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상원의원 (미주리 주 클래스 1) | ||||
제83~94대 스튜어트 시밍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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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103대 존 댄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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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106대 존 애쉬크로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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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주니어 |
제2대 워런 오스틴 |
제3대 헨리 캐벗 로지 |
제4대 제리 워즈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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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애들레이 E. 스티븐슨 |
제6대 아서 골드버그 |
제7대 조지 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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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제임스 러셀 위긴스 |
제9대 찰스 W. 요스트 |
제10대 조지 H. W. 부시 |
제11대 존 A. 스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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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존 A. 스컬리 |
제12대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
제13대 윌리엄 스크랜턴 |
제14대 앤드루 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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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도널드 맥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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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토머스 R. 피커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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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에드워드 J. 퍼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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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존 네그로폰티 |
제24대 존 댄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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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잘마이 카질라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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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수전 라이스 |
제28대 서맨사 파워 |
제29대 니키 헤일리 |
제30대 켈리 크래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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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
미합중국 제94-103대 연방 상원의원 | |
<colbgcolor=#0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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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9월 5일 ([age(1936-09-05)]세) |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 |
재임기간 | |
제24대 UN주재 미국 대사 | |
2004년 7월 23일 ~ 2005년 1월 20일 | |
연방상원의원(미주리 클래스 1) | |
1976년 12월 27일 ~ 1995년 1월 3일 | |
제37대 미주리 주 법무장관 | |
1969년 1월 13일 ~ 1976년 12월 27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
가족 |
배우자 샐리 돕슨 (
1957년 결혼) 슬하 5명 |
종교 | 성공회 |
학력 |
프린스턴 대학교 (
B.A.) 예일 대학교 (J.D./M.Div) |
서명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외교관, 미주리주 연방상원의원과 유엔 주재 미국 대사직을 역임했다.2. 생애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 로스쿨,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3년 뉴욕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8년에는 미주리로 돌아와 공화당 소속으로 주 법무장관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70년에는 연방상원의원에 도전하지만 현직 민주당 상원의원인 스튜어트 시밍턴(Stuart Symington)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2년 후인 1972년에는 법무장관 재선에 성공했다.[1] 그의 법무장관 시절 수하에는 키트 본드(Kit Bond)[2], 존 애쉬크로프트[3], 클래런스 토머스[4]가 있었다.1976년 스튜어트 시밍턴이 은퇴하자 상원의원에 재도전했다. 미주리가 당시 민주당 세력이 강했고 민주당 후보였던 제리 리튼(Jerry Litton)도 주민들에게 인기가 좋았기에 댄포스의 당선 확률은 높지 않았다.[5] 그러나 제리 리튼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6]하고 미주리주 민주당이 어쩔 수 없이 인기가 덜하던 인물을 대체 후보로 올리자 상황이 바뀌었다. # 민주당이 내홍을 수습하지 못하는 동안 댄포스는 법무장관 경력을 이용한 포지티브 선거운동을 했고 14%p 차이를 내며 크게 승리한다. 1982년, 1988년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해 총 18년간 상원에서 임기를 보낸다. 상원에서 댄포스는 공화당 중도파, 타협파에 속했고 공화당,민주당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낙태 제한과 클래런스 토머스의 대법관 인준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 상원의원 임기를 마친 뒤에는 재닛 리노의 요청으로 웨이코 포위전 조사를 위한 특별검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타협적 성향과 스윙 스테이트[7] 미주리주에서의 광범위한 인맥 덕분에 1988년 미국 대선과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었다. 특히 2000년 대선에서는 조지 W. 부시가 딕 체니와 댄포스 중 누굴 부통령 후보로 고를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 결국 부시의 러닝메이트는 체니가 되었지만 부시 행정부에서 수단 특사로 임명되어 수단 정부에 대한 제재와 수단 내전 평화 협정을 위해 노력했다. 2004년에는 주 UN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기여로 2005년 1월 9일 수단군과 SPLA는 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하지만 반 년만에 대사직을 사임했다. # 명목상의 사임 사유는 아내의 건강 때문이었으나 정권이 교체되지도 않았음에도 지나치게 빨리 사임했기에 UN,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불만이 있었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조시 홀리의 정계 입문, 상원의원 출마를 후원했지만 그가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때 보인 행보 때문에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 2022년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친트럼프 성향 공화당 후보 에릭 슈미트 지지를 거부하고 무소속 후보 존 우드[8]를 지지,지원했다. # 공화당 원로 정치인답게 도널드 트럼프의 부정선거 음모론에도 확고히 반대하고 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1968 | 미국 법무장관 선거 | 미주리 |
|
891,498 (52.11%) | 당선 (1위) | 초선 |
197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17,903 (48.15%) | 낙선 (2위) | |||
1972 | 미국 법무장관 선거 | 1,146,926 (62.54%) | 당선 (1위) | 재선 | ||
197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090,067 (56.94%) | 초선 | |||
198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784,876 (50.85%) | 재선 | |||
198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407,416 (67.70%) | 3선 |
4. 여담
[1]
미국은 대부분의 공직에 출마할 때 현직을 사퇴할 필요가 없다.
[2]
이후 미주리 주지사, 연방상원의원
[3]
이후 미주리 주지사, 연방상원의원, 미국 법무장관
[4]
이후 연방대법관
[5]
동시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미주리주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지미 카터에게 3.5%p 차이로 패했고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현직 주지사 키트 본드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 조지프 티즈데일(Joseph Teasdale)에게 0.6%p 차이로 패했다. 리튼의 사망이 없었다면 댄포스도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6]
경선 승리 당일 지지자들과의 축하 파티를 위해 처자식을 동반하고 캔자스시티로 가던 중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7]
1904년부터 2004년까지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 미주리에서 이긴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2008년 대선 이후로는 레드 스테이트로 여겨진다.
[8]
비트럼프 공화당원이었고 선거 중 저조한 지지율 때문에 후보에서 중도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