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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0 17:05:33

제임스 하우스만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
James Harry Hausman
파일:제임스 하우스만.png
▲ 말년의 모습
<colbgcolor=#000><colcolor=#ffffff>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18년 2월 28일
사망 1996년 10월 5일 (향년 78세)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34년 ~ 1968년
최종 계급 중령 ( 미합중국 육군)
참전 여순 사건
6.25 전쟁

1. 개요2. 생애
2.1. 이승만 관련2.2. 박정희 관련
3.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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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합중국의 군인이며, 미국 중앙정보국 CIA 소속 정보장교. 주한미군사고문단 참모장, 중앙정보국(CIA) 한국 책임자(미국 육군 방첩대 CIC 한국 책임자), 미8군사령관 특별고문, 주한유엔군총사령관 특별고문직 등 여러 직위를 역임하였다.

한국군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군의 아버지'로 칭하였으며, 194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사건들에 관련된 인물이다. 그 중요성에 비하여 CIA 정보장교라서 더글라스 맥아더 존 하지 군정 사령관에 비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2. 생애

하우스만은 1918년 미국 뉴저지주 러니미드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형의 이름을 빌려서 군대에 지원해서 제임스 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40년 하사,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하였으며, 6개월만에 대위까지 초고속 진급하였다. 1944년 3월에 75사단으로 발령받았고, 벌지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1946년 7월 26일 한국에 파견되어서, 미 육군 대위로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을 지원하였다. 광복군 출신 장교 대신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우대하였다. 춘천 8연대 창설연대장으로 1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8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켰으며, 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 대령의 보좌관을 하였는데, 조선국방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 되었고, 미군정청 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고문관으로 승진하였다.

베로스 대령이 제주로 발령된 후로는 사실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하였다. 하우스만은 김완룡, 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서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여 한국군 건군에 관여하였다. 1949년 7월 1일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참모장으로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하였다. 이승만과 자주 면담하였으며 경무대에서 자주 드나들었다. 1949년 9월에는 숙군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김종석의 총살 장면을 녹화해 이를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로 삼았다.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 반란이 일어나자,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으로 진압 작전을 사실상 지휘하였으며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진압한 공로로 미국공로훈장을 수훈받았다.

1950년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하였고, 1951년 미국 국방정보국(DIA) 에 전근하여 한국담당 정보과장을 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미군 군사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3월에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3월 1일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감지하고 보고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와 만나서 면담하고 미국에 가서 브리핑하였다. 1968년에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였으며, 다시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이 되어서 정년을 맞은 1981년 7월 1일까지 한국에 군사고문으로 머물렀다. 1996년 10월 7일 사망하였다. #

1997년 1월 15일 백선엽, 김일환, 유재흥, 민기식, 임선하, 이용(1923), 류병현, 김완용, 황헌친, 강영훈, 최영희(군인), 김점곤 )등 한국군 예비역 장성들과 한미 현역 군인들 1백여명이 모여 하우스만 추모예배를 가졌다. #

한국일보에서 정일화가 하우스만과 인터뷰한 증언록을 1990년 10월부터 1991년 6월까지 '한국 땅서 35년, 미군장교의 증언: 하우스만 회고록'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일보에 연재하였고, 이를 모아서 1995년 둘의 공저로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美軍대위 : 하우스만 증언>을 출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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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가 한국 땅에서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이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이것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이것조차 이전부터 그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군 관계인물이나 그의 배후 역할에 주목한 언론인·정치학자·역사학자들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하우스만 개인을 다룬 논문이 이미 2편 나와 있다. 하우스만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사람은 밀레였다. 최근 도널드 클락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의 하우스만 뿐 아니라 한강교 폭파 등의 쟁점에 대해서도 언급한 글을 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하우스만의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하우스만이 행했던 역할을 군 형성과정의 비사(秘史) 정도로만 취급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다. 하우스만이 주로 정보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우스만과 가까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정일권이나 백선엽 조차 그들의 회고록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하우스만을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

정일권이나 백선엽의 책을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 전직 한국군 장성들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을 언급하기를 꺼렸다면, 그 이유는 하우스만이 이들 장성들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우스만이 너무나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순사건 때 정보장교 자격으로 최초의 정보군 관계 대책모임에 참석했던 고정훈의 회고록에는 하우스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나와 있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미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자신의 회고록 제목 또한 그렇게 지었다. 어떻게 보면 당돌하게 보이는 이런 표현은, 그러나 사실에 가깝다. 아니 미군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 더 나아가 군부가 수 십년 간 좌지우지했던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정보 업무가 그렇듯 그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일에 싸여 감추어지기에는 활동영역이 너무나 컸고, 고위층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으며, 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썼다.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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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군 수뇌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는 하우스만이라는 미군 고문관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우스만은 “그 때 모든 사령관의 파면, 임명이 내 손을 거쳐 갔으며 내가 사령관과 미 대통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어떤 사람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 가능했으며, 내가 원한다면 국방부장관과도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모르면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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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정일권과 고문관 하우스만이 토벌중인 백선엽 부대를 조사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빨치산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도, 정일권은 체면 때문에 예정된 길을 가자고 주장했다. 이때 하우스만은 “정, 당신은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참모총장의 고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 길로 가기를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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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때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무쵸 대사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워싱턴에서 하우스만을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당시 그렇게 말했다네”라고 상기시켜 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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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우스만은 학살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 천명의 공산당을 처형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우스만의 대답은 “잔학 행위는 없었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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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우스만은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당시 하우스만은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김득중, 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3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이트가 개편되며 삭제됨 인권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 아카이브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worldcat 웨이백 머신 아카이브

