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조승호(趙升琥) |
자 / 호 | 성운(聖雲) / 소정(小亭) |
본관 | 순창 조씨[1] |
출생 | 1894년 2월 11일[2] |
경상도
문경현 신북면 고요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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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1년 5월 31일[3] |
경기도 양주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40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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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4년 2월 11일 경상도 문경현 신북면 고요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에서 아버지 조원희(趙元曦, 1874. 6. 9 ~ 1947. 12. 14)[4]와 어머니 안동 권씨(1872. 7. 19 ~ 1943. 2. 29)[5]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창성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115번지[6]에 거주했다.그는 1919년 경기도 수원군에서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시위 탄압에 총상을 입고 경기도 경성부로 피신했다. 이후 계속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윤인중(尹寅重)·송황규(宋黃奎)·홍인표(洪仁杓)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그러한 요지의 호소문 및 각종 선전물을 작성해 경성부 일대에 배포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도 겸해서 활동했다.
이후 1920년 4월에는 윤인중·홍인표 등과 함께 충청남도 대전군· 논산군· 공주군· 전라북도 전주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3,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영진(金永津)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 내역은 곧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고, 끝내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공갈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에 불복, 공소했으나 1921년 3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81년 5월 21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별세했다. 이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6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