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2년 ~ 1504년 10월 28일 (향년 32세)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1], 자는 경여(敬輿), 호는 물암(勿菴), 눌암(訥菴). 임사홍의 차남으로 김종직의 제자이다.2. 생애
1472년(성종 3) 아버지 임사홍과 어머니 전주 이씨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엄청난 천재였다. 15세 되던 1486년(성종 17) 9월 15일 식년 진사시에 1등 1위, 즉 장원으로 입격했고, 2년 뒤에는 충청우도에서 열린 문과 향시(鄕試)에서도 합격했다. 이를 두고 신하들은 임사홍의 권력을 이용한 부정 시험이라고 비난했지만, 임사홍은 임희재가 초시 합격할 때 귀양을 가있다가 직첩도 반년 전(1486년 3월)쯤에 돌려받은 상황이었고 전방위로 까이던 사람이었는데 부정시험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 뒤 27세 되던 1498년( 연산군 4) 식년 문과에 2등 3위로 급제해 정자(正字, 정9품)에 제수됐으나 같은 해 일어난 무오사화 때 이목(李穆)에게 쓴 편지로 아버지와 같이 국문을 받았고, 붕당을 조직한 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3천리 밖의 함경도 경성도호부(現 함경북도 경성군)에 유배되었다. 이후 한성부로 돌아와 거주했으나 1504년(연산군 10) 5월 27일 연산군의 명으로 도성 밖으로 쫓겨났고, 그해 일어난 갑자사화 때는 무오사화 당시의 일로 인해 다시 국문을 받다가 대나무를 그려 족자를 만들어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쓴 게 들통나서 결국 그해 10월 28일 능지처참을 당했다. 향년 32세.
임희재의 부인은 영응대군의 외손녀인 구순복이었는데 구순복의 올케가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였다.[2] 휘신공주가 구순복을 방면해달라고 연산군에게 부탁해서 남편의 죄에 연루되지 않았다.
사후 1505년 1월 5일 자택이 연산군의 딸인 휘신공주에게 하사되었고, 7월 14일 《선원록》에서 그와 자식들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임희재가 죽었을 때 중종실록의 사관의 평에 의하면 연산군이 이 일로 자신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는 거 아닌가하여 임사홍을 감시했더니 되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3. 가족 관계
4. 대중매체에서
만화가 고우영은 자신의 만화에서는 임희재 사망 사건을 이를 각색해서 임사홍이 죽은 아들을 호적에서 파내 모른 척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여 그리기도 했다.로맨스 판타지 < 폭군의 장녀는 바쁘다>에서는 중요한 위치의 인물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