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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건(李健) |
호 | 관오(觀吾) |
본관 | 전주 이씨[1] |
출생 | 1889년 6월 16일 |
함경도
정평도호부 남선덕사 창리[2] (현 함경남도 정평군 창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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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5년 3월 1일 (향년 45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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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차장과 학무차장을 역임했다.2. 생애
이춘숙은 1889년 6월 16일 함경도 정평도호부 남선덕사 창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창신리)에서 태어났다.이후 상경하여 1916년 2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8년 6월 주오대학을 졸업했다.
주오대학 졸업 후 1918년 7월 홍도(洪濤)와 함께 만주· 시베리아 지방 시찰 도중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 윤해와 회견한 후, 1919년 4월 8일 이규갑·홍도·한남수(韓南洙)·이봉수(李鳳洙)와 함께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지원과 항일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구국모험단의 참모로 활동하였다.[3]
(사진 설명: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
1919년 9월까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및 부의장, 군무차장(軍務次長)을 역임했고, 1920년 4월까지 임시정부 학무차장(學務次長)을 역임했다. 임시정부 학무차장으로 재직하면서 임시정부 헌법개정, 국채통칙(國債通則), 공채발행조례(公債發行條例) 등의 제정에 참여했다. 한편 1919년 11월 독립대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상해민단(上海民團) 단장 여운형이 발기한 신한문화동맹(新韓文化同盟)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1월경 상하이에서 체포된 후 조선으로 압송되었고, 1921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공소를 취하하여 곧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4]
1927년 12월 6일 출옥한 후에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기 이전까지 신간회 경성지회의 총무간사,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 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1935년 3월 1일, 4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이춘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
안풍대군파로 추정.
[2]
인근의 신흥리, 경흥리, 서중리, 중리, 인상리, 명호리, 신남리와 함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3]
구국모험단은 국내 각지에 있는 조선총독부 관서 파괴 및 주요인물 암살과 군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국내 각지에서 지방유지, 재산가, 학교, 종교단체 등의 현황을 조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종사한 단체이다.
[4]
1921년 당시 형사사건부에는 이춘숙의 주소지가 '
경상북도
김천군
지례면 녹경동'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우선 김천군 지례면에는 녹경동이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1919년 4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줄곧 상하이에서 생활한 그가 이곳에 주소지를 두고 생활했을리가 만무하다. 또
1921년 1심 판결문에서 주소지가 부정(不定)으로 기재된 것을 보면 추측건대 서류상으로 다른 이의 주소지와 혼동이 되었거나 이춘숙이 주소지를 허위로 기재했을 가능성이 있다.