2.1. 이승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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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첫 번째 단계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야기되었다. 휴화산이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 자락에는 한국인과 일본군이 만들어낸 복잡한 동굴 요새와 은신처가 있었다. 1945년까지 일본군의 훈련장과 비행장으로 이용된 제주도는 일본군의 무기 저장소로 사용되었고, 규모가 크고 활동적인 인민위원회는 이러한 무기를 확보하여 저장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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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위기는 하우스만 대위를 1950년 6월까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미군장교로 만든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이었다. 바로스가 서울을 떠나자 하우스만이 경비대 사령관실에 파견된 유일한 미군장교가 되었으며, 경비대 확장과 한국이 독립한 이후 경비대를 국군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담당하는 주요 기획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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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의 강인하고 적극적인 성품은 한국인들과 잘 어울렸다. 군사고문단 부사령관인 스터링(W. H. Sterling) 대령은 하우스만을 만나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좋아하게 되는 육군의 '빌 로저스(Will Rogers)'라고 평하였다. 한국군 고위장교와의 개인적 친분과 이들의 가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그를 군사고문단의 필수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더구나 점차 향상된 그의 한국어 이해능력은 정보와 예측의 핵심적인 원천이 되었다. 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이 대통령을 포함하여 한국 관리들에게 현명한 지침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우스만은 신 장관의 고문관 자격으로 한국각료회의에 참석하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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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국방경비대가 내부의 우익과 좌익의 파괴분자들을 일소하고, 규율을 강화하며, 경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이양받고, 경비대 자체의 정보망과 역정보망을 구축해야 제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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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반공주의자인 백선엽은 경비대내의 모든 파괴분자들의 가면을 벗기기 위하여 조용하면서도 대규모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늦여름 무렵, 그의 정보원들은 경비대내의 모든 공산당 하부조직원들을 회유하거나 체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였다. 이들은 여수의 제14연대를 국방경비대내에서 가장 위험한 부대로 간주하였고, 제14연대가 광주의 제4연대, 부산의 제5연대 그리고 대구의 제6연대의 탈주병들과 합세하여 새로 지급된 미군병기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후, 한반도 남단의 2개 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에 게릴라 작전지역을 구축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제14연대의 선임 고문관인 핀레이(Joe W. Finley) 중위와 현지 미군 CIC요원 역시 제14연대가 반란 직전에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핀레이는 이러한 의심을 갖고 서울에 왔는데, 임시군사고문단 G-2도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우스만을 만나 이야기하였으며, 하우스만은 그의 말에 동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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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풀러 대령에게 선임 야전고문관 역할을 양도하였다 할지라도, 여순사건의 진압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미군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전남에 대한 보급과 수송, 그리고 증원이 적절히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할 때까지 광주에서 백선엽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 그는 반군에 대한 재보급과 증강을 차단하기 위하여 해안경비대로 하여금 여수를 봉쇄하도록 로버츠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하우스만은 고립된 여수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탈환해야 하며, 반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열쇠는 백암산과 지리산에서 이미 활동중인 소규모의 게릴라 무리들이 반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순천 북방의 구례와 동쪽의 하동에 경비대 대대들을 배치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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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여수사건 진압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보충역 대위에게는 흔치 않은 명예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게다가 로버츠는 하우스만의 정규군 임관신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성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신뢰를 얻었고, 한국어를 배웠으며, 그의 정보, 리더십, 성실성 등은 주한미군의 임무수행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국인과 군인들이 하우스만 대위에게 보내고 있는 존경과 경의는 자신들이 그와 미군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고, 여수에서의 그의 참여와 건실한 자문은 향후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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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이승만 대통령과 채병덕 소장은 하우스만 대위를 초대하여 대통령의 75회 생일축하 분열식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수도사단과 기병연대의 말쑥한 군인들이 당당하게 행진하자, 이승만은 하우스만을 돌아보며 "당신의 군대가 자랑스럽겠군요"라고 하였다. 하우스만은 "이 군대는 대한민국과 대통령의 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승만은 "아니요, 이것은 당신의 군대요"라고 말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의 창설(194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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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먼은 비공개를 전제로 한국인들은 "잔인한 개자식"이고 일본인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으며[1], 한국인들에게 이를테면 처형한 시신을 가솔린으로 제거하여 처형 방법을 숨기고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돌리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잔인성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2017,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1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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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나는 주한미군고문단장 특사자격으로, 그리고 육군으로 이름이 바뀐 국방경비대 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중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급히 설치된 여순반란사건 진압사령부에 급히 파견되었다. … 다만 내가 공식적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 사령부가 효율적 진압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영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던 것만 여기서 밝힌다"

하우스만의 회고에 따르면, 명목상 계급과는 별개로, 미 8군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재량권으로 행동하였다. 또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계급상 상관인 대령들에게 명령하여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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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대위, 소령 계급이었지만 美고문단의 참모장직이었으며 윌리엄 로버트 고문단장(준장)은 본국 출장이 잦아 참모장인 나에게 단장 직무대행을 맡기곤 했기 때문에 한국 군부대에 나가 있는 중령, 대령 고문관들도 나의 명령권 안에 있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4p

백범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증언을 하였다. #

김석원 장군이 고분고분하지 않았기에 싫어해서 중상모략을 하였고, 이승만이 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에도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에, 한강 인도교를 건너자마자 폭파해서 거의 죽을뻔했다고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3~204p 에서 증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김득중은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논문에서 크로포드의 증언을 근거로 한강 인도교 폭파의 배후로 제임스 하우스만을 지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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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사고문단 참모장 하우스만 대위 증언록에 따르면, 25일 하오 의정부 전선에서 목격한 채 총장과 이형근 2사단장의 충돌은 볼썽사나웠다. 의정부 정면을 맡고 있던 3사단장 유재흥, 후방에서 증원부대로 온 2사단장 이형근이 참석한 작전회의 때였다. 채 총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포천과 연천 정면을 맡아 책임지고 공격토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이형근이 불복했다. “부대 이동이 다 안 됐고, 소규모 부대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면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채 총장이 권총을 뽑아 쏘려 하는 것을 유 장군이 말렸다. 이 장군은 군번 1번이고, 채 장군은 2번이어서 둘은 사사건건 으르렁거렸다.
"北, 남침 징후" 잇단 보고 軍 수뇌부가 번번이 묵살, 왜?

