즉위한 뒤 모든 직위와 재산을 돌려받고 잉글랜드 대제독, 트렌트 강 남쪽 랭커스터 공국의 대청지기, 런던 탑 순경에 선임되었으며, 헨리 7세의 장남 아서 튜더의 대부가 되었다. 이후 요크파 잔당 토벌에 앞장섰으며, 헨리 8세의 대관식에 대시종관으로서 참석했고, 헨리 8세의 치세 초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조지 드 베레: 헤리퍼드셔의 프롬 출신 기사 윌리엄 스태퍼드의 딸이자 상속녀인 마가렛 스태퍼드의 남편. 제14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의 아버지.
- 리처드 드 베레: 3대 코드너의 그레이 남작 헨리 퍼시의 미망인인 마가렛의 남편.
- 토머스 드 베레: 기사.
- 메리 드 베레: 바킹 수도원의 수녀.
- 조앤 드 베레: 랭커스터 왕조를 추종해 헨리 7세 등극에 크게 기여한 저명한 기사 윌리엄 노리스의 부인.
- 엘리자베스 드 베레: 초대 에식스 백작 헨리 부르시에의 장남이자 부르시에 자작 윌리엄 부르시에의 부인.
[1]
기사. 6대 하틸의 그레이 남작 헨리 퍼시의 딸 마가렛 퍼시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