백선엽의 회고에 따르면, 월튼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이승만이 운전병을 처형하려던 것을 말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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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1953년 5월로 내가 첫 번째로 참모총장을 할 때였다. 이때 미 정보국에 근무 중인 하우스만 중령(한국 육군참모총장 고문관 역임)의 안내로 남성인(南星寅) 대위와 함께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고 있던 맥아더 원수를 방문했다.
...
스피드광(狂)인 워커 장군이 타고 가던 지프가 국군 6사단 소속 병사가 몰던 트럭에 부딪힌 것이다. 그 직전에는 미9군단장이었던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이 헬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국군 1사단이 정신없이 임진강으로 후퇴하던 도중에 받은 슬픈 소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군사고문관 하우스만 대위가 말리는 바람에 총살을 면했다.
백선엽 #

그 외에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과정에 관여하였다.

2.2. 박정희 관련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박정희와 처음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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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토벌사령부에 내려온 짐 하우스만 대위는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특사자격이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미국사람을 싫어하는 인물'이란 정보가 있어 그는 통역을 중간에 넣어 대화를 걸어보았다. 박정희는 영어를 상당히 이해하는 것 같았으나 영어로 말하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는 이 때 속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미 시동이 걸린 숙군수사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지 않을까 불안에 휩싸여 있었겠지만 누구한테도 의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박정희를 더욱 불안하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사건이 생겼다. 박정희와 함께 남로당에 입당하고 있었던 '군내의 좌익거물' 최남근 15연대장이 토벌사령부로 연행되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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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깔··· 박정희 소령

한 나라 국가원수의 과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 나같이 외국 정부의 요원으로 오랫동안 주재한 사람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주제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도자에게는 언제나 여러 측면이 있는 것이므로 외국인이 봤던 한 측면을 써본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지도자의 다양성을 말해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유용한 면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곳은 전남 광주에서였다.
1948년 10월 麗順반란사건이 났을 때 나는 주한미군사고문단장 특사 자격으로, 그리고 육군으로 이름이 바뀐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중대한 사명을 띠고 光州에 급히 설치된 여순반란사건진압사령부에 파견됐었다.
사령부에는 白善燁 · 金點坤을 비롯한 육군본부 정보담당관들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의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그의 정보 수집 능력, 치밀한 작전 계획 능력을 잘 아는 김점곤 소령이 특별히 육군본부에 부탁하여 현장에 파견돼 왔었다.
박정희와 김점곤은 육군사관학교로 따지면 金이 1기, 朴이 2기로 1기가 차이났으나 과거에 같이 日本 관동군 장교로 있었던 관계, 그리고 金이 과장으로 있던 陸本 작전국에 朴이 꽤 오랫동안 근무했던 관계 등으로 둘은 아주 친했다. 나이는 金이 朴보다 6살이 아래였다.
나는 그때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국방경비대 창설에 깊이 관여했고, 한국군의 장비 지원 · 보급 · 운영 일반을 사실상 거의 도맡아 처리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한국군 조직 책임자로 일해 왔기 때문에 한국군이 맞은 이 첫 시련에 사명감과 긴장감을 다같이 안고 광주 현장에 파견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소상한 일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다만 내가 그때 공식 명령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사령부가 효율적 진압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 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다는 것만 여기서 밝힌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은 마침 반란 부대인 여수의 5여단 14연대에 M1, 기관단총 등 신무기를 공급한 직후였으므로 이 반란 부대를 조속히 평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급하고 중대한 것인지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다.
우선 통역이 필요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육사 7기 특별반으로 훈련중인 후보생 2명을 아직 훈련도 안 끝난 상태에서 소위로 임관시켜 현장에 동행했다.
일본의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다시 만주의 北滿외국어학원에서 露語를 전공한 高貞勳과 일본 와세다(早稲田)大 영문학과 출신으로 영어가 뛰어난 李壽榮이었다.
이 두 분은 후일 그렇게 훌륭한 일생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대단히 머리가 좋은 분들로 한국군 초창기에 한미 관계 유대에 큰 공을 세웠었다.
高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軍사령부의 노어 통역관으로 있다가 상당한 고급 정보를 가진 채 越南하여 미소공동委의 미국측 영어 통역관 노릇을 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고정훈은 중령까지 진급했다가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나가 후일 진보적 색채의 정치인이 됐다. 이수영은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명통역장교로 일했고 뒤에 프랑스 대사 시절 비명에 일생을 마쳤다.
高는 박정희를 잘 알았다.
나는 高를 통해 나보다는 훨씬 키가 작고(나와 徐종철 씨는 키가 같았다. 1군 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한 서장군은 머리를 세운 만큼 徐가 키가 커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같은 1m85cm였다) 치밀해 보이는 朴을 소개받아 高의 통역으로 애기하곤 했다. 朴은 적어도 영어 단어는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영어로 말하면 웬만큼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어로 말하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는 육사 졸업 후 춘천의 제8연대에 첫 배속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 부임한 후 첫 몇 개월을 8연대의 창설 연대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잘못했으면 만났을 것"이라며 애기의 끈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경비대사령부본부로 전근되자 元容德이 8연대 연대장으로 교체돼 갔었는데 원용덕으로부터 朴의 애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내가 박정희를 처음 만나기 전의 일인지, 그를 만난후에 元으로부터 그 인품을 소개받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元은 朴에게 매우 강한 외국인 혐오증이 있다고 애기해 줬다.
그는 8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해 연대의 미군 고문관과 한바탕 언쟁을 한 바 있었으며, 元연대장이 장교들에게 훈시하는 가운데 "한국군 장교들은 영어를 좀 배워야 한다"고 말하자 朴소대장이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면서 발뒤꿈치를 잔뜩 세우고는 "이것이 미국 군대입니까, 한국 군대입니까"라고 치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인상깊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가 숙군 작업 때에 赤色 조직책으로 걸려들었을 때 나의 판단을 올바르게 하도록 하기도 했다. 여순반란사건은 비교적 조속히 진압됐다. 반란부대를 처음부터 퇴로를 차단한 채 섬멸 작전을 폈으면 좋았겠으나 당시 한국군 조직 상황으로 봐서 우선 이 반란 부대가 순천을 완전히 점령 못 하도록 막은 것만도 다행이었으며, 이들이 순천 공격에 실패하고 그 일부는 지리산 등으로 흩어진 것이 다행이었다.
산으로 들어간 반란군들은 기존 빨치산과 연합했다. 국군은 이들 빨치산을 대상으로 한 토벌 작전을 계속했다.
일단 급한 불이 꺼진 후 軍은 숙군 작업에 들어갔다. 14연대에만 적색분자가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 전군에 적색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과 정보를 갖고 우선 장교들의 성분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여순반란사건 직후였다.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었으며, 숙군 작업을 지휘했던 백선엽 대령이 어느 날 한뭉치의 적색 침투자 명단을 내게 갖고 왔다. 거기에는 내가 진실로 아꼈고, 또 빼어난 실력을 가진 자도 많았다.
金종석, 崔남근······ 이런 사람들은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김종석은 일본육사 출신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살아 남은 자였다. 머리가 비상했고 용기가 배어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李형근과 일본육사 동기였는데 육군참모총장 李應俊 장군이 이형근을 사위로 삼은 후 약간 불리한 출세길에 오른 듯한 처지에 있었다.
그 명단에는 박정희 소령도 있었다. 그도 역시 일본육사 출신으로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많은 우수한 장교들이 공산당으로 체포돼 군사 재판을 받은 후 수색의 육군 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나는 이 비극의 현장을 내 손으로 직접 찍은 비디오 필름을 갖고 있는데, 이 필름을 틀어 볼 때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처참한 혐오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김종석 중위는 처형 직전 나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나를 보며 "하우스만 씨, 미안하오"라는 말만 했다. 나는 이 아까운 청년 장교가 소멸돼 가는 것을 보고 한탄했으나 담배 한 대를 권할 수 있는 처지밖에 안 되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한 대를 다 피운 후 참으로 태연히 죽어갔다.
여기서 유일하게 박정희 소령은 살아났다.
그는 그를 어려울 때 구해 준 동료 · 선배 · 후배들의 발뒤꿈치를 사정없이 무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끔 미군들 사이에는 '스네이크 朴'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그에게는 돕는 사람이 많았다.
이 죽음의 사슬에서 그를 풀어낸 사람 중에는 丁一權 · 白善燁 · 張都暎 · 金點坤 · 金安一 등 상당수를 헤아린다.
육본 정보국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점곤은 숙군 작업의 실무를 맡고 있던 金昌龍(후일 방첩대장을 지내다가 許태영 대령 등에 의해 피살)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체포 소식을 김창룡으로부터 일찍 보고받을 수 있었다. 김점곤은 김창룡에게 '때리지 말 것'과 '먹을 것을 넣어 줄 것'을 우선 부탁해 박정희를 고문에서 살아남게 했다.
김창룡의 직속 상관이자 수사 실무 책임자였던 김안일은 숙군 책임자인 백선엽을 만나게 해달라는 박정희의 소청을 받아들여 그를 데리고 백선엽의 방을 방문했었다.
김안일은 준장 퇴역 후 목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 목사로 있다. 그가 박정희에게 유달리 호의를 베푼 것은 김창룡의 건의도 있었지만 朴이 신문 과정에서 軍의 공산당 비밀 조직을 소상히 불어 숙군 작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했던 점과, 사형수로 있으면서도 의젓함을 잃지 않은 인품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이 숙군 작업이 얼마나 잘 엄중하게 처리되고 있는가에 대해 1일 보고를 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나는 그때 申성모 국방장관, 윌리엄 로버트 고문단장 등과 함께 수시로 이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박정희 피고의 형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이유로 나는 그가 일본육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는 아니며, 군의 숙군 작업을 위한 군내부의 적색 침투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한 공로를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백선엽 · 정일권은 蔡병덕 총장에게 朴의 사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공식 건의한 외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각각 개인적으로 찾아가 朴의 면죄를 호소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백선엽이나 정일권이 서로 어떤 약속을 하고 이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아닌 것으로 알며, 나도 어떤 개별 권고나 공식 건의에 의해 이대통령에게 朴을 변호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소령은 "이것이 미국 군대요 한국 군대요"라고 대든 그 말에 미뤄 보더라도 적어도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움직여 온 공산주의자는 절대 아니었으며, 그가 李在福-李重業 조직책으로 이어 온 한국군 내부의 거의 모든 적색 조직을 샅샅이 폭로한 것은 확실히 그의 목숨을 건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9~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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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그는 누구인가

여순반란사건-肅軍 작업이 격렬했던 시기를 지난 후에는 향후 한국 대통령이 돼 벅찬 경제 건설을 해낸 박정희 소령은 꽤 오랫동안 나의 활동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그를 아끼고 돕기를 즐거워하는 주위 사람들, 백선엽 · 장도영 · 김점곤 ······ 이런 사람들의 추천으로 문관 자격을 얻어 계속 육본 정보과에 남아 있었지만 직책상 나와 맞닥뜨릴 경우가 많지 않았다.
박정희는 원래 조용한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외국인에게는 스스로 먼저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어 같은 건물 안에 있으면서도 별다른 접촉은 없었다. 그는 4·19 이후 별 둘을 달고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해 왔었는데 이때는 나와 많은 대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6·25중 미국방부 한국정보과로 전출했다가 56년 3월에 주한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다시 한국에 부임해 왔었다.
마침 朴은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학생 데모 지지 연설을 해 육본에서는 인근 지역 해병대를 출동시켜(부대 이동은 미군 명령 상황이었다) 朴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 바 있었고,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중책을 맡고 있는 宋堯讚 장군을 부패 군인의 표본이라며 물러가라고 편지를 하던 터여서 朴이 작전참모부장으로 온 후 나는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청렴하고 똑똑한 군인으로서의 명망을 얻고 있는데다가 그를 따르는 8기생을 비롯한 많은 근위사단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둘러싼 군부 쿠데타說에 이미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줄담배를 피웠다. 작전참모인 그는 8군 고문인 나와 자연히 많은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대화가 오갈 때면 내가 탁자에 꺼내 놓은 살렘 담배를 서슴지 않고 마구 꺼내 피우곤 했다. 박정희는 아마도 술과 담배를 통해 그의 무뚝뚝하고 情이 없어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친근하고 정이 있는 모습으로 바꿔 온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술과 담배를 같이 나눠 마시고 피우는 것을 통해 동료 의식 내지 동지 의식 같은 것을 느낀다.
朴은 여순반란 진압 작전 때부터 술·담배를 많이 했다.
동료 · 상사들이 술을 산다면 朴은 거의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술만 얻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사는 사람의 담배까지도 즐거이 피워댔던 것이다.
고정훈 · 김점곤 · 장도영······ 이런 사람들의 술 · 담배는 박정희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작전참모부장 시절 그가 나의 살렘 담뱃갑에서 열심히 담배 개비를 빼내 가던 모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사실 국방경비대 창설 때부터 한국군에 묻혀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지만 내가 미국인이라는 이유, 또는 참모총장 고문이라는 이유 등으로 한국인 친구들로부터 경원시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朴이 기본적으로 외국인 기피증이 있다 해도 나에게 그런 기색을 나타낼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 온 후 첫 부임지로 갔던 춘천의 8연대는 박정희의 첫 배속 연대이기도 했고, 그가 알든 모르든 나는 박정희의 刑면죄 청원에 깊이 개입될 정도로 그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나의 담배를 빼 피우는 일을 안 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때 나는 대위 계급이었으니까 만일 내가 조금만 서울 사령부 전출이 늦었더라도 갓 소위를 달고 부임한 박정희의 경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많은 상사들과는 달리 나는 나이로 봐도 朴보다 5살이나 위여서 내게 경례를 하는 것에 불쾌감 같은 것은 갖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등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친구들이 다 그랬지만 이들에 비해 비교적 임관도 늦고 진급도 느린 박정희도 60년에는 이미 별 둘을 단 장군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중령 계급밖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나를 멀리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직책상으로도 8군 고문인 나와는 자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박정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후일 미국으로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생애를 둘러보면 그가 어떻게 공산주의 운동에 말려들었으며 군에서 '반역할 의사'를 키울 수 있었는가를 약간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박정희는 우수한 두뇌를 갖고 大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3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만주(신경)군관학교 예과 2년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육사 57기생으로 입학해 1944년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미 교사 생활을 3년이나 한 터여서 사관학교를 졸업할 당시 동기생들보다 나이가 3~4세 많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일본 패망 후 본국에 들어오는 길이 멀었고, 46년 한국에 들어와서도 얼마를 집에서 놀다가 육사 2기생으로 한국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해방과 더불어 군사영어학교 등으로 들어온 동료들과 선후배 관계가 뒤바뀌고 계급이 형편없이 처진 불이익을 받았다.
춘천 8연대 시절 그의 직속 상관이던 중대장 김점곤(중위)은 朴(소위)보다 6살이나 아래였으며, 그가 정보국 과장으로 있을 때 정보국장이었으며 그후 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운명의 만남을 했던 장도영도 그보다 3살이나 아래였다.
그가 소위 임관을 했을 때 이미 소령 · 중령을 달고 있던 李한림 · 姜문봉 · 장창국 등은 日本육사 또는 만주군관학교의 후배이거나 동기였다.
박정희는 계급이 우선인 군대에서 나이가 한참 아래인 상사들에게 흔히 말하는 '립 서비스'를 할 처지가 못 됐다.
그저 묵묵히 앉아 일만 하는 것이 상책이었고 이들에게 상사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술 좀 사주시오' '담배 한 대 주시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 습관화 된 것 같았다.
김점곤은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로부터 '술 좀 사주시오' '담배 한 대 주시오'라는 말을 많이 들은 상사 중의 하나였다.
朴은 얼마 안 되는 육군 소위 월급이었지만 그걸 고스란히 시골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술 · 담배를 살 형편도 아니었다.
김점곤은 전라도 갑부의 아들이었으므로 朴과는 사정이 달랐다.
어느 날 박정희는 김점곤에게 술을 한잔 사겠다고 제의해 왔다.
춘천에서 나무 장사를 하는 삼촌 한 분이 있는데 평소 상사들로부터 술을 많이 얻어먹는다는 것을 알고 빚을 갚을 겸해 이 삼촌이 한잔 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무 장사는 큰 산판을 사서 땔감을 만들어 도시로 파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자본가로 통했다.
연대장 원용덕, 중대장 김점곤, 그리고 朴과 그의 삼촌이라는 사람 등 4명이 술자리를 같이했다.
김점곤의 말에 의하면 그 삼촌이라는 사람이 뒷날 軍간첩 총책으로 잡혀 사형당한 李在福이었는데, 그가 술자리에 앉아 자기를 소개하자 원용덕이 대뜸 박정희에게 "너 순 쌍놈이구나"라고 말해 분위기가 급랭케 됐다는 것이다.
朴은 이때 약간 불쾌한 표정을 언뜻 지었는데 쿠데타 후 元을 얼마 있다가 버린 것이 아마 이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고 김점곤은 말한 바 있었다.
어쨋든 朴은 "아닙니다. 밀양 박씨는 꽤 양반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어 元은 "그런데 무슨 놈의 양반이 삼촌-조카가 성이 다른가"라고 되물었으며, 이어 朴이 "아, 외삼촌입니다"라고 말해 분위기는 다시 밝아졌다는 것이다.
朴이 언제 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숙군사건 당시에는 어떤 근거가 있었던 것 같으나 지금 내게는 확실한 증거나 기억이 없다.
그는 춘천에서 이재복에게 포섭됐을지도 모르고, 어떤 기록처럼 그가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있을 때 그곳에 박혀 있던 고정 간첩에 의해 포섭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산주의자로 48년 10월의 대구폭동사건 때 경찰에 의해 피살된 박정희의 형 朴相熙와 이재복은 일제 때부터 막역한 친구였으며 때문에 박정희도 어릴 때부터 李를 잘 알던 터여서 이재복-박정희 연대는 적어도 춘천 시절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다.
경북 대구 출신인 이재복은 남로당 중핵의 한 사람이고 유명한 빨치산 두목인 이중업의 직계선상에 있었다. 이중업은 46년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탈옥해 그 유명한 여간첩 金壽任이 빌려 온 美육군 대령의 세단차를 타고 개성으로 탈출한 사람이다.
박정희는 이중업-이재복의 명령 체계에 들어가 軍내부의 공산 세력 침투 조직을 세밀히 알았으나 그가 직접 활동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복은 일본 同志社 출신의 인텔리 목사였으나 결국 간첩으로 체포돼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을 맞았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36~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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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 전에 탐지된 '5·16쿠데타'

5·16 전후의 한국 정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張勉 정부는 당당히 국민의 선거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다같이 갖고 있었지만 민주 정부를 경영할 만한 인적 · 물적 · 시간적 재원이 부족한 상태였다.
많은 민중 데모가 잇따라 일어났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이 혼란스런 한국 정부의 진로를 보는 눈은 각각 달랐다.
과연 개인당 국민소득이 1백 달러도 안 되면서 북한의 무력 위협을 당하고 있는 이 국가의 정부가 하루아침에 피어나는 민주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軍관계 요원들, 외교관들, 정보 관계 요원들은 서로 일치된 의견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중대한 고비에 미국이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의견을 일치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오랜 한국 체재 경험과 軍관계 인사들의 교우 관계로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은 바 있었다. 국무총리실에 자주 드나들면서 군사 관계에 대한 자문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한국군의 주요 인사에 대한 면면을 잘 알고 있었으며 국가가 민주화로 갈 때 군을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약간의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외교 절차가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내가 景武臺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지만 이대통령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 여러 채널로 양해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었다. 엄연히 미국 대사가 있고 주둔군사령관이 있으며 또 고문단장도 있는데 일개 대위, 소령 계급의 군인이 어떻게 한국 대통령 방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비록 이대통령이 바라는 사실이라 해도 한국 주재 미국 관계자들의 이해와 양해가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대통령은 軍관계 자문을 위해 유능한 장성을 보내 주겠다는 美당국의 건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유능한 미군 장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우스만을 원한다"라는 말로 번번이 나를 위해 미국의 양해를 구했었다.
張국무총리로부터 군사 자문을 부탁받자 나는 약간의 절차를 밟는 것이 필요했다. 직속 상관인 주한미군사령관은 말할 것도 없고 주한美대사의 허가를 받는 일이었다.
결과는 NO였다.
주한미군사령관의 보좌관직에 있는 내가 대한민국 최고 통치권자의 군사 자문役을 한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볼 때 역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장면 총리의 비서가 진지한 부탁을 갖고 다시 내 사무실을 찾았을 때 나는 "각하의 분부를 받들 수 없는 것을 심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을 전했다. 미군에서 허락치 않는다느니, 美대사관이 NO 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張국무총리는 내게 퍽 섭섭하다는, 그리고 내게는 정말 과분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일등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돕기를 꺼리지 않았던 하우스만이 국무총리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군의 인사 이동은 빈번히 진행됐다. 4·19 혁명기를 통과한 宋堯讚 장군이 60년 5월 23일 육군참모총장직을 사임했고 후임이 된 崔榮喜 장군 역시 3개월 만인 8월 23일 교체됐다.
崔榮喜 장군이 참모총장을 맡았으나 그도 역시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만일 최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그대로 지속할 수 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최장군은 6·25중 전투도 잘했을 뿐 아니라 성격이 私가 없고 원리원칙적이었기 때문에 예하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을 알았다면 적당히 넘기지는 않았을 것 것이다.
최장군은 61년 2월 사일하고 2월 17일자로 장도영 장군이 참모총장이 됐다.
총장이 이렇게 바뀌니 육본의 참모진은 물론 사단장, 참모장, 각급 장교가 빈번히 움직일 것은 뻔한 일이었다.
軍은 누가 어디로 가며 누가 진급 대상이고 누가 제대 대상인가에 대해 날카로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말하자면 자기 할 일만 잘하면, 실력만 쌓고 있으면 능력에 따라 장군도 되고 사단장도 되며, 어쩌면 참모총장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군의 기강이 흔들이고 있었다.
쿠데타說이 나돌았다.
이 쿠데타설은 나의 비상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사무실은 8군 캠퍼스 안, 8군 사령관의 옆방이었으나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육본이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2~3차례씩 육군본부를 방문했다.
박정희 장군의 작전참모부장 방을 자주 간 것도 이때쯤이었다.
나는 한국말을 유창하게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자 단어를 비롯한 한글 어휘는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한국군 장성들은 상당한 영어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어느 방에라도 불쑥 들어가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참으로 어려웠다. 李應俊 장군, 蔡秉德 장군 등을 보좌하면서는 이들이 영어를 거의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고생했으나 통역관을 두고 얼마 동안 연습한 후에 어느 정도 뜻이 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 시절에 비하면 나의 한국어 실력도 크게 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희 장군도 포함된 많은 한국군 장교들이 미국 유학(군사학교 등)을 경험하고 있는 60년대에야 나의 한국인 접촉 능력은 프로級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1961년 3월 1일.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 전 나는 한국군 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매그루더 주한유엔군사령관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적어도 1차례 이상 "軍내부의 쿠데타 기도를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장총장은 매그루더 대장의 경고를 받고 "걱정 말라. 한국군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좋다"는 약간 반박적인 대답을 했다.
나는 한국군 친구들로부터 얻은 정보, 또는 불쑥 찾아가서 대화중 캐낸 일들을 분석한 후 일련의 심각한 상황을 종합할 수 있었는데, 이 상황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실제 폭풍일 것이라는 것을 金炯一 참모차장이 확인해 줬다.
김장군은 춘천 8연대 출신으로, 내가 정일권 참모총장을 보좌하고 있을 때 정총장의 비서실장, 정보국장 등을 지내 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김장군은 최영희 총장 때 참모차장으로 임멍돼 최경록 시대를 거쳐 장도영 총장의 초기, 즉 61년 3월까지 참모차장으로 있었다.
김형일 장군은 5·16 시발을 소상히 알고 있을 것이나 불행히도 그는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연전에 타계했다.
어쩌면 4·19 기념 1주년이 D데이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이럭저럭 탈없이 넘어가고 평온이 지배하는 듯해 보이던 5월 16일 아침, 나는 짙은 색깔의 레이밴 색안경을 걸친 전혀 다른 모습의 박정희 장군을 육본 참모총장실 앞에서 만났다. 결국 그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42~46p

텍사스 오스틴 자택에서 인터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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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령관 고문으로 활약한 제임스 하우스만(78)은 지난 2월 미국 텍사스 오스틴시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합헌정부를 지지한다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은 제스처(Gesture)”라고 잘라말했다. 그는 “당시 주한미군은 어설픈 민주주의자였던 장면총리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면서 “미국은 오히려 쿠데타를 환영했으며 진압은 말도 안된다”고 말했다. 하우스만은 이어 “성명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미국이 방관했다는 애기를 듣지 않도록 형식적으로 내놓은 것이었을 뿐 진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고 단언했다.

1995년 5월 11일 경향신문 11면, 서울—워싱턴 秘話(비화)50년 (15)「5.16과 美國(미국)」 [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카터 행정부 시기 주한 미군 철수 저지에도 관여했으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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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먼의 등장

1977년 5월17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의 자리를 맡고 있던 필자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하우스먼은 韓美 군사협력 분야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9월 대위 계급의 美 육군 정보장교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한지역에 진주한 美 육군 제24군단의 요원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뒤 그는 대한민국 국군 建軍史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는 건국 초기 국군 조직에 관여했고, 1949년 주한미군 철수 후에는 美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남한에 잔류했으며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주한미군 소속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53년의 휴전 이후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양군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윤활유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1979년 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한국軍의 인사·조직·운영·작전 등 모든 영역에 하우스먼의 지문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77년에도 그는 여전히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이었다.)
베시 주한 미군사령관 비밀회담록과 朴正熙 대통령 앞 特上 보고서 全文-카터에 抗命하고 朴正熙를 도와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좌절시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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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먼의 전화

1977년 5월17일, 그러니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인 李東馥씨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駐韓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李보좌관과 하우스먼은 다음날 서울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李특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駐韓미군 철수저지工作의 내막 - 美 군부, 金載圭·朴正熙와 짜고 카터를 물 먹이다! #

그런데, 하우스만은 회고록에서 10.26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알력은 유명했었고,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밀려나자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박정희를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김재규와 별로 만난적이 없어서 김재규를 잘 모른다는 투로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별보좌관인 이동복의 월간조선 인터뷰 증언과 상충된다. 하우스만이 10.26 사건에서도 무언가 거짓말하면서 숨기는 것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우스만은 10.26 사건은 이미 소상히 밝혀졌으므로, 본인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인들도 감히 박정희를 죽일 생각을 못하는데, 어떻게 미국인이 김재규를 부추겼을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도, 사실 미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면서 말을 풀어놓는다. 그는 박정희 암살과 비슷한 사건으로 이승만이 미국에게 버림받게 된 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위의 월간조선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이동복의 증언과 살짝 다른 부분이다. 이동복은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철수를 저지할 당시에, 김재규와 미국 군부의 하우스만이 협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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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참모부에서 급히 유엔司 지하상황실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지난 17년간 유엔군사령관 특보로 일해 와 가끔 야간에 8군 지하벙커로 호출되곤 했었다.
당시 한국 정치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였다. 8군 지하벙커에서는 가끔 8군 요원들이 모여 험악해져 가는 한국 상황을 애기하곤 했다.
10월 초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국회제명사건이 있었고 그후 10월 중순 釜馬사태가 일어나면서 8군은 긴장하고 있었다. 부마사태가 터진 직후인 10월 17일 부산지구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있어 법률상 작전지휘권을 가진 유엔군 · 8군 사령부로서는 지하벙커를 심심찮게 이용하고 있었다.
8군 참모장, 각 참모, 주한美중앙정보국 책임자 브루스터, 그리고 8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나 등이 모여 있는 가운데 유병현 副사령관이 들어와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 지하벙커를 흔드는 급보였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범인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김부장은 참을성이 좀 적어 보이는 분이었다. 뒤에 나의 생각이 꼭 맞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때 나는 '참을성의 기준'을 갖고 이 엄청난 사건을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축적된 긴장감이 마지막 1분을 못 넘기고 폭발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
당시 차지철(경호실장)과 김재규(중앙정보부장)과의 알력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재규는 내가 창군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시절의 육사 2기생이지만 나와는 별로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그는 확실히 위기한계성이 큰 사람은 아닌 듯했다. 김재규는 차지철과 정보 경쟁을 벌이도록 박대통령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으며, 그의 정보가 차지철 정보에 밀려 무시당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상당한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이 위기감의 마지막 1분을 참지 못한 채 일을 벌인 것으로 보였다.
이 엄청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이미 소상히 밝혀졌기 때문에 내가 새삼 말할 입장은 아니다.
기자는 내게 이렇게 물어 왔다. "김재규는 육본 벙커에서 각료들을 모아놓고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했다는데, 간접적으로라도 이 사건에 미국이 개입된 것이 아니냐"고,
나는 단호하게 이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김재규는 박대통령과 동향인이며, 박대통령과 사관학교 동기이며, 그리고 박대통령이 직접 양육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국인도 金이 박대통령을 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미국인이 김재규에게 그런 부추김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사건의 전말을 보면 사건의 미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미 관계는 마치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美양원합동회의에 가서 미국 지도자를 훈계하듯 강경 연설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이대통령에 대한 신임이 급격히 떨어진 때와 비슷한 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은 휴전 후 미국을 방문하면서 내셔널 프레스클럽, 샌프란시스코 연방클럽, 필라델피아 재향군인회, 로스앤젤레스의 세계문제협의회 등의 연설을 위해 올리버 박사에게 원고를 쓰도록 부탁했다.
올리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올리버 박사가 원고를 써 올릴 때마다 별로 고치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양원합동회의 연설문은 스스로 썼다. 올리버 박사는 여러 번 사정하다시피 그 원고를 한 번만 보여 달라고 했다. 백악관 만찬 후 블레어하우스에서는 단 한 자도 고치지 않을 테니 그저 한 번만 읽어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그 원고가 든 가방을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않은 채 완강한 거부 태도를 보였다.
올리버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꺾을 수 없는 고집의 표시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7월 28일 드디어 의사당에 나가 "미국이 한국에서 對공산주의 전쟁을 벌벌 떨면서 그만두게 됐다"고 비난하고 "어리석게도 휴전에 동의했다"느니 "한국이 다시 공격받기 전에 워싱턴은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일장 훈시를 했다.
그날 이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으나 미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승만과는 애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됐다.

박대통령이 78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엉터리 선거'에 의해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즈음 미국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초조할 정도의 관심을 높이고 있었고 약간의 위협용으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1979년 6월 29일 카터 美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 이 카터-박대통령의 만남이 양국에 얽힌 많은 문제를 풀어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박-카터 회담에서 박대통령이 회담 시간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서 철군의 부당성을 들어 일방적으로 미국 행정부를 공격하는 발언으로 일관해 분위기가 밝게 끝나지 못했었다. 韓 · 美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카터 대통령도 차기 선거를 위해 미국 유권자들에게 줄 선물(인권 문제 등)을 별달리 얻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갔었다.
그 뒤 가발 공장 여종업원들을 신민당사에서 끌어낸 소위 YH사건,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제명사건 등 계속 불행한 사태가 한국에서 발생했고, 이때마다 美국무부는 '개탄한다' 등의 非외교적 용어까지 써가며 박정희 정부를 비난했었다.
물론 나는 이 고차원적인 정치 문제를 애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내 직업 군인 생활을 송두리째 마친 입장에서 볼 때 양국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고 있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 김재규를 움직일 수 있었다거나 움직일 엄두를 낼 수 있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7~20p

3. 관련 자료

내가 르포기자로서 받은 특종상이 하나 있다. 1991년 9월4일자 시사주간지 토요신문에는 전 주한 미군사령관 고문 제임스 H 하우스만을 최초 인터뷰한 ‘하우스만 특별인터뷰-대한민국 창군 비화’가 실렸다.
[차길진의 마이웨이 25] 내가 받은 특종상
김득중(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3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이트가 개편되며 삭제됨 인권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 아카이브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worldcat 웨이백 머신 아카이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지 제40호,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의 창설(1945~1950)
Clemens, Peter. Captain James Hausman, US Army Military Advisor to Korea, 1946-48: The Intelligent Man on the Spot Th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25 No.1 [2002]: 163-198.
Millett, A. R. Captain James H. Hausman and the Formation of the Korean Army, 1945-1950 Armed forces and society, Vol.23 No.4 [1997]
Clark, Don. “Jim Hausman, Soldier of Freedom .” In History, Language and Culture in Korea: Proceedings of the 20th Conference of the Association of Korean Studies in Europe (AKSE). Youngsook Pak and Jaehoon Yeon, comps. London: Eastern Art Publishing, 2001.
James H. Hausman Archive, 하버드 대학 한국연구소 아카이브 제임스 하우스만 중령과 John Toland interview, 1988, Austin, Texas, 하버드 대학 한국 연구소 소장, 녹취록은 뉴욕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Franklin D. Roosevelt Library 에서 제공 개별 아카이브 목록
James H. Hausman Oral History Interview, August 198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트루먼 도서관 소장자료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주한미군 정보통 하우스맨 증언
어두운 현대사 가리기 기사 삭제

[1] 하우스먼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